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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퇴로리 여주이씨 서고정사 西皐精舍

천부인권 2018. 5. 16. 17:46

 

2018.5.14. 밀양 서고정사 입구 모습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7호로 지정된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251번지에 위치한 서고정사(西皐精舍)는 네비에 주소를 입력하고 가도 헷갈리게 안내를 하여 자칫 찾지 못할 경우가 있다. 방문하기 전에 위성사진으로 한번쯤 알아보고 찾는 것이 어렵게 찾지 않는 방법이다. 퇴로리 마을회관을 지나 밀양치즈스쿨를 우측으로 끼고 가는 농로를 따라 가면 퇴로리(退老里) 뒤쪽의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마을로 흘러오는 봇도랑을 따라 산속으로 계속 90m를 가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마주하고 기다린다.

 

 

2018.5.14. 밀양 서고정사 안내판

 

 

2018.5.14. 밀양 부북면 퇴로리 여주이씨의 서고정사

 

서고정사는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가 고종 27년(1890)에 두 아우 능구(能九), 명구(命九)와 함께 단장면 무릉리에서 퇴로에 옮겨 산지 8년 후 광무 2년(1898)에 창건하고 서식(棲息)하면서 후진을 교도(敎道)하고 경사(經史)를 연구하던 별업(別業)이다. 이익구(李翊九 1838~1912)는 연산조(燕山朝)에 밀양으로 남하한 교위(校尉) 사필(師弼)의 13대손이며 자유헌(自濡軒) 만백(萬白)의 7세손으로 한말의 숨은 선각자이다. 국조(國祚)의 회복은 오로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보급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개혁경제(改革經濟)로 후진을 교도하더니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두문불출하고 저술로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 비범한 사상은 『항재집(恒齋集)』과 『독사차기(讀史箚記))』에서 엿볼 수 있다.

 

 

2018.5.14. 밀양 서고정사의 영역

 

서고정사(西皐精舍)로 지칭하는 이곳에는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서고정사를 관리하는 고직사(庫直舍)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고직사에는 지금 사람이 살고 있다. 따라서 특별히 연락을 하지 않아도 방문하여 둘러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018.5.14. 서고정사 고직사 모습

 

 

 

 

서고정사가 위치한 영역에도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서고정사와 한서암이다. 이곳은 고직사와 담장으로 분리하였고 작은 협문 4개가 동서남북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지금은 고직사에서 들어가는 동문만 개방되어 있다. 서고정사는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고 마루에 먼지하나 없어 매일 관리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북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맑은 물이 약수로 샘솟는 침우천(枕雨泉)를 만나고 한서암 앞을 지나 “『” 모양의 활수당(活水塘)에 모였다가 담장 아래로 빠져간다. 연못 속에는 잉어가 퍼덕이고 잠자는 연이라는 수련이 지금은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연못 중앙에는 수미산(須彌山)이 자리를 하고 있다. 수미산에는 눈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는데 처음 수미산을 만들 때 심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뜰에는 각종 화초와 나무들이 즐비한데 파초, 살구나무, 석류나무, 목련, 연산홍, 수수꽃다리, 불두화, 복숭나무, 눈주목나무, 주목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편백나무, 식나무, 매화나무, 회향나무, 목단, 삼나무, 쥐똥나무, 팔손이, 공조팝, 백송, 은행나무, 배롱나무, 금송, 명자나무, 꽝꽝나무, 등이 다양하게 심어져 있다. 특히 백송(白松)은 가슴높이 둘레가 170cm로 이 서고정사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할 만한 크기이다.

 

 

 

 

2018.5.14 서고정사 편액

 

 

 

 

항재(恒齋)

 

 

항재잠 (恒齋箴)

 

 

 

 

 

 

 

서고정사기(西皐精舍記)

응천(凝川)1)의 북쪽 20리쯤에 울창하고 깊은 빼어난 봉우리가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피지 않은 연꽃봉우리가 물 위로 나와 꽃받침이 나뉘어 받치고 있는듯한 것이 화악(華岳) 이다.  화악의 한 갈래가 북에서 남으로 마치 옥 죽순이 밀고 나와 금병풍을 펼쳐 놓은 듯 구불구불 둘러싸여 깊숙하게 특별한 한 구역을 만든 곳이 퇴로 촌이다. 마을 서쪽으로 2백보를 가면 산기슭을 감아 돌아 숲과 골짜기 그윽한데 샘물 소리가 마치 고리 패옥이 울리는듯하니 곧 정사가 있는 곳이다.
정사는 모두 네 칸인데, 동편에 만든 방 2칸을 항재(恒齋)라 하였다. 그 뜻은 가친께서 이미 잠(箴)을 지어 걸어 놓았다. 서쪽으로 마루 두 칸을 역락(亦樂)이라 하였으니,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 한가’라는 공자의 말씀에서 취한 것이다. 방을 두 칸으로 함은 노유가 자리를 달리함이요, 북쪽에 벽장을 내어 여기 책을 간수한다. 서남으로 지게문을 낸 것은 마루와 통하게 함이요, 마루를 또 남으로 열어둔 것은 연못에 임하게 함이요, 그 서북에 바라지문을 단 것은 납양을 위한 것이다.
바라지문 밖에 작은 툇마루를 내었다. 툇마루 북쪽에는 약포가 있고, 그 서쪽에는 죽오(竹塢)2)가 있다. 그 남쪽에 한 석간수 샘이 솟는데 매우 맑고, 비록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때가 없다. 주자의 시에서 취하여 침우천(枕雨泉)이라 이름 하였으니, 대개 군자가 어려서는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행하려 하는 것이니, 비록 산림에 살며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더라도 이 세상에 혜택을 끼침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다. 그 샘물을 섬돌 밑으로 따라 흐르게 하여 모난 연못을 만들었는데,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즈음 연꽃이 활짝 피고, 거기 잉어 수십 마리가 힘차게 헤엄을 치니 보기에 매우 좋다. 주자(朱子)의 시어(詩語)에서 취하여 활수당(活水塘)이라 이름 하였으니,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근본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맑게 하려는 뜻이다.
연못 곁에 다시 세 칸 집을 지었는데, 구름이 문에 어리고 난간이 물에 임하여 자못 상쾌하여 머무를 만 하므로 한서암(寒棲庵)이라 명하였으니, 이것은 주자의 반초은(反招隱)3)의 뜻을 딴 것이다. 한서암 밖에 작은 개울이 밤낮을 쉬지 않고 졸졸 흐르니 이를 영과간(盈科澗)이라 이름 하였고, 이 개울 건너 서쪽에는 작은 둔덕이 깎아 세운 듯한데, 가느다란 길을 따라 오를 수 있기에 이를 일제안(一躋岸)이라 이름 하였고, 그 언덕 아래 다시 맑고 찬 샘물이 솟아, 무더운 여름에 마시면 더위를 씻어주는 고로 과육천(果育泉)이라 이름 하였다. 대개 배우는 사람이 주역(周易)의 몽괘(蒙卦)를 보아 행실을 과단성 있게 하고, 덕을 길러 차례를 좇아 노력하면 스스로 향상해 갈 것이라. 그러니 여기 샘(泉)이다, 개울(澗)이다, 둔덕(岸)이다 하는 것들이 비록 작으나 이로써 큰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둔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한 골에 이르는데 그윽이 깊어 개울의 근원이 된다. 골에는 자주 흰 구름이 내리고, 맑은 물이 곧잘 격류를 이루며, 비 개인 후가 더욱 아름다워서 옛 이름 그대로 제가곡(霽佳谷)이라 이른다. 이골에서 시작한 작은 길을 따라 정사의 남쪽으로 몇 걸음 내려오면, 작은 언덕을 만나는데, 넓이가 일무(一畝)4)쯤이요, 약간 높아 시원하니 여기가 곧 서고(西皐)이다. 정사의 이름은 여기서 취한 것이다.
여기에 또한 집 세 칸을 두어, 관동(冠童)이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석음재(惜陰齋)라 편액 하였다. 이 이름의 뜻은 가친께서 그 기문에 밝혀 두셨다. 석음재의 주위에 심은 복숭아, 은행, 밤, 살구 등속의 나무가 자라서 모두 그 키가 담장과 견줄 만큼 무성하여 보기에 좋다.
수풀을 헤치고 위로 오르면 한 야트막한 뫼가 있다. 그리 높지도 않아 올라가 조망하기에 알맞고, 솔과 삼나무가 많아 후조강(後凋岡)이라 이름 하였다. 여기서 남으로 십여 보 내려오면 두어 무(畝) 크기의 못이 있는데, 맑은 물이 바람에 일렁이는 중에 마름 풀과 가시연(菱芡-능검)5)이 위를 덮고 있고, 둑에 버드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바람을 쏘이고 목욕하기에 알맞아 풍욕담(風浴潭)이라 했다.
 담(潭)의 남쪽에는 논두렁이 연이어져 있고, 마을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이 들판에서 경작하는 고로 이를 우경평(耦耕坪)이라 했다. 우경평의 남쪽에는 얕은 뫼를 돌아 길이 굽어지는 곳에 긴 숲이 있어 어귀를 막고 있으니 이를 곡구림(谷口林)이라 했다. 동네어귀를 들어오면 아름드리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큰 것은 열 아름이나 되고, 그 아래를 돌로 단을 쌓아 둘렀으니,
옛적 이씨6) 네 형제가 손수 심은 것으로, 이름 하여 <사우정(四友亭)>이라 했으니 여기가 곧 그 터이다. 사우정의 북쪽으로 길이 두 가닥이니, 하나는 마을에 이르고, 또 하나는 서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북쪽으로 비시듬 하게 나 석음재 아래 작은 다리로 이어니지, 이 길을 <심진경(尋眞徑)>이라 하고, 그 다리를 영귀교(詠歸橋)라 했다. 이 모두를 아울러 서고정사라 하니, 위에서 본 여러 기이한 경치들을 거두어 오로지 정사에 돌리려 함이다.
정사를 세우기 시작하기는 무술년(주: 1898년) 봄이고, 서너 달지나 집이 완성됨에 가친께서 그 중에서 노닐며 독서하시고, 여가가 있으면 두셋 관동을 데리고 그윽한 경치를 찾고 험한 곳을 넘으며, 혹은 언덕을 올라 휘파람을 불고, 물에 임하여 잔 띄우고 시 읊으며, 뜻에 따라 가는 바에 흥이 일어 돌아오며, 돌아와서는 책상을 대하여 묵묵히 글 속에 침잠하기를 흔연히 하셔서 늙음이 이르는 줄 모르셨다.
어느 날, 맞아들인 나를 불러 가르쳐 이르시기를, “무릇 천지간의 물(物)에는 각기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오직 계곡과 산, 천석들은 공공의 자연물이라, 조물주가 꼭 넉넉하고 한가로운 들판이나 적막한 물가에 두어 속인의 취할 바가 되지 못해, 왕왕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아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이다. 내가 여기에 정사를 세웠으니 산은 나의 발자국이 미치는 곳이요, 계루는 내 잔을 띄우는 곳이요, 샘물은 내가 마시고, 바위에는 내가 머물고, 연못에는 내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들판은 내가 가꾸나니, 무릇 정사 둘레의 이 언덕과 저 골짜기의 아름다움이나, 이 물과 저 돌의 기이함이 내 것 아님이 없지 않은가. 이미 내가 가진 바인데 어찌 이름이 없겠는가. 내가 이미 이름을 지은 바에 어찌 기문이 없겠는가. 일이 이러한 즉, 내가 지은 것을 네가 기술해주기를 바라며, 내가 세운 집을 네가 단청해 주기를 바란다. 이제 내가 곳곳에 이름을 붙였으니 너에게 기록할 것을 명하나니 이 일에 힘쓰기를 바란다.
이에 불초가 명을 받으니 무거운 짐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송구하고 두렵다. 드디어, 감히 명명하신 뜻을 여쭙고, 겸하여 평소 아버님 말씀을 적어, 물러나 삼가 정사의 기문으로 삼는다. 

 

불초자(不肖子) 병희(炳憙) 삼가 지음

 

1) 응천 : 밀양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남천강의 옛 이름
2) 죽오 : 대나무 숲으로 된 울(또는 둔덕)을 뜻함.
3) 반초은 : 주자(朱子)가 무이산(武夷山)에 무이정사(武夷精舍)라는 강학처를 만들고, 그 경내한서관(寒棲館)에서 ‘반초은’이라는 글을 지어 남겼음.
4) 일무는 사방 100보쯤의 넓이.
5) 능검(菱芡) : 둘 다 수초임.
6) 함평 이씨를 이름.

西皐精舍記(원문)

凝之北二十里 有峯蔚然深水 望之若萳萏出水 蔕萼分數者 華嶽也
응지북이십리 유봉울연심수 망지약남담출수 체악분수자  화악야
嶽之一支 自北而南 如抽玉荀簇金屛 逶迤環擁 窈然作別一區者 退老村也
악지일지 자북이남 여추옥순족금병 위이환옹 요연작별일구자 퇴로촌야
有村之西 行二百步 岡麓回抱 林壑幽邃 漸聞泉聲琮琤 如鳴環佩者 卽精舍之所在也
유촌지서 행이백보 강록회포 임학유수 점문천성종쟁 여명환패자 즉정사지소재야
精舍凡四架 動爲室者二架 曰恒齋 恒之義 則家大人 已箴而揭之矣 西爲堂者二架 曰亦樂
정사범사가 동위실자이가 왈항재 항지의 칙가대인 이잠이게지의 서위당자이가 왈역락
取夫子語 樂與朋友共之之意也 其爲制室 有兩夾 老幼異宮也
취부자어 락여붕우공지지의야 기위제실 유량협 노유이궁야
北有複壁 以藏書也 西南其戶 以通堂也  堂又敞其南 以臨池 牖其西北 以納凉
북유복벽 이장서야 서남기호 이통당야  당우창기남 이림지 유기서북 이납량
牖之外 爲小軒以翼之 軒之北 有樂圃 圃之西 有竹塢
유지외 위소헌이익지 헌지북 유락포 포지서 유죽오
塢之南 有泉滃然出於石間 甚淸澈 雖大旱無凅
오지남 유천옹연출어석간 심청철 수대한무고
取朱先生詩 名之曰枕雨泉 夫君子幼而學之 壯而欲行之 雖林居瓢飮 不忘致澤之意也
취주선생시 명지왈침우천 부군자유이학지 장이욕행지 수림거표음 불망치택지의야
疏其源 循除而下 鑿之爲小方塘 每夏秋之交 芙荷盛開 有鯈魚數十尾 潑潑遊泳 觀甚適也
소기원 순제이하 착지위소방당 매하추지교 부하성개 유조어수십미 발발유영 관심적야
取朱詩語 名之曰活水塘 欲學者端本澄源之義也 塘之傍 又爲屋二間 雲窗水檻 破蕭灑可棲
취주시어 명지왈활수당 욕학자단본징원지의야 당지방 우위옥이간 운창수함 파소쇄가서
名之曰寒棲庵 取雲谷反招隱之意也
명지왈한서암 취운곡반초응지의야
庵外有小澗 決決成流 晝夜不捨 故名之曰盈科澗 渡澗而西 有小岸斗絶 由徹逕 可以躋攀
암위유사간 결결성류 주야불사 고명지왈영과간 도간이서 유소안두절 유철경 가이제반
故名之曰一躋岸 岸下又有洌泉出焉 盛夏飮之以滌暑 故名之曰果育泉
고명지왈일제안 안하우유열천출언 성하음지이척서 고명지왈과육천
夫學者 觀蒙之象 果行育德 循序以進努力而躋攀 則自能尋向上去也
부학자 관몽지상 과행육덕 순서이진노력이제반 즉자능심항상거야
然則泉也澗也岸也 雖小 可以諭大矣
연즉천야간야안야 수소 가이유대의
從岸而西 有谷窈而深澗之源 蓋出於是谷 谷中多白雲 又有淸流激湍 每於霽後益佳 故伋奮名曰
종안이서 유곡요이심간지원 개출어시곡 곡중다백운 우유청유격단 매어제후익가 고급분명왈
霽佳谷 自谷而出 有小逕 繞出於精舍之南 行不數武 有小皐 廣一畝 破爽塏軒敞 卽所謂西皐也
제가곡 자욕이출 유소경 요출어정사지남 행불수무 유소고 광일무 파상개헌창 즉소위서고야
精舍之取名盖以此也
정사지취명개이차야
亦置屋三間 爲冠童肄業之所 扁之曰惜陰齋 名齋之義 則家大人記盡之矣 齋之傍 桃杏栭栗楩楠
역치옥삼간 위관동이업지소 편지왈석음재 명재지의 즉가대인기진지의 재지방 도행이율편남
之屬 長皆及牆 薈蔚可愛 穿林而上 有小峯 不甚高 宜登眺 以其多松杉 故名之曰後凋岡
지속 장개급장 회울가애 천림이상 유소봉 불심고 의등조 이기다송삼 고명지왈후조강
自岡而下 南行十餘步 有數畝之澤 澄泓演漾 菱芡被其上 垂楊蔭其堤 可以風乎浴乎 故名之曰風
자강이하 남행십여보 유수무지택 징홍연양 릉검피기상 수양음기제 가이풍호욕호 고명지왈풍
浴潭 潭之南 阡陌相連 溝洫旁午 村人皆耕於是野 故名之曰耘耕坪 遵郊而南 峯回路轉 有長林
욕담 담지남 천맥상연 구혁방오 촌인개경어시야 고명지왈운경평 준교이남 봉회로전 유장림
鎖其口 故名之曰谷口林 由谷口而入 有喬木數株 大可十圍其下築壇以圍之 昔有李氏四昆季手植
쇄기구 고명지왈곡구림 유곡구이입 유교목수주 대가십위기하축단이위지 석유이씨사곤계수식
而名之曰四友亭 卽其址也 亭之北 有二徑 其一至于村 其一折而西 又迤而北 過惜陰齋下 從小
이명지왈사우정 즉기지야 정지북 유이경 기일지우촌 기일절이서 우이이북 과석음재하 종소
橋而入 名其徑曰尋眞 名其橋曰詠歸 總而扁之曰書皐精舍 蓋所以收諸奇勝 總歸之精舍也
교이입 명기경왈심진 명기교왈영귀 총이편지왈서고정사 개소이수제기승 총귀지정사야
精舍之營 始於戊戌之春 越三朔而落之 屋則成 家大人優遊讀書於其中 暇則携兩三冠童 探幽勝
정사지영 시어무술지춘 월삼삭이락지 옥즉성 가대인우유독서어기중 가칙휴량삼관동 탐유승
越險阻 或登高舒嘯 或臨流觴詠 隨意所適 興闌而歸 歸又對案 默坐沈潛硏賾 欣然不知老之至也
월험조 혹등고서소 혹림류상영 수의소적 흥난이귀 귀우대안 묵좌침참연색 흔연불지노지지야
日招兒子炳憙而敎之曰 凡天地之間 物各有主 有主則有名 惟溪山泉石 是公共之物也
일초아자병희이교지왈 범천진지간 물각유주 유주칙유명 유계산천석 시공공지물야
造物者 必置之寬閒之也 寂寞之濱 不爲俗人所取 故往往不爲人有 而人亦莫之名矣
조물자 필치이관한지야 적막지빈 불위속인소취 고왕왕불위인유 이인역막지명의
自吾之築於斯 山吾屐之所及也 溪吾觴之所泛也 泉吾飮 而巖吾樓 潭吾釣 而野吾耕
자오지축어사 산오극지소급야 계오상지소범야 천오음 이암오루 담오조 이야오경
凡環精舍一邱一壑之美一水一石之奇 有不爲吾有者乎
범환정사일구일학지미일수일석지기 유부위오유자호
夫旣吾有之 嗚可以無名乎 旣吾名之 嗚可以無記乎 雖然 吾所以作之 欲其汝述之也
부기오유지 오가이무명호 기오명지 오가이무기호 수연 오소이작지 욕기여술지야
吾所以堂之 欲其汝雘之也
오소이당지 욕기여확지야
此吾之隨處立名 而必命汝記之也 汝其勉旃 余不肖承命夔慄 懼無以負荷也
차오지수처립명 이필명여기지야 여기면전 여불초승명기율 구무이부하야
遂敢請命名之義 兼述趨庭之聞 退而敬爲之記
수감청명명지의 겸술추정지문 퇴이경위지기

不肖子 炳憙 謹書

불초자 병희 근서


*중요 한자

萳 풀이름 남 萏 연꽃봉우리 담 蔕 가시 체, 꼭지 체 萼 꽃받침악 逶 구불구불갈 위 迤 비스듬할 이 邃 깊을 수 琮 옥홀 종 琤 옥소리 쟁 牖 창 유 凅  마을 학 躋 오을 제 雘 진사 확, 단청(丹靑)하다  夔 조심할 기 濱 물가 빈 旃 어저사 전 肄 익힐 이

 

※ 瓢飮(단음)하면 한 소쿠리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라는 말로 매우 소박한 생활이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옹아편(雍也篇)에는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나옴.
※ 欣然不知老之至也(흔연불지노지지야)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18章 비스한 대목인용
子曰 ― 女奚不曰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너는 왜 말하지 않았는가? 그(공자)의 사람됨은 한번 분발하면 끼니를 잊고 도를 즐길때는 모든 근심걱정을 잊을 정도로 심취해서 곧 장차 늙어 가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 ‘女’ 字를 ‘汝’ 字로 보면 됨

 

 

 

 

 

 

 

 

名區糚點可安身  좋은 땅 가리어 집 지으니 가히 몸 편안하고
蕭灑報亭絶世塵  산뜻하고 깨끗한 새 정자에 세상 티끌 끊어졌네.
晩境藏修林下屋  노경에 수풀 아래 집을 지어 학문을 닦고
晴窓對越卷中人  맑게 개인 창 대하니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네.
笣竹茂松宜獻頌  우거진 대나무 무성한 소나무도  기리 칭송하니
長烟皓月摠怡神  긴 연하 밝은 달은 다 마음을 즐겁게 하네.
趨庭日夕陪歡笑  아들이 아버지 가르침 받으니 조석으로 기쁜 마음 배로 더하고
老幼熙熙太古民  노소가 서로 화락하니 태고의 백성이 아닐까.
子炳壽               아들 병수(炳壽)

 

해문- 우산 남상순(牛山 南相珣)

 

 

 

 

 

也宜頤性也安身  온화하고 양순하게 길러진 성품이 몸을 편안하게 하고
惟有林泉不染塵  오직 티끌에 오염되지 않는 숲속 샘물이 있네.
好鳥止隅皆勝友  새가 구석진 곳에 머물기를 좋아함은 모두 짝짓기에 나음이고
落花逐水少漁人  떨어진 꽃은 물과 젊은 어부를 뒤따라 흘러 가네.
良辰獻酒觥無筭  아름다운 새벽에 술잔을 셀 수 없이 권하고
靜界哦詩筆有神  고요한 주변에서 시를 읊조리니 붓에 신비스런 운치가 있네.
杖屨陪遊隨處樂  지팡이와 신발의 도움을 받아 떠도니 즐거움이 머무르는구나.
一區烟月太平民  한 거처에서 태평연월인 백성
        從子 炳圭  조카 병규

 

해문-약수(필명)

 

 

 

 

서고정사 마루에서 본 풍경

 

서고정사 마루 풍경

 

 

서고정사 모습

 

 

서고정사에서 본 한서암 풍경

 

 

한서암 마루 풍경

 

 

한서암 앞 연못

 

 

한서암의 백송

 

 

백송의 위엄

 

연못과 한서암

 

 

한서암과 서고정사 그리고 연 못

 

 

고직사에서  본 한서암

 

 

 

 

한서암 편액

 

 

 

 

 

 

 

 

寒棲庵記
華嶽之陽 有西皋精舍 者 恆齋李丈人之所從遯也 相稷嘗齎刺而候焉 入其洞 碧嶂環繚 淸流潺湲原野平衍 林木交翠 入其門 惜陰之齋 弦歌盈耳 亦樂之堂 遠朋滿座 入其室 白首申申 手不停披而列侍左右 講說古今者 俱是天倫中賢且秀者也 相稷心悅之 遂奉撰杖屨 而指點其軒架 嗟賞其邱壑 仍至塘畔小亭 陽林之晝紅入簾 陰厓之夜淙動几 登臨舒嘯 神氣爽然 殆若置身於竹柏桂樹之間 而耳聽淸商 手拊枯桐也 丈人顧而笑曰 此吾寒棲之庵也
子其記之 因命其胤子 出示西皋總記 有所謂雲牕水檻 蕭灑可棲者 卽玆庵也 朱先生反招之操 下有老翁句語 蓋丈人命名之義 而武夷館中 抱甕靡遺力 焚香坐看壁之詩 固已寫出今日境界矣 噫丈人之學 體用兼該 平生事爲 未嘗不拳拳於康濟之術 施之鄕黨宗族 而常恐其一人不庇 獨不能自庇其身 而乃寒棲爲哉 吾知丈人之志 輕爵祿 而重名檢 列鼎累茵 猶不足比埒於木食澗飮之樂 故能發此天秘之勝區 優游自適 以忘其老 而至如環庵之一 水一石林谷橋岸之類 無不爲其管攝 幷受嘉錫 而惟是澄塘一畝 最爲庵之眉目 挹荷露而灑庭 掬蘋浪而漱齒 朗誦源頭活來之句 淨對鑑面而開心 丈人寒棲之樂 不其在玆乎 抑又聞之 傳曰 寒以成物 蓋寒乎己者 所以能燠乎物 是以 君子惡衣菲宮 而暴露者得以芘 損甘節珍 而飢餓者得以飽 此古之聖賢 所以晏然於環堵之室 而其經綸之蘊 固足以濟天下也 然則丈人之棲 不但曰樂其肥遯而已 必欲益讀其已讀之書 而廣其平生之所拳拳者 以全其成物之仁也歟
光州 盧相稷 謹書

 

한서암기(寒棲庵記)

화악(華嶽) 남쪽에 있는 서고정사(西皋精舍)는 이항재(李恆齋)어른이 은둔한 곳이다. 내가 일찍이 명함을 갖추어 문안하러 그 동네에 들어가니 푸른 산이 빙 둘러 맑은 물이 잔잔하고 들판이 평평하게 펼쳐지고 숲의 나무가 푸르렀다. 그 문간에 들어가니 석음재(惜陰齋)에는 글 읽는 소리가 귀에 가득하고 역락당(亦樂堂)에는 먼 곳에서 온 붕우들이 좌중에 가득하였으며 그 방에 들어가니 흰머리의 노인이 거듭거듭 쉴 새 없이 책을 뒤적이고 좌우에 늘어 앉아 고금을 강설하는 사람은 모두 친족 가운데서 현명한 수재들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마침내 지팡이와 신발을 받들고 그 마루와 건물을 손짓하고 그 언덕과 골짜기를 감상하다가 이내 못가의 작은 정자에 이르렀다. 양지바른 숲속에 낮에는 붉은 해가 발 안으로 들어오고 그늘진 언덕배기에 밤에는 물소리가 안석에 울리며, 올라가 기운을 펴고 읊조리면 정신이 상쾌하여 마치 대나무, 잣나무, 계수나무 사이에 몸을 둔 채 귀로는 청상(淸商)의 음률을 듣고 손으로는 거문고를 뜯는 듯하였다. 항재 어른이 돌아보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이 나의 한서암(寒棲庵)이다. 자네가 그 기문을 쓰라.”고 하면서, 그 맏아들에게 명하여 『서고총기(西皋總記)』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구름 창과 물가의 난간이 깔끔하여 거처할 만하다.”고 한 것이 곧 이 암자이다. 주선생(朱先生)의 「반초은조(反招隱操)」에 “그 아래 늙은이가 있어”*¹)라고 한 구절이 대개 항재어른이 이곳의 이름을 지은 뜻인데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가운데 “물동이를 안고 온 힘을 쏟다가 향을 태우며 앉아서 벽을 본다.”는 시가 진실로 오늘의 경지를 그려낸 것이다.
아아, 항재어른의 학문은 체용(體用)을 겸비하여 평생의 사업은 백성을 편안하게 구제하는 방도에 힘쓰지 않음이 없어서 향당과 종족 사이 베푸는 일에 있어서도 항상 한 사람이라도 덮어주지 못할까 염려하면서 정작 그 몸은 스스로 덮지 못하여 추운 둥지를 튼 것일까? 나는 항재 어른의 뜻이 벼슬을 가볍게 여기고 명분을 소중하게 여겨 호사스런 음식과 편안한 자리도 오히려 나무 열매 따먹고 시냇물 마시는 낙에 견줄 수가 없다고 여기는 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 하늘이 감추어도 좋은 구역을 능히 찾아내어서 우유자적(優遊自適)하며 늙어가는 것도 잊어버리면서 한서암을 둘러싼 한 줄기 물, 한 덩이의 돌, 숲과 골짜기와 다리와 언덕에 이르기 까지도 모두 다 관장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 하였는데 오직 이곳 한 뙈기 맑은 연못이 한서암에서 가장 미목이 되는 곳이다. 연잎의 이슬을 당겨 뜰에 뿌리고 마름풀 사이의 물을 움켜서 양치하며, “원두(源頭)의 활수(活水)가 흘러내린다.”는 구절을 낭랑하게 읊으며 거울같이 깨끗한 수면을 대하여 마음을 여니, 항재 어른이 추운 곳에 깃들이는 낙이 마아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또 들으니 전(傳)에 이르기를 “추위로 사물을 이룬다.”하였다. 대개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자는 능히 사물을 따뜻하게 할 수 있어서 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의복이 남루하고 거처가 누추하면 헐벗은 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고 군자가 달콤하고 진기한 음식을 절제하면 굶주린 자들이 배부를 수 있다. 이는 옛날의 성현들이 자그마한 집에 태연하게 거처하면서도 그 축적된 경륜은 족히 천하를 구제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항재어른의 거처는 은거를 즐기는데 그친다고만 할 수 없다. 반드시 이미 읽었던 책을 더 읽고 평생토록 애썼던 것을 더욱 넓혀서 사물을 이루어주는 인자함을 온전하게 하려 함이리라.
광주(光州) 노상직(盧相稷) 근서(謹書)

 

*¹)“그 아래 늙은이가 있어”라는 것은 주자의 「반초은조(反招隱操)」에 “남산 가운데 계수나무, 가을바람에 구름이 아득한데 그 아래 차가운 둥지의 늙은이는 나무열매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며 봄 겨울을 모른다. (南山之中桂樹 秋風雲㝠濛 下有寒棲老翁 木食澗飲迷春冬)”고 하였다.

 

[출처 및 참고]
국역 밀양누정록(2008.2.29.)-밀양문화원
태로여주이씨 고가 쌍매당(블로그)-이희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