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동읍 노연리 연안 김성연 묘

천부인권 2019. 3. 20. 08:28

 

 

 

2019.3.12 동읍 노연리 절충장군 연안 김성연 묘

 

동읍 노연리 노옥마을 뒤 의창구 동읍 노연리 473번지의 구릉에는 조선 후기 창원 출신의 무신(武臣)을 지낸 김성연(金性淵)의 묘가 있다. 본관은 연안(延安). 김경사(金敬思)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김용(金容)이고, 어머니는 정지겸(鄭志謙)의 딸로서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김성연은 1800년(순조 1) 무과에 급제하여 어영총관을 지냈고, 1821년 중시에 급제하여 절충장군이 되었다. 이 후 오위경력(五衛經歷)을 거쳐 1828년 경상도순중군(慶尙道巡中軍)이 되었으며 이어 흥해군수로 제수되었으나 교지를 받기 수일 전에 죽었다.

 

 

 

 

절충장군행경상순중군의당연안김공성연지묘(折衝將軍行慶尙巡中軍毅堂延安金公性淵之墓)

 

 

 

김성연의 묘지 전경

 

 

 

그의 묘지에 세운 비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절충장군행경상순중군의당연안김공성연지묘(折衝將軍行慶尙巡中軍毅堂延安金公性淵之墓)


延安金公成泳이 諸族과 協議하여 그 五代祖中軍公의 墓碑를 고쳐 새로 세울 새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累世하여 其子柱錫(기자주석)이 先考의 遺志를 이어받아 墓碣을 받기 위하여 그 族兄 柱瓘(주관)이 記錄한 中軍公의 行狀으로 不侫에게 글을 要請하므로 累次謝讓하였으나 柱錫君의 誠孝의 뜻을 마침내 難塞(난새)이었다. 行狀을 參考하건대 公의 이름은 性淵이요 字는 景顔이며 호는 毅堂(의당)이니 高麗明宗朝에 國子監四門博士暹漢이 始祖가 된다. 二世俊麟은 大將軍이요 三世景成은 版圖判書요 四世祐는 門下贊成事監春秋館事이며 五世先厚는 密直提學이요 六世濤은 號蘿葍山人이니 密直提學이며 七世自知는 號逸溪이니 刑曹判書요 謚號은 文靖이다. 八世脩는 黃海道觀察使로서 崇祿大夫左贊成에 贈職되었고 九世元臣은 司憲府執義로서 嘉善秩에 陞資되어 安東府使에 除授되었고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贈職되었으며 十世勉은 南原府使로서 領議政에 贈職되었고 什一世謹思는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贈職되었으며 그 아우 敬思는 廣州牧使로서 左議政에 贈職되었다. 이때에 堂內의 至親으로서 相臣에 오른 이가 세분이요. 文衡을 잡은 이가 두 분이었는데 牧使公께서는 家門의 盛滿함을 警戒하여 벼슬을 버리고 南方으로 내려가 昌原의 山南에 居地를 占據하였다. 十一世沃은 羅州牧使요  十二世友仁은 丹城縣臨이며 十四世鐸은 司馬進士이니 壬辰倭亂을 만나 湖南의 古阜로 옮겼고 十五世藎耉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十六世㙱는 需士이니 곧 公의 五代祖가 된다. 高祖地文과 曾祖憼과 祖에 光晁은 代代로 儒學에 從事하였고 考에 鎔은 號竹隱이니 判官을 致仕하고 昌原 竹田에 居地를 選定하였다. 妣에 東萊鄭氏는 志謙의 따님이니 英祖四十九年三月三日 竹田의 世第에서 公을 延生하였다. 公이 어려서부터 才質이 비범하여 正祖二十四年 庚申에 宦路에 나아가 御營廳을거쳐 五衛副摠管을 歷任하였고 純祖辛巳에 折衝將軍에 陞差하여 五衛府經歷에 任命되었으며 同二十八年 戊子에 行慶尙道 巡營中軍에 除授 되었다가 現職에서 同年七月五日 世上을 떠났으니 國家의 損失이며 家運의 不幸이라 享年은 五十六이요 十月日에 蘆村 後山壬坐原에 安葬하였다. 나라에서는 國風을 시켜 名山大地에 幽宅을 定하였고 公의 他系를 슬퍼하는 弔問客이 馬山의 檜原에서 五十餘里되는 葬地까지 줄을이어人山人海를 이루었고 挽章이 하늘을 가렸다. 配淑夫人廣州李氏는 周運의 따님이니 墓所는 義昌君 北面 上川 鴨谷 戊座原에 있다. 三男을 두었으니 通德郞漢秀와 芝秀와 英秀요 孫은 思奭과 思洪과 思孔 思孟 思鍵과 思中이며 會孫과 玄孫도 번성하였다. 아아! 공이 世上을 뜬 지 於焉間 二百餘年이 되었으니 옛 墓碑에는 다만 職銜만 判讀할 수 있으니 公의 失策을 考徵하는데 不足하다
그러나 여러 後孫들이 先代의 法規를 지켜 古家의 本色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鄕隣의 模範이 되어 公의 遺風餘韻 아직도 남아있었으니 어찌 欽義할 일이 아니겠는가. 文性은 公의 胄孫이다. 이에 그 世德의 아름다움을 敍述했으니 銘은 아래와 같다. 延安之氏는 나라의 世族이니 名公과 碩德이 史策에 끊이지 않았도다. 先祖敬思께서 門閥의 赫赫함을 警戒하셨네 이에 벼슬을 버리고 嶠南으로 落鄕하여 昌原山南에 居地를 定했어라 代代로 遺訓을 지켜 或은 需士되고 或은 宦路에 從事했도다. 公이 그 業績을 이어 벼슬이 中軍에 이르렀네. 하늘이 長壽를 주지 않았으니 志士들은 슬픔에 잠겼노라. 오랜 歲月이 지나가니 碑石의 글자가 이끼에 浸蝕되어 字劃을 알아 볼 수 없으므로 어진 後孫 있었으니 銘을 새겨 碑石 세웠도다. 蘆村의 墓所에 빛이 났으니 千秋萬代에 考徵이 되리로다.
西紀一九八七年丁卯四月立夏節에 載寧 李仁燮 謹撰하고 六世孫 柱錫이 謹書하다.
西紀一九八八戊辰三月 淸明節
七世胄孫 文性
六世孫   柱錫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