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밀양 위양리 안동권씨 학산정사 鶴山精舍

천부인권 2018. 5. 20. 20:42



2018.5.14 밀양 위양리와 학산정사 모습


밀양시 부북면 위양2길 20-7는 학산정사(鶴山精舍)가 위치한 곳이다. 이 정사는 학산공(鶴山公) 권삼변(權三變)이 창건한 집으로 남쪽으로 630m 떨어진 위양지에는 그가 이름 짓고 후손이 건물을 완성한 완재정(宛在亭)이 있다.




2018.5.14 학산정사를 마을에서 본 모습


학산정사(鶴山精舍)은 학산공(鶴山公) 권삼변(權三變;1577~1645)이 창건하여 강마(講磨) 서식(棲息)하던 집으로 영조(英祖) 연간에 증손 정양당(靜養堂) 대임(大任)과 화암(華庵) 대징(大徵) 형제가 중수하였는데 오랜 세월에 다시 퇴락 되었더니 7세손 상두(相斗), 인철(仁喆), 상호(相祜) 등이 고종 5년(1868)에 중건하였다.
학산공의 본관은 안동인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산청 단성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밀양으로 피난하던 도중 창녕 대산(臺山)에서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 갔다가 선조 37년(1604)에 귀환하였다. 이곳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어머니의 상에 여묘하고 복을 벗은 후에 추모의 감회를 품어 묘소 가까운 곳에 정사를 짓고 자호를 학산(鶴山)이라 하였다.



2018.5.14 학산정사 앞 주차장에서


학산정사(鶴山精舍) 중건기(重建記)


정사(精舍)는 곧 고 권선생 학산공(鶴山公)이 학문을 닦고 쉬던 곳이다. 선생이 임진왜란을 당하였을 때 겨우 왕기(汪錡)*¹)의 나이였으나 용맹과 힘은 따를 자가 없었고 지략이 무리들 보다 훨씬 뛰어났다. 어머니를 업고 난리를 피하였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베었다. 일이 급하게 되자 어머니를 보호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피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적의 추장이 감동하여 치마폭에 큰 글자로 쓰기를 “이 사람은 조선국 효자의 어머니이니 뒤에 오는 군사는 해치지 말라”고 하였고 또한 공의 모습을 사랑하여 묶어서 배에 싣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공은 수은(睡隱) 강항(姜抗), 송담(松潭) 백수회(白受繪), 소산(蘇山) 정호인(鄭好仁) 등과 함께 깊은 굴에 구금되었는데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았고 시를 읊어 함께 맹세하기를 “남관(南冠)의 포로*²)가 되었다고 울지 않고, 북해(北海) 소무(蘇武)*³)의 마음 더욱 견고하리라.”하였다. 또 ‘해를 보고 절한다.’는 시에 이르기를 “금빛 삼족오가 날개를 빌려주면 돌아가 모친께 절하리라.”하였는데, 왜인들이 “배일의사(拜日義士)”라 칭하였다. 그 뒤 갑진년에 사절을 따라 배를 타고 돌아왔다. 모부인이 아직 탈이 없어서 끝까지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상을 치름에 슬픔을 다하였다. 분뇨를 맛보고 속옷을 빤 것이나, 약을 구하자 토끼가 엎드리고, 까마귀가 여막에 모이고, 범이 할퀴어 샘물이 나오는 등은 어찌 정성이 하늘에 닿고 미물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효도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했다 할 것이요, 충성에 있어서도 겸하여 지극했다 할 수 있다.

이에 고을의 진산인 화악산 아래 재실을 지었는데 묘소에 가까워 추모의 감회를 붙였고 학산(鶴山)를 스스로의 호로 삼았으니 대개 요동의 학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학이라는 새는 신선같이 오래 살고 흰빛으로 깨끗하며, 산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높디높게 무리에서 벗어나니 이름을 돌아보고 의미를 생각하면 또한 선생의 절조를 볼 수 있다. 증손 정양당(靜養堂)과 화암(華庵) 형제 두 분에 이르러서는 효도와 우애, 학문과 행실로 자못 집안일을 감당하여 덩그렇게 잘 꾸몄으나, 그 뒤로 시대가 오래되어 무너지게 된지 백여 년이었다. 7세손 상두(相斗), 인철(仁喆), 상호(相祜) 등이 선조의 뜻이 실추된데 개탄하여 재목을 모으고 일을 주간하여 병인년에 시작하여 무인년에 마쳤다.

오호라 내가 일찍이 들으니 어진 사람이 말을 한번 쉬게 하거나 지팡이 한번 놓은 곳에도 모두 서원을 세운다고 하는데, 대개 그로써 어진 이를 나타내고 후대의 법도로 삼으려 함이다. 이 재실의 흥폐는 어찌 사문(斯文)의 성쇠에 관계되지 않겠는가? 선생이 재실을 창건하여 후손에 물려주고 후손이 건물을 지어 선조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그 조상에 그 손자 됨이 마땅하다. 

힘쓸지어다. 여러 후손들은 이 재실을 지키고 이 사업을 지켜서 끝까지 실추하지 말라. 나는 그늘에 있는 학의 소리로써 그 자손들이 다시 화답하여 마침내 높은 언덕에서 울어 하늘에까지 들리리라 짐작한다.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비록 고산(孤山)이 매양 방문한 것이나 나예장(羅豫章)이 먼저 문안하였던 일은 하지 못하였으나, 스스로 사모하여 추앙한 지는 오래이다. 첨추(僉樞) 권수(權洙)가 그 아들 상규(相奎)에게 명하여 한 권의 사적을 가지고 서찰을 보내에 나게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 효성스런 생각을 중시하여 치졸함을 잊고서 대략 기문을 짓는다.

知府(지부) 杞溪後學(기계후학) 兪致長(유치장) 謹記(근기)


왕기(汪錡)*¹) :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장상(長殤)의 나이[16~19세 사이]에 애공(哀公)과 함께 전투에 나아가 죽었다는 소년이다.

남관(南冠)의 포로*²) : 춘추시대 초나라의 종의(鍾儀)가 포로로 진나라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고국의 의관을 그대로 입고 있다가 나중에 풀려난 일이 있다. 이처럼 외국에 포로가 되어서도 조국을 잊지 않는 지조를 일컫는 말이다.

소무(蘇武)*³) : 한(韓)나라의 장수이다. 그는 흉노에 잡혀가서 갖은 협박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한나라로 돌아왔다.




학산정사의 솟을삼문



학산정사 정면 모습



학산정사의 은행나무


학산정사 솟을삼문 우측에는 수령 150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가슴높이 둘레가 284cm, 높이 21m이다.




학산정사 편액






鶴山精舍重建記


精舍乃故權先生鶴山公講磨樓息之所也. 先生當龍蛇之焚 年甫注錡 勇力絶人 智略超倫 負母避難 倡義斬馘,乃至事迫 衛母爭死 血淚被面 .賊酋感之 大書裳幅曰 此鮮國孝子之母 後軍勿害 又愛公貌 綑載以歸 公與睡隱姜公沆 松潭白公受繪 蘇山鄭公好仁 同拘幽窟 罵賊不屈. 賦詩公誓曰 不作南冠泣 彌堅僰海心. 又拜日詩曰 金鳥如借翼 歸拜北堂親  倭以拜日義士稱之. 後甲辰 수使舶還. 母夫人尙無恙 終養極孝 居憂盡哀. 嘗糞撋褻 求藥兎伏 烏集廬 虎攫泉 是豈非天格而物感耶. 先生之於孝 可謂終始 先生之於忠 亦可謂兼至矣. 乃築齋州鎭華嶽山下 近墓以寓追感 而鶴山以自號 蓋取諸遼鶴還鄕之義也.

鶴之爲鳥也 仙而壽 白而潔 山焉而不染俗 昻昻出群 顧名思義 亦可見先生之節也. 曁會 孫靜養堂華庵伯仲二公以孝友學行 頗有幹蠱而增飾輪奐 後世久至於頹壓者 百有餘年矣. 七世孫相斗仁喆相祜等 慨墜先志 鳩材幹役 始丙寅 迄戊辰. 

嗚呼 余賞聞賢仁一馬之憩一杖之息 無不立院 盖浴以表賢式後之義也. 是齋之興廢 豈非關係交之盛衰乎. 先生之創齋裕後 後伋之肯構繼先 宜其爲是祖是孫矣.

勉哉. 諸昆守是齋 守是業 至無窮而勿墜. 吾以在陰之鳴 莝其子之復和 終以九皐之鳴 擬聞于天也. 余守玆士 縱未遑孤山之每訪豫章之先問 只自慕仰資久矣.

僉樞洙 命其子相奎 袖一卷蹟 致書要余徵記.

知府 杞溪後學 兪致長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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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조]

국역밀양누정록(2008.2.29)-밀양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