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1.7 남해 미조 무민사 전경
남해 미조면 미조리로 들어가려면 제19호국도의 좌측에 위치한 무민사(武愍祠) 언덕 옆을 지나야 한다. 무민사(武愍祠)란 이름은 1397년(태조 6) 태조가 고려말 충신 최영장군의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내리면서 붙어진 이름이다. 남해안 일대와 섬에는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과 신당 등이 꽤 많이 있다.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1동에 있는 무민사(武愍祠)도 그러하고,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산 128의 장군봉에 위치한 삼덕리마을제당(三德里마을祭堂)에도 최영장군의 영정을 걸어두고 제례를 지내고 있으며, 경남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150번지에도 최영장군 사당 있다. 이처럼 남해안 해안을 따라 최영장군의 사당이 많은 것은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전쟁터가 되자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이때 왜구(倭寇)를 제압한 최영장군의 위엄은 바닷가 어민들에게는 우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곳 미조의 무민사 역시 최영장군이 왜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준 고마움에 제례를 지낸다. 그러다보니 영험한 힘에 의존하려는 신앙이 생겼을 것이다.
△ 2019.1.7 미조 무민사 외삼문
『남해군지』에는 무민사에 대한 구전(口傳)을 기록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어느 날 남해도 첨사가 잠자리에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늙은 장사(노인)이 나타나서 “최영장군의 영정과 칼이 바닷가(지금의 미조 앞바다)에 있으니 찾아서 잘 모셔 놓아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첨사는 곧 잠에서 깨어 수문장인 봉장군에게 시켜 찾아오라 하였다. 봉장군이 바닷가에 가보니 나무로 만든 궤짝이 놓여 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최영장군의 영정과 칼이 들어 있었다 한다. 첨사는 이것을 집으로 싸서 모셔다 놓았는데 어느 날 화재가 일어나니 영정이 날아서 지금의 장군당 자리에 놓여졌다. 여기에 첨사는 조그만 사당을 짓고 칼과 영정을 모셔 놓았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이 무민사에 와서 최영장군에 대해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아이 못 낳는 부부가 무민사에 와서 엎드려 절하면 아이를 낳게 되고 고기잡이배가 출항 할 때는 언제나 이 무민사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배가 출항하는 풍습이 있게 되었다.』한다.
△ 2019.1.7 미조 무민사 외삼문 武愍祠 편액
△ 2019.1.7 미조 무민사 제례 준비공간
무민사 입구의 안내판에는 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민사(武愍祠)
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539-3번지
비지정문화재
고려말의 명장 최영(崔瑩, 1317~1389)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최영장군은 왜구체복사(倭寇體覆使) 및 해사도통(海師都統)으로서 서남 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장군으로서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했던 고려의 충신이다.
조선조 성종 때에 이르러 장군의 호국 전공과 충의심을 현양하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마련한 것이 이 무민사의 시초이다. 1954년 최영장군 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이 사당을 다시 세우는 한편 1978년에 이곳을 정화하였다.
△ 2019.1.7 미조 무민사의 첨사들 불망비 군
△ 미조 무민사 비석군 중 우측으로부터 절충장군첨사최공종림거사비(折衝將軍僉使崔公琮林去思碑)
절충장군첨사최공종림거사비(折衝將軍僉使崔公琮林去思碑)
비의 제원
크기 |
총높이 13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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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높이 110cm, |
너비 48m, |
두께 17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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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높이 24cm, |
너비 68cm, |
두께 44cm |
건립시기는 광서 19년 2월(光緖 十九年 二月)로 서기 1893년이다.
비문 판독 필요
△ 절충장군행첨절제사권공희학¹⁾불망비(折衝將軍行僉節制使權公喜學不忘碑)
절충장군행첨절제사권공희학¹⁾불망비(折衝將軍行僉節制使權公喜學不忘碑)
비의 제원
크기 |
총높이 133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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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높이 84cm, |
너비 47cm, |
두께 1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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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높이 49cm, |
너비 61cm, |
두께 47cm, |
원문
戊申之亂巡撫使吳公命恒出戰成 00三等第000爲揚功臣花玎
願君盟鐵券圖像麟閣歷典州府 贈兵曹判書 光緖合玖年癸巳三月日
族孫 尙愚改修
해문
무신년(1728)난²⁾ 때 순무사³⁾ 오명항⁴⁾ 공과 함께 출전 승리하여 003등 제 000양공신의 꽃구슬을 드날렸네.
원컨대 그대가 동맹의 철권을 받고 기린각(麒麟閣)⁵⁾에 올라 고을 관아의 전적에 두루 남기를 바라노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광서 19년(1893) 계사년 3월
족손 상우가 개수(改修)⁶⁾하다.
【주석】
권희학(權喜學)¹⁾ : 1697년(숙종 23)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 최석정(崔錫鼎)의 군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교련관(敎鍊官)이 되고, 그 뒤 여러 고을의 첨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금위영 교련관으로 도순문사 오명항을 따라 안성, 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분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가의대부에 올라 화원공에 봉해졌다.
무신년(1728)난²⁾ :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으로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난이라고도 한다.
순무사(巡撫使)³⁾ : 조선시대 비상시 대민관계 등을 담당한 임시관직으로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전시(戰時)의 군무(軍務)를 맡아보는 한편, 백성들을 위무,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순무사는 의정부에서 상주하여 왕의 결재를 받는 것이 상례였다.
오명항(吳命恒)⁴⁾ :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중군(都巡撫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이인좌의 난을 토벌했다.
기린각(麒麟閣)⁵⁾ : 중국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장안(長安)의 궁중에 세운 누각을 말하며, 황제가 기린을 얻은 데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한다.
개수(改修)⁶⁾ : 길이나 집 따위를 고쳐서 바로잡거나 다시 만듦.
△ 통정대부돈녕도정권공선복불망비(通政大夫敦寧都正權公先福不忘碑)
통정대부돈녕도정권공선복불망비(通政大夫敦寧都正權公先福不忘碑)
비의 제원
크기 |
총높이 140.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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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높이 116.5cm, |
너비 40cm, |
두께 1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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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첨석 높이 24cm, |
너비 77cm, |
두께 50cm, |
원문
大我公德 盈溢鵬城 倡修洞契 支公得評 主張漁利 肥人賴生
勸獎有塾 惟聞誦聲 値荒忘斂 衆口鏶成
隨踵 侄在允
乙未五月 日 洞民立
洞執綱 朴文祥 列南0星
監林弼0 奎00
해문
크구나! 우리 공의 덕이여! 붕성에 가득 차 넘쳐흐르네.
마을 계를 만들기에 앞장섰고 공평하게 균형을 유지하네.
고기잡이의 이로움을 주장하여 사람은 살찌고 백성은 의지하네.
글방 세우기를 권장하니 생각하고 듣고 외우는 소리가 있구나.
흉년이 들자 세금 걷기를 잊었으니 모든 사람 이구동성으로 금석문을 이루었네.
뒤를 쫓아가는 생질(조카) 재윤
을미(1895)년 5월에 동민이 새우다.
동집강 박문상 열 남0성
감역 임필0 규00
통정대부 권선복이 백성과 어민의 이익을 증진 시키고 학업을 권장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행첨사이공중길00000(行僉使李公重吉00000)
행첨사이공중길00000(行僉使李公重吉00000)
비의 제원
크기 |
총높이 148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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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높이 96cm, |
너비 44cm, |
두께 13.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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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높이 52cm, |
너비 59.2cm, |
두께 17cm, |
비단은 내각이 모두 직각인 직사각형으로 비신의 홈까지 전면에 5개의 연꽃을 장식했다.
비신과 비수는 일체형으로 비수는 거미모양과 연잎모양을 조각했다.
원문
公字重吉鄕居昌人也 0丹稟烈撫恤軍民
00勇則大師而適値0至歲凶0屍0..........
해문
공의 자는 중길이고 거창 사람이다. 마음과 성품이 반듯하여 병졸과 백성을 돌보고 구휼했다.
00용감했으나 군사를 크게 일으켰다. 마침 흉년이 00에 닥쳐 시체가 00쌓였는데......
△ 행첨사장공문0선정비(行僉使張公文0善政碑)
행첨사장공문0선정비(行僉使張公文0善政碑)
비의 제원
크기 |
총높이 129.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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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높이 82cm, |
너비 43.5cm, |
두께 11.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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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높이 47.5cm, |
너비 47.5cm, |
두께 1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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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높이 21cm, |
너비 80.5cm, |
두께 49cm, |
|
귀부는 많이 닳았고 훼손되었으며 귀부의 머리에는 커다란 성혈이 1개 있다. |
건립시기는 [동치 13년 병신 유월(同治 十三年 丙申 六月)]이라 새겼지만 동치(同治) 13년은 고종 11년(高宗 11年)으로 1874인 갑술년(甲戌年)이다. 따라서 글을 새길 때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에는 송시나 찬문은 없다.
△ 전첨사김공우고선정비(前僉使金公友皐善政碑)
전첨사김공우고선정비(前僉使金公友皐善政碑)
비의 제원
크기 |
총높이 115.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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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높이 79cm, |
너비 44cm, |
두께 12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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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높이 27.5cm, |
너비 65cm, |
두께 17cm, |
건립 시기는 만력(萬曆) 17년(1589) 7월이다.
비신 전면에는 송시나 찬문은 없고 뒷면에는 다름 비가 새겨져 있다.
△ 가선대부행첨사김공춘복영세불망비(嘉善大夫行僉使金公春復永世不忘碑)
가선대부행첨사김공춘복영세불망비(嘉善大夫行僉使金公春復永世不忘碑)
비의 제원
크기 |
총높이 183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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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높이 130cm, |
너비 86cm, |
두께 19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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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첨석높이 34cm, |
너비 86cm, |
두께 5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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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 높이 19cm, |
너비 74cm, |
두께 123cm, |
원문
感祝君恩 恤愛民情 家財幾散 月廩盡傾
祛瘼積弊 蘇醒殘營 二載善績 千歲遺名
道光二十三年癸卯十月日 民人立
해문
원님의 은혜를 크게 느끼나니 백성들 심정을 아시고 구휼했네.
집안 재산이 거의 흩어졌는데 매달 월급을 모두 쏟아 구제 했지.
쌓인 폐단과 고질병을 없애 무너진 경영을 생생하게 되살렸네.
2해 동안 이룩한 선행이여 천년 세월동안 명성을 남기리라.
도광 23년(1843) 계묘년 10월 주민이 세우다.
△ 미조 무민사의 제례 준비공간과 내삼문의 모습
△ 미조 무민사 내삼문과 협문
△ 미조 무민사와 석인상이 있는 풍경
△ 미조 무민사 편액
武愍祠 무민사
庚子 季秋 경자년 계추절
完山 李基表 謹書 완산(전주) 이기표 삼가쓰다.
△ 무민사 석인상(武愍祠 石人像)
무민사 석인상(武愍祠 石人像)
무민사의 본당에는 최영장군의 영정이 있다고 하는데 보지는 못했다. 본당의 동쪽에는 ‘무민사 석인상(武愍祠 石人像)’이라 불리는 석상 1구가 서있다.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짚고 선 형상을 한 석인(石人)으로 가로 60㎝, 세로 84㎝, 높이 19㎝의 돌 제단 위에 높이 87㎝, 어깨 너비 37㎝의 크기이다. 민속적 가치가 높은 석상으로 문화재등록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남해군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무민사 본당 건물 동쪽에 있다. 앞에서 보면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집고 서 있는 형상이다. 조선 후기 불상, 장승, 석인상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민간 신앙으로 이러한 석상들이 만들어진다. 지금도 이석상은 주민들의 주된 기도처로 이용되고 있다.
△ 무민사 최고 윗쪽에 자리한 산신각
△ 무민사 산신각 내부에 모신 산신도
일반적으로 유교의 사당에는 산신당이 없다.유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성현들의 뜻을 쫓아 제례를 지내며 말씀을 배우는 곳이다. 이곳 남해 미조 무민사는 최영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유교의 공간이면서 산신각을 최고 윗쪽에 배치하여 기복신앙의 기도처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아마도 목숨을 걸고 험한 바다일을 해야 하는 어민들의 기복신앙이 생활 깊숙히 자리한 때문으로 보여진다.
△ 무민사의 뒤쪽에서
출처 및 참고
남해금석문총람-남해문화원(2014.2.11.)
남해군지 상권-남해군지편찬위원회(2010.2.25.)/씨티플랜
남해군지-남해군지편찬위원회(1994.7.31.)/남해문성인쇄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희학/다음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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