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자연의 일부가 된 담양 소쇄원

천부인권 2018. 11. 1. 07:15



2011.6.12. 담양 소쇄원 조감도


대부분 여행을 통해 사람들은 안목(眼目)을 넓히고 관광지에서 타인의 새로운 생각을 접하면서 자신의 가슴과 영혼에 새로운 영감과 지식을 쌓게 된다. 2011년 고등학교 동창들과 소쇄원(瀟灑園)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 전통 집 형태와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각이 녹아있는 곳이 소쇄원이라 소개를 받았는데 사진 몇 장 찍고 휙 둘러보니 가슴에 남게 없었다. 당시 찍어 온 사진을 보면서 사람은 역시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을 통감한다. 당시에 소쇄원에 관련 된 글을 쓰지 못했고 하드웨어 깊숙이 잠들고 있었다. 이후 한양 땅을 밟을 때마다 시간을 내어 경복궁과 창경궁 등 조선시대 건축의 최고봉인 궁궐의 건축과 화계 및 나무 등 소위 조경(造景)이라는 것을 보고 느끼면서 우리 전통의 미에 대해 조금 알기 시작 했다. 그리고 조경학을 전공하며 스스로는 “변두리 지식인”이라 소개하는 친구를 통해 노거수와 조경의 미학을 배우면서 인간이 자연과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의 기본을 조금 맛보았다. 이 친구의 안내로 후쿠오카(福岡)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자리한 큐슈(九州)의 일본 정원(庭園)과 환경을 관광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왜인의 정원에 대한 생각이 담긴 태재부천만궁(太宰府天滿宮)과 고묘젠지(光明禪寺)의 정원을 구경하면서 소쇄원을 처음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2018.2.21. 광명선사의 고산수정원


당시 일본 정원의 백미라 말하는 ‘가레산스이(枯山水庭園)’을 보고 인간인 즐길 수 있는 고도의 정(靜)의 세계를 정원에 옮겨 둔 것을 보면서 왜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때 함께 간 관광회사의 이사가 해설해준 이야기가 “조경을 꾸민 주인이 정원 곳곳에 자신의 정신을 숨겨두었는데 숨겨둔 의미를 알고 볼 수 있는 것은 보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말을 했다. 그의 표현에는 모르는 사람은 바보란 소리를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고산수정원은 정원을 이용할 수는 없고 오로지 바라보면서 즐기는 정적인 공간이다. 외부인이 정원 속으로 걷는다면 정원이 망가져 아름답게 치장한 모든 것들이 훼손 된다. 그 속에서 왜인들은 멋을 찾는다.



소쇄원도
1755년에 목판화로 제작된 그림으로 조선시대 별서정원인 소쇄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곡문을 통해 흘러드는 계류를 중심으로 건물과 연못, 담장, 석축, 수목 등의 입면을 사방으로 눕혀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했다.



사실 정원(庭園)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왜놈이 만든 조어(造語)로 우리말처럼 쓰고는 있지만 외래어 이다. 앞으로는 뜻이 통하는 한 우리말 원림(園林)¹⁾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우리민족의 정신세계 속에는 건축물이 있는 공간이란 정동(靜動)이 공존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소쇄원이 그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는 원림(園林)이다. 즉 사람이 사물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함께 공간을 이용하고 본래의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원림(園林)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공간이다. 그러한 정신을 잘 표현한 원림(園林)이 소쇄원이라 할 것이다. 소쇄원에서는 건축물과 사람도 자연의 일부로서 소쇄원을 가로지르는 개울처럼, 작은 연못속의 물고기처럼 함께 이용하는 곳임을 알게 한다.
이러한 정신세계를 알게 하는 것이 “소쇄원 48영”이라 이름 하는 제월당(霽月堂)에 걸려 있는 시를 적은 편액에서 찾을 수 있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기묘사화를 계기로 출처 진퇴가 정해졌다. 그는 서울에서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서 스승이 능주로 유배될 때 함께 따라 내려왔으며, 곧 이어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그만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평생 관직생활을 단념하고 창평 지석동에 소쇄원을 조영(造營)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자신을 지키고 도학을 실현하기 위한 학문의 장으로 원림(園林)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그전부터 이미 원림을 세울 자리를 봐두고 복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²⁾ 그는 스승이 중시했던『소학』³⁾을 모든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특히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⁴⁾ 그가 평생 스승으로 존숭했던 조광조는 급진 신진사림으로서, 왕도정치를 주장하면서 경학공부를 강조하고 사장(詞章)은 상지(喪志)하는 것으로 보아 배격하였다.


【주석】
원림(園林)¹⁾ : 자연에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삼은 것. 그 안에 정자를 짓기도 하고 나무나 꽃을 심어 정원을 꾸미기도 한다.
²⁾『소쇄원사실』권2「처사공」<實記>, "處士公 幼時出遊, 偶見野鴨沿流而下, 公逐流窮源而上, 至一處巖壑幽絶, 瀑流噴灑, 公游泳徘徊樂其奇勝, 頗有卜築之志“
『소학』³⁾ : 『小學』은 고려후기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유입된 이후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성리학이 지배사상이 되면서 더욱 널리 보급ㆍ숭상되게 되었다. 그런데『소학』의 활발한 보급은 중종 10년경에 중용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때 그들은 정치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요순시대의 도덕정치에 두고, 이러한 정치의 구현과 밀접하게 결부시켜가면서『소학』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윤병희,「조선조 사풍과『소학』」,『역사학보』103집, 역사학회, 1984, 41~42쪽)
⁴⁾『소쇄원사실』권3「處士公」<李敏敍撰 行狀>, "先生之學, 篤信小學, 傍及於四書五經, 尤用力於易之剛柔ㆍ變化ㆍ消長ㆍ往來之象, 深有契焉"




소쇄원을 소개하는 알림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명승 제40호
전남 담양군 지곡리 123


소쇄원(瀟灑園)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임(園林)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성품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瀟灑翁)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五曲門)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霽月堂: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光風閣: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梁擇之)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출처 및 참조
소쇄원 안내판
국가 명승 40호 소쇄원-소쇄원 48영
소쇄원의 역사와 인문 활동 연구(2008.2)-권수용

우리 명승기행 - 김영사/김학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