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 부울경 국사편찬 사료조사위원회 정기총회를 마치고 답사 장소를 김해 수로왕릉으로 잡았다. 차량 3대를 나누어 타고 김해 수로왕릉 앞에서 집결 후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수로왕릉을 둘러보았다. 수로왕릉의 첫 문은 외삼문 격인 숭화문(崇化門)으로 앞에는 하마비가 서있다. 숭화문을 들어서면 신도(神道)와 좌우의 통행 길이 있고 내삼문의 중간쯤에 홍살문이 서있다. 보통의 경우 홍살문은 외삼문 밖 대지의 경계지점에 세워 홍살문을 지나면 성역의 지역임을 표시하는데 수로왕릉에는 외삼문 내에 배치를 하였다.
이곳 수로왕릉(首露王陵)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사적 제73호
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
서기 42년 구지봉(龜旨峯)에서 탄생하여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馬羊虎石)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崇善殿)과 숭안전(崇安殿), 안향각(安香閣),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의 정문에는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문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와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首露王廟)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13녀(1580)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 능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수로왕릉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는 춘추(春秋)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숭선전 제례는 경남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삼문은 편액이 없고 수리를 한 후 단청을 아직 하지 않은 상태이다. 홍살문의 위치와 내삼문의 규모를 볼 때 이 문이 외삼문으로 보인다. 옛 사진을 보니 이 문이 가락루(駕洛樓)이다.
가락루(駕洛樓)을 지나니 왼쪽에는 3개의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서부터 『가락국 태조왕릉 중건신도비명(駕洛國 太祖王陵重建神道碑銘) 1885년에 창건한 가락국 태조왕릉 승선전 비에 기록되어 있는 가락국 역사를 1927년에 추려서 새겨 세웠다.
가락국 태조왕릉중수기적비(駕洛國 太祖王陵重修紀蹟碑)
가락국태조왕숭선전 납릉후릉중수비(駕洛國太祖王崇善殿 納陵后陵重修碑) 1878년(고종15년) 김수로왕을 모신 납릉과 허왕후를 모신 후릉과 그분들의 위패를 모신 승선전에 전호와 치제문을 내려 행사를 받들게 하였으며,196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왕릉과 왕후릉을 국가사적 제73호 제74호로 지정하였음을 1995년 4월에 세웠다.』
숭신각(崇神閣) 안에는 가락사와 승선전사가 기록된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각은 1885년(고종22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보수되었다.
시생대(豕牲臺)를 마주하고 납릉정문(納陵正門)인 내삼문이 위치한다. 시생대는 가락국 시조대왕과 왕비의 춘추대제 때 진설할 시생(돼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이 의례를 생성례(牲省禮)라 하는데 제례 하루 전인 음력 3월 14일과 9월 14일에 초헌관 주관 하에 제 집사들이 참여하여 진행된다.
駕洛太祖大王影堂記
猗我駕洛始祖大王 寔天縱之聖, 而與后妃許氏 配德匹美, 肇開五百年基業, 而肆後本支百世, 雲仍之森羅八域, 殆不億其麗矣. 惟慈納陵, 實國家萬代聖域之區, 而上下二千年間, 雖世變滄桑興廢相尋, 而陵廟苑林幸保無恙, 莫非列祖賢獻之誠, 而挽近自中央宗親會協議 政府擴張全域, 凡所以補修增築極加淨化者, 無非崇慕報遠之誠出萬萬, 而爲乎盛哉 顧聖影之未遑奉揭者, 蓋以事體之重難, 而有不可率易輕擧矣. 雖昔有二影之遺傳, 而于今觀之, 頗考據未精, 像儀有欠, 故屢與古究專門諸位爛商討議, 模像逼肖, 而晩此創建影堂於殿陵之南, 以奉揭者也. 曾聞唐之吳玄道現夢孔子, 而畵聖像, 至今宇內, 虔揭無貳辭, 是崇其先師之德, 而影以之傳重者也. 據古比今, 其度曷有而哉 藐與炳洙參在寢郞猥相聖域推進之役, 而竊不勝追遠曠感之懷, 茂望爲聖祖苗裔者, 以祖宗之心爲心, 惓惓協贊於崇慕之業 嗣守之策, 而勿替引之, 則此殿陵全域 與穹壤共存, 而聖祖遺化之蔭, 將萬世永賴, 敢不敬且朂哉 遂忘其僭妄 而謹爲之記.
駕洛紀元後 壹千九百五十二年 癸酉孟春 參奉 金炳洙 謹記.
가락태조대왕영당기 駕洛太祖大王影堂記
아! 우리 가락의 시조대왕은 하늘에서 내리신 성인으로 왕비 허씨와 더불어 덕과 미를 함께 갖추시고 5백년 왕업의 터전을 마련하셨다. 이후로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세를 이어 왔으니 전국 각처에 빽빽이 포열한 후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 납릉納陵은 실로 우리나라에서 만대를 이어갈 성역으로 지금까지 2천년간 비록 시대가 크게 바뀌면서 나라마다 흥함과 폐함이 있었으나 능묘陵廟와 원림苑林은 다행이 아무 탈없이 보존되어 왔으니 여러 선조들이 바친 정성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근자에 중앙종친회가 정부와 협의하여 능역을 확장 하였는데 대저 보수와 증축을 통해 능역을 더욱 정화淨化한 것은 선조를 추모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간절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한 일인가.
돌이켜보니 시조대왕의 영정을 미처 모시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일이 워낙 막중하여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예전부터 두 분의 영정이 전해온 것이 있으나 지금 살펴보면 고증이 정밀하지 못하고 그 모습과 의범儀範에도 흠이 있었다. 이에 누차에 걸쳐 여러 명의 전문가들과 고증하고 연구하며 충분히 토의한 끝에 실제에 매우 가까운 초상을 그리게 되었는 바 이제 늦게나마 전릉殿陵의 남쪽에 새로 영당影堂을 창건하여 모시게 된 것이다.돌이켜보니 시조대왕의 영정을 미처 모시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일이 워낙 막중하여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예전부터 두 분의 영정이 전해온 것이 있으나 지금 살펴보면 고증이 정밀하지 못하고 그 모습과 의범儀範에도 흠이 있었다. 이에 누차에 걸쳐 여러 명의 전문가들과 고증하고 연구하며 충분히 토의한 끝에 실제에 매우 가까운 초상을 그리게 되었는 바 이제 늦게나마 전릉殿陵의 남쪽에 새로 영당影堂을 창건하여 모시게 된 것이다.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당나라의 오현도吳玄道¹⁾가 꿈에 공자를 만나보고 성상聖像을 그렸는데 지금까지 천하의 사람들이 경건하게 게시하여 이설이 없다고 한다. 이는 선사先師의 덕을 숭모하여 영정으로써 후세에 귀중함을 전한 것이라 하겠으니 옛일에 의거하여 오늘 할 일의 모범을 삼는다면 그 법도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보잘 것 없는 내가 참봉으로 있으면서 외람되게도 성역화를 추진하는 일을 맡게 되었으니 조상을 추모하는 감회를 이겨낼 수 없다.
진실로 바라건대 성조聖朝의 후손된 자들은 조종朝宗의 마음을 각자의 마음으로 삼아 숭모崇慕 사업과 수호守護 사업에 더욱 열심히 협찬해야 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전릉의 전역은 천지와 함께 영원히 보존될 것이고 성조께서 끼친 음덕 또한 장차 자손만대에 길이 나타날 것이니 감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참람僭濫되고 망령妄靈됨을 잊고서 삼가 기록해 둔다.
가락기원 후 1952년²⁾ 계유 맹춘 참봉 김병수金炳洙 삼가 짓다.
【주석】
오현도吳玄道¹⁾ : 당나라 양적인陽翟人으로 자는 도자道子이다. 현종 대에 내교박사內敎博士를 지냈고, 불상과 산수화를 잘 그려 ‘화성畫聖’이라고 불렀다.
가락기원 후 1952년²⁾ :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서기 42년을 연대표시의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서기 1993년이 된다.
안향각은 향, 초 등을 봉안하는 곳이다.
崇安殿上樑文
伏以 崇善舊殿, 禮莫重於垂統, 最尊創業太祖, 肯構崇安儀多闕於八王, 慕切羹墻祖武. 竊惟,
道成德明, 神惠莊肅. 丕承璿源, 天命有祜. 寢殿未遑, 一사竝奉. 廟失規模, 香降祝孵. 行禮窘苦, 朝家之欠典. 來裔之久憮.
經季後孫, 至庶民章. 甫陳유于國立文化院. 내得認可, 而賜資金巨額. 誠無遠而不達원, 事待時而有補, 相址乎崇善殿之東爽塏同局, 不日成之而遽見眼前突兀, 苟完苟美, 扁揭爲崇安殿, 苾芬薦於春秋, 陟降精靈永安於是사, 億麗之裔, 惟久齋成未遑, 事係國營, 非私力可容, 又成功有時, 棟宇雖有, 新舊異, 文秩可<手=邑.古謨貽, 助擧脩樑, 聊棟短頌:
臾郞偉抛樑東, 朝朝旭日上蒼空. 洪休聖德均四海, 也識當年與民同.
臾郞偉抛樑西, 佛山崔嵬暮雲低. 舊都王陵相居遠, 龜旨峯下路不迷.
臾郞偉抛樑南, 大海茫茫與天齊. 狂濤惡浪誰能渡, 古訓丁寧不差之.
臾郞偉抛樑北, 衆星煌煌拱北斗. 祖靈垂蔭庇群孫, 其衆如斯豈異有.
臾郞偉抛樑上, 彛性人人天所황. 尊祖敬宗常倫火, 存心無愧俯而仰.
臾郞偉抛樑下, 餘韻長注天載下. 自邦重加崇報儀, 聞風誰不敢興省.
伏願上樑之後, 人神護而棟宇鞏固, 忠孝節義之風勿替, 福祿休祥之應, 遠及苗裔.
駕洛紀元壹千九百五十年 辛未 六月 坡平 尹鍾律 謹撰 崇安殿上樑文
伏以 崇善舊殿, 禮莫重於垂統, 最尊創業太祖, 肯構崇安儀多闕於八王, 慕切羹墻祖武. 竊惟,
道成德明, 神惠莊肅. 丕承璿源, 天命有祜. 寢殿未遑, 一榭竝奉. 廟失規模, 香降祝孵. 行禮窘苦, 朝家之欠典. 來裔之久憮.
經季後孫, 至庶民章甫 陳籲于國立文化院. 迺得認可, 而賜資金巨額. 誠無遠而不達, 事待時而有補, 相址乎崇善殿之東爽塏同局, 不日成之而遽見眼前突兀, 苟完苟美, 扁揭爲崇安殿, 苾芬薦於春秋, 陟降精靈永安於是祠, 億麗之裔, 惟久齋成未遑, 事係國營, 非私力可容, 又成功有時, 棟宇雖有, 新舊異, 文秩可<手=邑.古謨貽, 助擧脩樑, 聊棟短頌:
臾郞偉抛樑東, 朝朝旭日上蒼空. 洪休聖德均四海, 也識當年與民同.
臾郞偉抛樑西, 佛山崔嵬暮雲低. 舊都王陵相居遠, 龜旨峯下路不迷.
臾郞偉抛樑南, 大海茫茫與天齊. 狂濤惡浪誰能渡, 古訓丁寧不差之.
臾郞偉抛樑北, 衆星煌煌拱北斗. 祖靈垂蔭庇群孫, 其衆如斯豈異有.
臾郞偉抛樑上, 彛性人人天所貺. 尊祖敬宗常倫火, 存心無愧俯而仰.
臾郞偉抛樑下, 餘韻長注天載下. 自邦重加崇報儀, 聞風誰不敢興省.
伏願上樑之後, 人神護而棟宇鞏固, 忠孝節義之風勿替, 福祿休祥之應, 遠及苗裔.
駕洛紀元壹千九百五十年 辛未 六月 坡平 尹鍾律 謹撰
숭안전상량문 崇安殿上樑文
생각건대 예부터 있어온 숭선전崇善殿은 왕통을 드리운 창업태조創業太祖를 가장 높이 받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예법이 막중하다. 이제 숭안전을 짓노니 그간 여덟분의 왕께는 의례상에 다소 빠진 것들이 많았던 터라 조상의 옛자취를 생각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가만히 생각건대 2대 도왕道王, 3대 성왕成王 , 4대 덕왕德王, 5대 명왕明王, 6대 신왕神王, 7대 혜왕惠王, 8대 장왕莊王, 9대 숙왕肅王께서는 왕통의 계보를 이으셨으니 이는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침전을 미쳐 갖추지 못하여 한 곳에서 아울러 받들었으니 사당의 규모를 잃은 것이라 하겠도다. 향香을 내리고 축祝을 고하였지만 예禮를 행함에 군색함과 씁쓸함이 있었으니 나라에서는 전범典範을 완비하지 못했던 것이요, 후손들은 오랫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 후손들 뿐만 아니라 서민과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립문화원國立文化院에 진정서를 내어 마침내 인가를 얻고 거액의 자금을 받았으니 정성은 멀리까지라도 도달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일이란 때를 기다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로다. 숭선전의 동쪽에 터를 잡아 같은 형국으로 세웠는데 빠른 시일에 완성되어 눈 앞에 우뚝하게 모습을 드러내니 진실로 완전하고 아름답다. 이제 숭안전崇安殿이라 현판을 걸고 봄가을로 향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하늘을 오르내리시는 정령精靈께서는 이 사당에서 길이 편안하시리라.
수많은 자손들이 오래도록 정성을 쏟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사업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계로 사사로운 힘만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일의 성공은 때가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건물은 비록 새것과 옛것의 차이가 있지만 문질文秩은 예전에 만들어진 모범을 참작할 수 있다. 이제 들보를 올리는 것을 돕고자 짧은 노래를 지어 부른다.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올린다. 아침마다 찬란한 태양이 창공으로 떠오르네. 넓고도 아름다운 성덕聖德이 사해四海에 고루 퍼졌으니, 그때 임금님은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음을 알겠도다.
아랑위 들보를 서쪽으로 올린다. 불산佛山은 높이 솟았는데 저녁 구름이 낮게 깔렸네. 옛 도읍과 왕릉은 서로 거리가 가까우니 구지봉 아래의 길을 헤매지 않는도다.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올린다. 망망한 바다는 하늘과 함께 가지런하네. 성난 파도와 모진 풍랑을 뉘라서 견딜 수 있을까. 정녕 옛 교훈이 틀린 것이 없구나.
아랑위 들보를 북쪽으로 올린다. 수많은 별들이 환히 빛나며 북두성을 향하네. 조상의 영혼이 음덕을 드리워 자손들을 비호하니 그 무리 이와 같은데 어찌 차이가 있을손가.
아랑위 들보를 위쪽으로 올린다. 사람마다 뜻뜻한 성품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 조상을 우르러고 종친에게 공경함은 떳떳한 인륜이니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러움이 없게 그 마음을 보존하세.
아랑위 들보를 아래쪽으로 올린다. 여운餘韻이 길이 천년 뒤에까지 미치네. 나라에서 거듭 숭보崇報의 의례를 더해주니 그 소식을 듣는 사람 뉘라서 감히 반성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업드려 바라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사람과 신령이 보호하여 건물이 튼튼하게 하옵시고 충효와 절의의 기풍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복록福祿과 길상吉祥이 응하여 멀리 후손까지 미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락기원 1950년¹⁾ 신미년 6월 파평 윤종율尹鍾律 삼가 짓다.
【주석】
가락기원 1950년¹⁾ :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서기 42년을 기준으로 하여 1950년이 되는 해이니 1991년이 된다.
崇慕齋記
崇慕齋, 在金海駕洛王陵崇安殿之下, 而自二代王至于九代爲八王安靈齋宿之所也. 蓋陵前曾有崇善殿之崇齋, 是爲始祖王齋所也. 今新築崇安殿, 欲奉安于八王位牌, 則又不可無致誠之所, 故於是後孫合謀鳩財, 又據政府文化財保護之規, 而以六楹五架起焉, 此崇慕齋之所以成也. 工旣訖, 崇善殿參奉金炳洙收衆議, 徵文於根變余同鄕之人也. 累謁殿陵崇慕有素, 且託名爲榮, 豈敢辭於是役哉? 謹按駕洛國新羅幷鼎統治六伽倻, 歷年四百有餘, 而世遠跡泯. 當時禮樂文物, 今雖不歷考, 然在我東方氏族之繁, 未有如伽洛氏之盛, 則豈非其聖王之深仁厚德, 積於源者深, 而發於流者遠故也, 故駕洛氏之居, 彌滿域中, 而近世以來, 尤重於同源之義, 隨其所在, 無不以會宗親講花樹爲事, 是皆出於眞誠崇慕矣, 則況且本殿之崇慕齋者, 尤不可以不重也. 然則崇慕之道, 非獨在於春秋享祀, 其實則在於溯遠而會, 流親親而合族也. 苟能祖宗心視之,而千派萬流推之一源, 則固無親疏遠近之分也. 親親之道, 由此益廣, 而民德之厚, 豈不在此耶? 昔召穆公, 糾合宗族於西周, 後之論者, 謂宗法與治法相左右, 則今之合宗, 不但爲一姓之和, 實爲萬世輔治之一道也, 故自家而鄕, 而至於國者, 固其理也. 爲後昆後人者, 益思守善化俗之道, 欲光熙于帝王古都之遺風也, 則豈不在各自策勵, 以期至乎永世也耶! 壬申 中秋 全州 李根燮 謹記
숭모재를 기록하다(崇慕齋記)-해문(사마천사기 역사인문학/生生之心)
숭모재는 김해가락왕릉 숭안전 아래에 있다. 2대왕에서부터 9대 왕에 이르기까지 여덟 왕을 위해 제관이 영혼을 안정시키고 재계하며 밤을 지내는 장소이다. 대저 능 앞에는 일찍이 숭선전의 숭재가 있었는데 이는 시조왕을 모시는 집이었다.
이제 숭안전을 신축하고 팔왕 위패를 봉안코저 하니 또한 치성의 장소가 아닐 수 있겠는가. 고로 이 후손들이 함께 의논하여 재물을 거두어 모으고 또 정부문화재보호규정에 의거하여 육영오가(六楹五架)¹⁾를 일으켰다. 이것이 숭모재를 만든 이유이다.
공사를 마치고 숭선전 참봉 김병수가 중의를 받아 동향인인 근변(根變)이 나에게 글을 요청했다. 여러 번 전과 능을 뵙고 본디 숭모하였는데 또 영화를 위해 이름을 거는 것 같지만 어찌 감히 이 역할을 사양하겠는가.
삼가 살펴보면 가락국은 신라가 육가야를 병정통치하기까지 사백년이 넘는 역사이지만 그 자취를 알기엔 세월이 너무 멀다.
당시의 예악문물은 이제 비록 역고 할 수 없지만 내가 살펴볼 때 동방씨족의 번성은 가락씨족의 번성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그 성왕의 깊은 어짊과 후덕함이 아니겠는가. 원래의(성왕의) 깊음이 쌓여 또 크게 멀리 미쳤기(흘렀기) 때문이다.
가락국씨는 지역에 널리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근세 이래 동원지의(同源之義)²⁾가 더욱 중요하니 그 있는 곳에 따라 (따로따로) 종친들을 모아서 화수위사(花樹爲事)³⁾를 강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다 진실 되고 정성스러운 숭모의 출발이다. 그러니 본전의 숭모재는 더욱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즉 숭모의 도는 춘추향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친친하게 교류하고 씨족이 단합한데 있다. 만일 선조 종친의 마음을 보고 천파만류를 하나의 근원으로 헤아릴 수 있다면 진실로 친함과 성김, 멀고 가까움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친친의 도는 이 널리 이롭게 함으로 부터인데 민덕지후(民德之厚)⁴⁾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옛날에 소목공(召穆公)⁵⁾은 서주의 종족을 규합했는데 후세의 논자들은 종법과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서로 오른쪽과 왼쪽이라 이른다. 지금의 종가들의 단합은 같은 성끼리의 화합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만세를 위해 (나라의) 다스림을 돕는 한 가지 방법이다. 집안과 향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그 이치이다.
후손들을 위해 더 생각을 하면 선을 지키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도인데, 제왕고도의 유풍을 빛내고자 하면 어찌 각자 채찍질하고 독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약으로써 영세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임신년(1992) 추석에 전주 이근변 삼가 쓰다.
【주석】
육영오가(六楹五架)¹⁾ : 직역하면 '여섯기둥과 다섯 시렁'인데 건물을 뜻하는 관용어라 생각함.
동원지의(同源之義)²⁾ : 같은 씨족끼리 화합하는 것의 義
화수위사(花樹爲事)³⁾ : 종친의 일
민덕지후(民德之厚)⁴⁾ : 백성의 덕이 후함.
소목공(召穆公)⁵⁾ : 서주시기 폭군인 려왕을 몰아내고 공화시대를 여는데 기여한 사람.
천외사양대원범(天外斜陽帶遠颿) 먼 하늘에 기우는 해가 멀리(있어 보이지 않았던) 돛단배를 드러내고
계전쇄월포화영(階前碎月鋪花影) 계단 앞에는 부서진 달이 꽃그림자를 펼친다.
춘추상생덕흥례(春秋相生德興禮) 봄과 가을은 서로 도와 덕을 낳고 예를 일으키고
천은무음성정필(天恩無音聖靜畢) 하늘의 은혜는 소리없이 (無音 내 은혜다 으스댐이 없이) 성스럽고 고요하게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
쾌일명창한시묵(快日明窓閒試墨) 맑은 날 밝은 창에 한가롭게 먹을 시험하고
한천고정자전다(寒泉古鼎自煎茶) 차가운 샘물 옛 솥에 스스로 차를 끓인다.
화풍감우법륜전(和風甘雨法輪轉)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내려 진리의 바퀴 굴러 가리.
출처 및 참조
다음카페 양천허씨고성참의공종중-崇善殿誌 編纂內容 일부(본인이 편년체로 작성중임)/이회서당(以會書堂)
수로왕릉(首露王陵) 안내판
숭선전지-숭선전/강종훈 번역(1999.1.25)
'역사의 기록 > 누각.정자.재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원 북면 감계리 청송심씨 감의재 鑑義齋 (0) | 2019.02.02 |
---|---|
창원 합성동 순흥안씨 영모재 永慕齋 (0) | 2019.01.31 |
남해 무민사는 최영장군을 모신 곳 (0) | 2019.01.13 |
거창 심소정을 빛나게 하는 소심루 小心樓 (0) | 2018.12.15 |
윤자선이 노닐던 거창 심소정 心蘇亭 (0) | 2018.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