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 합성동 순흥안씨 영모재 永慕齋

천부인권 2019. 1. 31. 19:09



2015.8.24. 창원 제2금강산 입구 삼천동 각자 앞 풍경


옛 합포성이 치소(治所)였을 때 창원향교가 위치한 곳이 바로 제2금강산 입구에 있는 순흥안씨 영모재 앞 삼청동(三川洞) 각자가 위치한 일대였다고 해서 찾아보았다. 회원구 합성동 840번지는 영모재가 위치하고 그 앞 숲에는 문성공회헌안자합포유적비(文成公晦軒安子合浦遺蹟碑)와 문순공죽실안선생합포유적비(文順公竹室安先生合浦遺蹟碑)가 나란히 서있다. 영모재는 출입문이 잠겨있어 내부는 구경을 못하고 먼 발치에서 사진 한 장만 남기고 돌아 왔다. 그러나 영모재기와 문성공 안유의 비문에서 우리 지역의 역사를 돌이켜 볼만한 내용이 있어 기록으로 남겨 본다.




문성공회헌안자합포유적비와 문순공죽실안선생합포유적비


文成公晦軒安子合浦遺蹟碑
恭惟我文成公晦軒安先生 倡明聖學觗排異端而大洗三韓之陋 以丕承洛閩之統 卓然爲吾方聖學之宗 是以 王家褒崇之 士林尊奉之 旣從祀聖廡矣 繼而順興之紹修院 長湍之臨江院 谷城之道東廟 松京之寒泉院 晋州之道統祠 次第建設 俎豆以腏享之 於乎其盛矣哉 噫 中朝陸世儀之言曰 晦軒先生 於海東 海東 箕子故封 禮樂之風 來則久矣又曰 儀亦自今 知溓洛之道 遠而東 東而大 晦菴後 復有晦軒也 觀此 可以知先生之道之有所自矣 先生 在忠烈王元年乙亥 尙州妖巫之變人民震懼 不安其職 守宰亦惑怯 不得其任之際 先生特知尙州 至境妖氣根絶 政淸民安朝廷百僚 東土人民 敬畏其正義大道 時南邊騷亂外冠侵境 軍民大亂流離 王深憂之 先生 以閫鉞 移鎭合浦 撫恤未幾州郡以寧 民蘚而海晏 王褒徵之 爲殿中侍御史 國子司業 後二十年甲午 亦以邊擾 再鎭合浦 居任三年 政淸民晏 南海沿岸 變爲堯舜之世遺惠永存 至今六百六十餘年之久 而黃童白鬚尙指點某城某邱 爲安先生舊鎭之址 而尙未有表揭 肅敬觀瞻視古人表厥坊里之意 實有所欠與也 再昨丁酉歲 先生之後孫性鎬明燮 政烈敎民周鎬等 修大同譜于馬山別館 地卽先生莅任之合浦也 困合謀刻石 將堅于舊址 遺興鎬甫 北走六百里 責銘詞於相圭 相圭窃惟 東土之尊信聖學 知仁義道德之爲當務而以小中華名於天下者 實先生啓開之功也 則是役也宜士林之所公共協力 而自本孫倡之 忝在士類之列者 不敢以癃弊辭 敬爲之銘曰 噫嘻羅麗 異說多門 淪佛染老 似是非眞 天相吾道 安子誕生 尊孔慕朱 如失注正 摹眞印經 進謁退讀 造次仁義 動止禮樂 羣邪闢廓 瑞日麗天 稼益圃牧 浚啓淵源 用夏變夷 繄誰之功 自麗及鮮 寵褒冞隆 隮陞聖廡 賜額儒院 興湍谷松 墓祠煒煥 維玆合浦 先生伏鉞 遺址宛在 芬芳未歇 古老相傳 婦孺頌德 矧爾仁孫 追慕尤篤 爰斲雲根 用表遺坊 龜龍蜿蜿 海山增光 馬山嵂嵂 馬海洋洋 先生之風 興之俱長
權相圭 撰


문성공회헌안자합포유적비-해문
생각건대 우리 문성공 회헌 안선생 성리학을 창도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삼한의 고루한 것을 크게 씻고 정주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우뚝이 우리 동방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정에서 그를 포상하여 숭배하고 사림에서는 그를 존중하여 받들어 이미 향교에서 제사를 지내고 계승하여 순흥에 소수원, 장단에 임강원, 곡성에 도동묘, 송경에 한천원, 진주에 도통사가 차례로 건설되었고 제사를 드려 배향하니 그 얼마나 성대한가. 아! 중국의 육세의(陸世儀)가 말하기를 “회헌선생은 해동에 이름이 났다. 해동은 기자의 옛 봉토이니 예악의 풍조가 전해진지 오래이다.” 또 말하기를 “내 이제야 염락(溓洛)의 풍조가 멀리 동으로 갔고 동방에서 큰 인물은 회암(晦菴) 뒤에 다시 회헌(晦軒)이 있다.” 이것을 보면 선생의 도는 스스로 하는 바가 있었다.
선생 충열왕(忠烈王) 원년 을해(乙亥:1275)에 상주에 요사스런 괴변이 일어나 백성들이 떨고 두려워하며 그 직업을 불안해하였고 그 수령도 또한 현혹되어 겁을 먹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선생이 특히 상주를 잘 알아 그 경계에 이르러 요상한 기운의 근본을 끊어버리고 정치가 맑고 정치가 안정되니 조정의 모든 관료와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그 정의와 큰 도를 공경하고 놀라워하였다. 이 때 남쪽지방이 소란하고 왜구들이 침범하여 군사들과 백성들이 크게 혼란스러워 흩어지니 왕이 매우 걱정하였다. 선생이 군대를 합포(合浦)로 옮겨 백성들을 진휼한지 얼마지 않아 주와 군이 평안해지고 백성이 소생하고 바다는 안정되니 왕이 포상하고 그것을 징험하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삼았다. 그 뒤 20년 갑오에 또 다시 변방이 소란스러워 합포에 다시 진을 치고 3년을 지냈더니 정치가 맑고 백성들이 안정되니 남해 연안이 변하여 요순(堯舜)시절과 같이 되어 남겨진 혜택이 영원히 존재하여 지금까지 660여년이나 되었다. 어린 아이나 백발노인들도 저 성도 저 구릉을 가리키며 안선생이 옛날 진을 펼쳤던 곳이라 하였는데 오히려 표시가 없으니 엄숙히 공경하고 우러러 옛 사람 들이 그 마을에 표시를 한 뜻을 보면 실로 그 모범을 흠모한 바가 있다.
재작년 정유(丁酉)에 선생의 후손 성호(性鎬) 명섭(明燮) 정렬(政烈) 교민(敎民) 주호(周鎬) 등이 마산 별관에서 대동보를 수찬하니 그곳이 바로 선생께서 부임했던 합포이다. 그러므로 돌에 글을 새겨 옛 터에 세우기를 의논하고 흥호(興鎬) 등을 북으로 600리 길을 보내어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나라가 성리학을 존숭하여 믿어 인의와 도덕이 당연한 것임을 알아 천하에 소중화(小中華)로 이름이 난 것은 실로 선생께서 열어놓은 공로 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사림이 함께 협력하여 본손(本孫)에서부터 사림의 반열에 드는 사람들은 감히 사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명하였다.
아아! 신라와 고려에 이단의 말과 문파들이 많아 부처에 빠지고 노자에 물들어 유사하기는 하지만 참되지는 않았다. 하늘이 우리 유학을 살피시어 안선생을 내시어 공자를 존중하고 주자를 추모하여 화살이 바른대로 가듯 진인경(眞印經)을 본받아 나아가 알현하고 물러나 책 읽으며 어느새 인의(仁義)를 행하고 예악으로 행동하고 여러 사악한 것을 막고 상서로운 날들이 아름답게 열렸네. 가정(稼庭)과 포은(圃隱) 목은(牧隱)이 나서 그 연원을 밝게 펴고 하(夏)나라의 법을 쓰고 동이의 법을 바꾸니 아! 누구의 공이 이리 곱고 아름다운가. 나라의 충애와 포상이 융성하여 향교의 대성전에 올랐고 유교의 서원에 편액을 내려 순흥 장단 곡성 송경에 그 묘당이 찬란하다. 오직 이곳 합포는 선생이 진을 설치하였던 곳으로 그 남겨진 터가 완연하고 그 끼친 향기 그대로 남아 노인들이 예부터 서로 전하고 부녀자와 아이들도 칭송하는데 하물며 그 어진 자손들이야 추모하는 것이 더욱 더하겠지 이에 큰 돌을 깍아 그 옛 터를 표시하려니 거북 받침 용머리 뚜렷하고 산하가 빛을 발하고 마산이 우뚝 솟았으니 선생의 풍정이 비석과 같이 오래 가리라.
권상규(權相圭)¹⁾ 쓰다.
 
【주석】
권상규(權相圭)¹⁾ : 조선 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이자 의병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삼(致三), 호는 채산(蔡山)·인암(忍庵). 외할아버지는 한산(韓山) 이문직(李文稷)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권상규는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가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문좌(文佐) 김창숙(金昌淑) 등과 교류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동서양 역사 서적을 구해 읽으며 당시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였다.
『인암집(忍庵集)』이 전한다. 문집 중에는 곽종석과 김창숙에게 보낸 편지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안중근(安重根)의 전기문도 실려 있다. 권중환(權中煥)이 찬술한 권상규의 유사(遺事)가 전한다.




첨망대(瞻望臺)


瞻望臺記
檜山之西玉女峰下 有一古城焉 城之內 曰內廂里 土肥而泉甘 實富媼之奧區也 昔我先祖西塢公 愛山水之佳 始奠鼎于此 子孫世居于玆三百年矣 文物之盛 事功之大 繩繩不絶 余嘗過此地 愀然如復襲遺芬 至于近間 寥寥無聞 噫 風潮震盪 倫綱不振而然也 幸有再從姪敎民 述家風有聲稱 歲壬辰春 築一臺于城之北 高出數仞 上可坐數十人 立石刻之曰 瞻望臺 其義盖出於屺岵兮兮之詩也 累世先塋 俱在於密邇之地 一登臺而回首 則可以展省掃之誠矣 日敎民來請臺記 余聞而嘉之曰 昔甄氏之思亭 名於千載者 非有於構制之傑廣也 而其孝思之見 重於人者也 今斯臺 臨乎屋後 縱未得煙雲之霽 風月之閒 登此而望彼衣舃之藏 杖屨之所 在乎衽席之前 而屢世之嘉猷懿範 暸然乎心目之間矣 以是而反飭于身 兢兢業業 夙夜未懈 則不難爲孝子慈孫 且於來後 天將錫類 吾家之聲 長與此臺共存 甄氏之美 豈專於古也哉 是爲記
安庚錫


첨망대기(瞻望臺記)    
회산(檜山)의 서쪽 옥녀봉(玉女峰) 아래에 오래된 성(城)이 하나 있다. 성의 안쪽은 내상리(內廂里)이다. 흙이 비옥하고 샘물이 달아 실로 넉넉하고 복된 땅이라 할 것이다. 옛날 나의 선조이신 서오공(西塢公)께서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시어 처음 이곳에 옮겨와 제사를 모신 후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 산 것이 삼백여년이 되었다. 문물이 풍성하고 이루어낸 사업의 장대함이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이 땅을 지날 때마다 선조께서 남기신 향기를 맡는 것 같아 몸이 오싹하였으나 근래에 이르러 쓸쓸하게 되어 아무런 소문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아 세상의 풍파가 질탕하고 윤리와 기강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인가. 다행이 재종 조카인 교민(敎民)이 가풍을 잘 이어 계승하니 사람들의 칭송이 있었다. 임진년 봄에 성의 북쪽에 누대를 하나 세우니 높이가 몇 길 되고 위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앉을 만하였다. 돌을 세우고 첨망대(瞻望臺)라고 새겼다. 그 뜻은 대개 시경(詩經)의 척호지심(陟護之心)을 노래한 데에서 가져온 것이다.¹⁾
 여러 대의 선영(先塋)이 모두 매우 가까운 곳에 있으니 대에 올라서 머리를 돌려보면 정녕 성묘를 하는 정성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는 교민(敎民)이 와서는 첨망대의 기문을 청하므로 내가 그 사정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서 말하였다. 옛날 진씨(甄氏)의 사정(思亭)이 천년토록 그 이름을 전하는 것은 집의 규모가 크고 넓어서가 아니라 그 효성스러운 마음을 드러냄이 다른 사람들 보다 귀중하기 때문인 것이다.²⁾
 지금 이 대는 집의 뒤에 위치하므로 비록 아름다운 산빛과 경치, 음풍농월의 한가로움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이 대에 올라 저 곳의 무덤과 생활하시던 자리를 바라보면 기거하는 집 바로 앞에 있으니 여러 대의 아름다운 모범이 될 것이니 눈과 마음에 명료할 것이다. 이것으로 스스로에게 신칙하여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행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면 효성스런 아들과 자애로운 손자가 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후대에 이르러 하늘이 장차 큰 복을 내리셔서 우리 가문의 명성이 길이 이 누대와 같이 영원할 것이다. 여양 진씨의 아름다운 덕행이 어찌 옛날에만 있는 일이겠는가.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안경석(安庚錫)


【주석】
¹⁾ 『시경』 <위풍 제4편> 척호3장(陟岵三章)
陟彼岵兮하야 瞻望父兮호라 父曰嗟予子行役하야 夙夜無已로다 上愼旃哉어다 猶來無止니라
陟彼屺兮하야 瞻望母兮호라 母曰嗟予季行役하야 夙夜無寐로다 上愼旃哉어다 猶來無棄니라
²⁾ 진사도의 사정기(思亭記)





永慕齋記
安順興氏也 順興有永慕庵齋以名永慕志其本也 檜山在山海交其勝甲南方齋在治西十里爲檜之勝安禹錫之所築也 長嶝從西北 攤而屛障衍而爲三川之洞安氏之先墓也 直其南舊有墓閣手植松杉等 一區邱壑皆安氏有也 後承不競齋遂廢不能保有其所有不數世而邱壑林木還齋復禹錫之誠乎其爲先也 齋四架曰 景紹東室曰 念脩西室裏堂曰 如在是皆志其慕先之意而總之曰 永慕齋也 噫祖先種德於前必有賢子孫成其美此天也 苟使安氏無美於前禹錫雖欲盡其誠得乎 昔考亭陳氏有離榭而中更廢壞後乃作新朱夫子相其役而贊其先德之美安氏之廢興今赤類是也 余往年南遊至是齋山川明秀棟宇宏敞古人之流風餘韻怳然如在林木之間窃歎其誠力所及亦將 未艾於其後也使其後人忽 先人之典型而平泉花石歸於他人則安氏之大其興又可以執左契而待之是爲記以諗之著雍敦 秀葽蓈
仁州 張錫英記


영모재기
순흥 안씨의 순흥에는 영모암이라는 것이 있다. 재실의 이름을 영모라 한 것은 그 근본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회산은 산과 바다가 모두 아름다운 갑남방 쪽에 있는데 재실은 치(治 : 창원부)에서 서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그곳은 회산의 뛰어난 곳으로 안우석(安禹錫)이 주동하여 지은 것이다.
장등은 서북쪽으로 펼쳐져 있고 벽들이 둘러쳐 개천 3개가 흐르는 마을 이루었는데 이곳이 안씨의 조상이 살던 터이다. 곧바로 남쪽으로 가면 오래 된 묘각이 있고 손수 심은 소나무, 삼나무 등이 있는 골짜기가 있으니 안씨의 소유이다. 후세에 재실을 돌보지 않아 그 터를 보존할 수 없었는데 몇 세대 후에 언덕과 골짜기 그리고 나무들이 재실의 소유로 돌아가게 된 것은 우석의 그 조상에 대한 정성이었다.
재실은 4칸으로 되어 있는데 동쪽에 경소, 서쪽에 염수 그리고 내당은 여재라 한다. 그리고 그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그것을 묶어 영모재라 한다.
아! 조상들이 앞 세상에서 덕을 심으면 반드시 자손중에 어진 사람이 있어 그 미덕을 완성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늘의 도리이다. 진실로 이전의 안씨 가문에 미덕이 없었다면 우석이 비록 그 정성을 다하고자 했다 해도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예전에 고정 진씨가 정자를 옮겼다가 그 후에 그것을 무너뜨렸고 나중에 새로 지어 그 조상들의 미덕을 찬미한 적이 있는데 우리 안씨 가문에서 재실을 헐었다가 새로 지은 것이 마치 이와 같다.
내가 예전에 남쪽으로 놀러 다니다가 이 재실에 이르렀는데 산천이 빼어나고 건물이 우람하여 옛 사람의 풍류와 운치가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조상이 심은) 수풀을 보면 그 정성이 미치는 바에 감탄하면서 그 후손으로서 싹조차 틔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만약 그 후인들이 선조들의 모범을 잊지 않고 평천·화석이 다른 이에게 가지 않도록 한다면 안씨 가문에 크게 흥성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에 기록하여 추모를 하며 조상을 기리는 노래를 지어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한다.
인주 장석영(仁州 張錫英)¹⁾ 쓰다.


【주석】
인주 장석영(仁州 張錫英)¹⁾ : 장석영(1851~1929)의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호는 회당(晦堂). 경상북도 칠곡 출신.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며, 또 고향의 만세운동을 펴기 위하여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 유림과 접촉하여 만세일정을 계획하였다.
이 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측의 만세운동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과 만나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 4월 2일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회당집』·『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이 있다.





출처 및 참고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대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석영
디지털안동문화대전-권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