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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하천리 애국지사 김진훈 묘

천부인권 2019. 4. 3. 06:50



2019.4.1 북면 하천리 애국지사 김진훈 묘 모습


꽃이 핀 듯 아름다운 나이 22세 청춘이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받치다 왜구(倭寇)의 모진 고문으로 중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다 보석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광복의 그날을 2달 앞둔 1945년 6월 23일에 결국 순국했다. 그의 이름은 김진훈(金鎭焄)이다.
그의 묘소는 ‘북면 하천리 331번지 대촌마을 뒷산 끝자락에 위치하며 현대식 민묘로 잘 정돈된 형태이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33m이며 「위도 35°22′06″N 경도 128°36′24″E」이다. 묘의 둘레에 식재한 나무가 가이즈카향나무라 의미가 떨어진다. 앞으로는 키 작은 붉은 꽃이 피는 명자나무를 심어 담장으로 삼고 그의 정신이 돋보일 수 있도록 단장하는 것도 생각해 봄직한 일이다.
애국지사 김진훈은 1924년 8월 9일 북면 하천리에서 김녕김씨 김인규(金璘圭)의 차남으로 탄생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창원에서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부산동래고보(釜山東萊高普)에 입학하여 1941년 독서회 회원 김일규의 집에서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을 만들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44년 7월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4월의 벚꽃이 그의 청춘을 대변하는 듯


그의 묘 앞 좌우에는 망주석이 서있고 묘비는 묘의 위치와 거의 나란히 우측에는 화강암질의 작은 비갈을 세워 『故解放鬪士金鎭焄之墓(고해방투사김진훈지묘)』라 음각으로 새긴 글이 있고, 좌측의 비 전면에는 『愛國志士金鎭焄之墓(애국지사김진훈지묘)』라 새기고 뒷면에는 1985년 11월 24일에 문학박사 손팔주가 찬양하고, 영산후인 신용옥이 글씨를 썼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진훈 지사의 묘소에서 바라 본 풍경


애국지사김진훈지묘(愛國志士金鎭焄之墓)
여기 잠드신 분은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鬪爭)하다가 스물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국(殉國)한 독립유공자 김진훈(金鎭焄) 지사(志士)이시다. 志士는 서기 1924년 8월 9일 김녕김공인규(金寧金公璘圭)씨의 차남으로 의창군 북면 하천리(義昌郡 北面 下川里)에서 탄생(誕生)하였다. 창원에서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부산동래고보(釜山東萊高普)에 입학하여 독서회를 조직하고 민족자립정신(民族自立精神)을 배양(培養)하여 마침내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졸업한 뒤 동지들과 비밀리(秘密裡)에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사(結社)하고 동래장산(東萊萇山)에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신명을 받치기로 하늘에 맹서(盟誓)하였다. 志士는 일본의 중요한 군사시설을 폭파(爆破)하기로 결의하고 동경(東京)의 청산학원(靑山學院)에 입학하여 군사시설을 탐지(探知)하고 국내와 연락하여 거사할 기회를 엿보던 중 1944년 8월에 부산의 동지들이 피검(被撿)되자 志士도 체포(逮捕)되어 부산형무소에 투옥(投獄)되었다.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拷問)으로 중병(重病)을 얻어 사경(死境)에 이르자 보석(保釋)되었으나 끝내 회복(恢復)하지 못하고 고대(苦待)하던 조국광복을 2달 앞둔 1945년 6월 23일 순국하였다. 志士의 공적이 알려지자 국가로부터 1982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추서(追敍)되었다.
아! 장하도다. 대한(大韓)의 남아(男兒)로 이 땅에 태어나서 일제(日帝)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하다가 목숨을 바쳤으니 그 대의(大義)와 애국충절(愛國忠節)은 영구히 빛날 것이다. 이에 지사를 추모하는  후배(後輩)들이 지사의 애국정신을 이 비석에 새겨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文學博士 孫八洲 謹撰(문학박사 손팔주 근찬)
靈山後人 辛容玉 謹書(영산후인 신용옥 근서)
一九八五年 十一月二十四日(1985년 11월 24일)
愛國志士墓域淨化義昌郡推進委員會 建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