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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외감리 미수허선생유지비

천부인권 2019. 4. 9. 06:08



2019.4.8. 북면 외감리 미수 허목의 유적비가 있는 풍경


천주산 진달래 축제는 끝났어도 천주산(天柱山 : 638.8m) 정상부에 무리지어 핀 진달래꽃군락은 지금이 절정이라 많은 등산객들이 줄을 지어 산행을 하고 있다. 벚꽃은 끝물이라 꽃잎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고 미수허선생(眉叟許先生) 노닐던 달천동(達川洞)의 땅은 온통 벚꽃으로 덮였다.


『북면 외감리 미수허선생유지비(北面 外甘里 眉叟許先生遺址碑)』가 위치한 곳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천주산의 북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신천천이 흘러 급격한 계곡을 이루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계곡을 일러 달천동(達川洞)이라 하는데, 달천이란 이름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허목(許穆 : 1595~1682)이 기거하여 노닐면서 바위에 달천동(達川洞)이라는 해서체의 각자를 새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후 미수 허목선생의 제자들이 달천계(達川契)를 만들고 그의 학덕을 기려, 이곳에 「文政公眉叟許先生遺址(문정공미수허선생유지)」라는 비를 세웠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폭 50cm, 두께 19cm이며, 정면에 「文政公眉叟許先生遺址(문정공미수허선생유지)라 새겼고 뒷면에는 「戊寅 十月 日 達川契(무인 십월 일 달천계)」라 새겼다. 기록으로 보아 1938년에 세운 비이다. 그 옛 비 앞에는 2008년에 오석으로 만든 「文政公眉叟許先生遺蹟碑(문정공미수허선생유적비)」를 다시 세웠는데 경상대학교 교수 김해 허권수(許捲洙)가 비문의 내용을 국한문 혼용체로 지었다.
“미수 허목이 노닐던 달천동과 달천구천 그리고 달천정”




2019.4.8. 북면 외감리 미수 허목의 유적비 뒷면 모습



2019.4.8. 북면 외감리 미수 허목의 유적비 측면 모습


眉叟許先生神道碑銘 幷序
蓋聞尙論國朝賢公卿。其出典入謨。非先王不陳。惟曰許先生。不阿權柄。守正而不撓。惟曰許先生。見可而進。知幾便退。本末有章。惟曰許先生。嘐嘐古昔。該貫理亂。躳自治而誘後學。亦惟曰許先生。先生乃衰世之完名也。當時瀷先大夫同升諸公。聚精以左右之。主張淸議。道雖詘而士心益附矣。今先生之圽六十有餘年。滔波劫爐之餘。光景剝換。猶使後生少年。翹首而緬懷風彩。非傑然君子不能也。先生五世孫徵士砥來託不朽之銘。瀷惟懼未堪執役。義有不得辭也。先生陽川世家。贊成磁之曾孫。祖別提橿。考縣監喬。皆以公貴追恩。贈官如例。妣羅州林氏正郞悌之女。先生以我昭敬王二十八年乙未十二月己酉生。有文在手曰文。諱穆字文父。又字和父。號眉叟。及就外傅讀書。不百遍不成誦。甫一卷畢。文義無滯。樂聞前言往行。已有志聖賢之學。旣長往師寒岡鄭先生。遍遊名山川。以博其趣。至我孝宗大王元年庚寅。授寢郞。自是八年間。除縣監郞署。皆謝病免。上思得林下人共治。丁酉再以司憲持平召。遂入對稱旨。己亥又除掌令。疏論君德曰天道尙剛。日月尙明。君道體天。一有私意。羣枉並至。殿下爲國。必自身始。毋私於燕昵。毋惑於譽諛。毋尙悅於小利。毋自滿於小成。毋驕矜以自用。是時朝貴多言用兵。先生上玉几銘。又疏言屯田之弊。上命立罷。未幾宮車晏駕。事格不行。時梓宮不用長生舊藏。間日一漆。殯禮未成。先生疏言輴欑帷殯。尙幽暗也。今寶器不陳。羽葆不擧。無聲三啓三之節。而啓殯無節。恐不得盡於禮也。禮君卽位爲裨。歲一漆。湯在位十三年則杝棺十三漆。武王在位七年則杝棺七漆。今梓宮比湯武之椑已厚矣。禮無未安之憾矣。又論諸道御史催還之失曰。凡奉命出使遭國恤者。旣竣事復命於殯殿。禮也。今諸道暗行之臣。事未及竣。禮曹催還。此棄命於草莽也。當時奉使者某歎曰朝廷當用讀書人。顯宗二年春。復以掌令赴召。先是昭顯世子早卒。孝宗以次嫡正位宸極。及己亥大喪。宋相時烈引賈疏體而不正之文。謂慈懿大妃當服庶子朞。先生乃疏請追正其誤。略曰喪服疏言立嫡以長者。欲見嫡妻所生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然則適適相承。謂之正體。乃得爲三年。衆子承統者同。立庶子爲後。謂之體而不正。不爲三年。妾子故也。孝宗以仁祖第二長子。旣承宗廟。而其服與體而不正者等。臣不知何據也。於是黜先生補三陟府。諸議禮者皆得罪。朝野側目。三年而罷還漣上。甲寅以老壽加通政階。是年夏仁宣后昇遐。仁宣卽孝廟之妃也。先是諸臣強引國制。父爲子長衆皆期之說以彌縫之。其實意在古經而傅會今典也。今典父爲子長衆雖同。而至於舅姑爲婦則有長期衆大功之別。卻與禮家合。至是諸臣猶執四種之說。慈懿大妃宜服衆婦大功。然後己亥之議非國制者現矣。上覺之。乃謫責首相以下違禮譸張數輩。八月上昇遐。肅宗承先王遺旨。釐正邦禮。追罪誤禮諸臣。生者配去。死者奪職。特以大司憲召先生。再辭不獲。乃入謝。晉接賜賚。恩禮備至。當時被錮人次第收錄。於是宗統克明。君子一言以爲智。殆先生之謂乎。明年春。疏陳政弊。嚴等威收政法崇敬讓辨邪正躳節儉廣德惠。皆救時切務也。俄遷吏曹參判。陳德禮政刑之義。師旅之戒。又進心學及堯舜禹相傳心法圖。夏特進拜政府右參贊兼成均祭酒。又進君德之戒曰。德莫善於克一。治莫善於保民。政莫善於勘亂。業莫善於立極。聖人勉之。德衰於逸欲。治衰於讒佞。政衰於私昵。業衰於怠荒。聖人戒之。又歷左參贊移吏曹判書。遂擢拜右議政。秋臺官語及三公坐罷。先生上箚引咎。又進於上曰以近代事言之。趙士秀論沈連源。連源稱國家之福。姜緖請罪尹斗壽。斗壽受而爲罪。宋英耈稱譽李恒福。恒福謂必斥乃已。國朝培養諫官有如此。今者儒臣贊譽三公。爲朝廷羞大矣。上作舟水圖說。敎戒臣鄰。先生竊附賡載遺意推衍陳戒。又有賜几杖之命。又明年春。上疏曰臣以無事得壽。請以此獻。心定則靜。靜則事物不能亂。然後無妄動。無妄動故無事。可以盡年。推之家國皆然。宗臣寧平正泗疏詆先生。上怒命配去。先生出郊待罪。上側席俟其復入。先生懇乞焚黃墳塋。仍發行。上親閱太僕馬。揀其良而賜之。命道臣護行。先生遂之漣上。旣而聞慈殿不豫。蒼黃入京。再上箚乞釋泗罪。上勉從之。冬特命句管耆老府。先生又引年乞骸骨不許。戊午春始遞付西樞。先生於是浩然歸田。仍陳訣語。云數十年來。世道大變。汙濁成風。忠無所勸。罪無所畏。人心散亂。災異示警。此何景象。願殿下嚴宮禁,抑私枉,納忠諫,斥邪佞。不墜艱大之遺。上命就所居爲之築室。依國朝李文忠元翼故事也。越明年夏有逆變。赴召請寢大索國。中罪人旣得。辭連宋相時烈。朝議爲竆源之論。將按重律。先生箚云與謀未著。徒以爲賊所籍而加律。王法有所未盡也。事遂已。先是首相許積專國政。嗜勢者趨焉。先生與二三大夫。挺然特立。爲士林領袖。世有淸論濁論之目。積又有悖子堅頗任之。肆其不法。人不敢言。先生憂國忘家。一念殄瘁久矣。至是乃進言論其罪曰。當今敎亡政壞。無法無紀。立黨相攻。誣上行私。人之理蓋極亂矣。領議政許積任大責重。權位旣盛。締交戚里以爲勢。宦侍貴近爲密客。伺上動靜。以爲迎合。其庶孼子堅。所爲多無狀。掌邦法者莫之禁。南九萬發之。九萬竄。堅卒無事。門庭如市。賂遺相續。殿下得此人。欲與之謀國望治難矣。疏入上震怒。疑其有慫惥。廷臣因而激之。前後竄逐。朝著一空。儒生配去者亦四人。先生俟罪田廬。至明年庚申夏五月。積等敗死。黨人者捃摭成罪。先生亦被黜免。越二年夏四月甲辰。考終于正寢。秋權厝某山。至己巳閏月。移兆漣西先塋乾坐之原。上先已命復其官位。至是命該府庀葬如儀。遣承旨賜祭。又命錄用子孫。剞劂遺文。越二年辛未。建祠于麻田郡。賜額號曰嵋江書院。依李文純滉例不待誄狀。賜諡文正。道德博聞曰文。以正服人曰正。癸酉特命建祠羅州。賜號曰眉川書院。皆遣官賜祭。越十八年戊子。配享于鄭文穆逑檜原書院。先生臞形脩眉。軒頎卓犖。望若神仙。卽之謖謖有爽韻。要是曠世人也。其畎畝也。託意山水。抱膝而歌先王之道。若將終身。及竿旄禮招。三辭乃起。嘉猷告后。切切焉堯舜君民之志。奸凶蠧國則正色危言。若斷腕而不顧。廷臣建議。別設體府兵于京師。先生歎曰大權如龍。其去處必有䨓霆。山川木石。爲之折拔震盪。此屬曾不知大禍之根於此。先生去國而張大開府。許積領之。未幾禍作。株連殆遍。惟一種士類之無盡劉者。淸議爲之力也。此其大較也。其尋常行誼。於斯爲末。略之可也。貞敬夫人李氏與國同姓。文忠公元翼之孫。先三十年癸巳圽。享年五十七。祔葬先生塋。擧三男二女。男長翧。次?縣監。次翿出後。尹昇离,鄭岐胤壻也。翧有三子恦,惇,㥳。一女壻李震夏。恦縣監。有五子溥,汲,湜,潭,澂。惇有一子泂。?繼子忭。有一女壻鄭佾。翿有四子。恬,忭,愉,怡。忭出後。恬有二子混,淯。尹昇离一女壻李絿。鄭岐胤有四子重履,重益,重謙,重恒。一女壻尹天挺。溥有子楨。湜有子權。今來乞銘者楨之子也。銘曰。
先生間氣也。咀嚼英華。飽飫腴眞。道將有待。曰在吾身。悅古則千歲以前。近若隔晨。憂世則四海之廣。同胞共仁。際會之盛。使者冠蓋。相望於浚之郊渭之濱也。輔導之至。左勳右華。非第一等。不屑陳也。其斥邪也。一刀兩段。知幾其神。其引退也。浩然餘裕。混迹於山氓野民。仙姿古貌。正冠垂紳。幽獨不媿。諭後無磷。今之所謂師範。古之所謂大臣。
星湖 李瀷 記


미수 허 선생 신도비명 병서 〔眉叟許先生神道碑銘 幷序〕
과거 우리나라의 훌륭한 공경 대신(公卿大臣)들을 논평할 적에, 외직으로 나가 지방 고을을 맡든 조정에 들어와 계책을 올리든 선왕(先王)의 도가 아니면 말하지 않은 인물로 허 선생을 든다.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켜서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은 인물을 거론할 때도 허 선생을 들고, 자신의 도를 펼칠 가능성을 보고 세상에 나가고 그러지 못할 기미가 보이면 곧장 물러나는 등 시종 법도에 맞은 인물을 거론할 때도 허 선생을 들고, 상고(上古)의 태평 시대에 뜻을 두고 후세의 치란(治亂)에 대해 훤히 꿰뚫어서 이를 통해 몸소 자신을 다스리고 후학들을 인도한 인물을 거론할 때도 허 선생을 꼽는다. 선생은 쇠락한 세상에 그 명성을 온전하게 유지한 분이라 하겠다.

당시 나의 선친과 함께 조정에서 벼슬한 분들이 온 힘을 다해 선생을 보필하면서 청의(淸議)를 주장하였는데, 그 주장이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선비들의 대다수는 선생에게 동조하였다. 이제 선생이 돌아가신 지 60여 년이 되었다. 거센 정치적 풍파에다 세월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후배들로 하여금 우러러보며 선생의 풍채를 사모하게 하니, 걸출한 군자가 아니고서는 그리할 수 없는 일이다. 선생의 5대손인 징사(徵士) 지(砥)가 나를 찾아와서 비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웠으나 도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양천(陽川)의 세가(世家)로 찬성(贊成) 자(磁)의 증손이다. 조부는 별제(別提) 강(橿)이고, 고(考)는 현감 교(喬)이다. 공의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추은(追恩)하여 규례에 따라 관직이 추증되었다. 비(妣)는 나주 임씨(羅州林氏)로 정랑 임제(林悌)의 따님이다.
선생은 소경왕(昭敬王 선조) 28년 을미년(1595) 12월 기유일에 태어났는데, 손바닥에 ‘문(文)’ 자가 새겨져 있었다. 휘는 목(穆), 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이며, 호는 미수(眉叟)이다. 스승을 찾아가 글을 배울 적에 백 번을 읽지 않으면 외우지를 못하였다. 하지만 한 권을 독파하고 나면 그 내용을 막힘없이 모두 이해하였다. 예전의 훌륭한 말씀과 행실을 듣기 좋아하여 그때 이미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장성한 뒤에는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고,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사물을 보는 시야를 넓혀 나갔다.
효종대왕 원년 경인년(1650)에 참봉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8년 사이에 현감과 낭관(郞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상이 산림(山林)에 있는 인재들을 불러다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릴 생각을 가지고 정유년(1657, 효종8)에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부르자 마침내 입대(入對)하여 상의 뜻에 부응하였다. 기해년(1659)에 또다시 장령에 제수되자 상소를 올려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을 논하기를,“천도는 강건함이 그 특징이고, 일월은 밝음이 그 특징입니다. 임금의 도는 이러한 하늘을 본받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사적인 마음이 끼어들면 뭇 소인배가 모여들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나라를 다스릴 때 반드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하소서. 가까운 사람이라 하여 사사로이 대하지도 말 것이며, 아첨하는 사람에게 현혹되지도 말 것이며, 작은 이익에 기뻐하지도 말 것이며,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도 말 것이며, 교만한 마음으로 자신만이 옳다고 고집하지도 마소서.”하였다.
이때 조정의 권력자 중에 청나라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장하는 이가 많았으므로 선생이 〈옥궤명(玉几銘)〉을 올렸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둔전(屯田)의 폐단을 아뢰니 상이 곧장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효종대왕이 승하하는 바람에 중지되어 시행하지 못했다. 당시 재궁(梓宮)을 장생전(長生殿)에 이전부터 보관돼 있던 것을 사용하지 않고 하루걸러 한 번씩 옻칠을 하는 등 빈례(殯禮)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선생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상여 위에 나무를 쌓아 올리고 빈소에 장막을 두르는 것은 어둡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제기(祭器)도 진설하지 않고 우보(羽葆)도 들지 않은 채 열겠다고 고하는 절차도 없이 멋대로 빈궁(殯宮)을 여니, 이는 예법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예법에는 임금이 즉위하면 미리 관을 만들어 놓고 한 해에 한 번씩 옻칠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탕 임금은 13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므로 관을 열세 번 칠했을 것이고, 무왕은 7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므로 관을 일곱 번 칠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칠한 것만으로도 이미 탕 임금이나 무왕의 재궁보다도 두꺼울 것이니, 예법에 비추어 보아도 유감스러울 게 없습니다.”하였다.
또 각 도에 파견된 어사들을 급히 소환한 잘못된 조치에 대해서도 논계하기를, “무릇 왕명을 받들고 어사로 나갔다가 국상을 당한 경우, 맡은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빈전(殯殿)에 복명하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각 도에 파견된 암행 어사들이 일을 아직 마치기도 전에 예조에서 그들을 서둘러 소환하였으니, 이는 초야에다 왕명을 내팽개쳐 버린 꼴입니다.”하니,
당시 어사로 나갔던 아무개가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래서 조정에는 글을 읽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현종 원년(1660) 봄에 다시 장령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에 앞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사망하고 효종이 다음 적자(嫡子)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기해년(1659, 효종10) 국상 때에 재상 송시열(宋時烈)이 가공언(賈公彦)의 《의례소(儀禮疏)》에 나오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란 말을 인용하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는 마땅히 서자(庶子)의 상복에 해당하는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이 이때에 와서 상소를 올려 그 당시의 잘못을 소급해서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그 대략은 이러하다.
“〈상복(喪服)〉 편의 가공언소(賈公彦疏)에 ‘「적자(嫡子)를 세우되 장자(長者)로써 한다.〔立嫡以長者〕」라고 한 것은 적처(嫡妻) 소생의 둘째 장자를 세워도 장자라 부를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적자에서 적자로 왕통이 이어질 때 ‘정이면서 체이다.〔正體〕’라고 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으며, 중자(衆子)로서 왕통을 이은 경우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을 두고서 ‘체이기는 하지만 부정하다.〔體而不正〕’라고 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 것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효종이 인조의 두 번째 장자로서 이미 종묘사직을 이어받았는데 그 상복을 ‘체이기는 하지만 부정한’ 예와 똑같이 처리하였으니, 신은 무슨 근거로 그리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로 선생은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쫓겨났고, 예법을 논하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처벌을 받게 되니 조야(朝野)의 인사들이 눈치만 보며 아무런 말도 못했다. 3년이 지나 수령직을 그만두고 연천(漣川)으로 돌아왔다.
갑인년(1674, 현종15)에 장수한 이들에게 품계를 내리는 예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이해 여름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였는데, 인선왕후는 바로 효종의 왕비이다. 이에 앞서 신하들이 국제(國制)의 “아버지가 죽은 아들을 위해 장자와 중자 구분 없이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라는 설을 무리하게 끌어들여 임시방편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사실 마음은 고경(古經)에 있으면서 오늘날의 국가 법전에다 억지로 끌어 붙인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 법전에는 아버지가 죽은 아들을 위해 장자든 중자든 똑같은 상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시부모가 죽은 며느리를 위해 입는 상복의 경우에는 장부(長婦)에게는 기년복을, 중부(衆婦)에게는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차이가 있어 도리어 예론가의 말과 합치되었다. 이때에 와서도 신하들은 여전히 사종지설(四種之說)을 고집하며 자의대비가 중부를 위한 상복인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자 기해년의 주장이 국제가 아니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현종이 이 사실을 깨닫고는 예법을 어기고 장황하게 거짓말을 일삼은 영의정 이하 몇몇 관료들을 귀양 보내거나 문책하였다.
8월에 현종이 승하하자, 숙종이 선왕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나라의 예법을 바로잡고 이전에 예를 잘못 시행하게 한 신하들을 소급하여 처벌하되, 살아 있는 자들은 귀양 보내고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생전의 직첩을 박탈하였다. 그러고서 특별히 선생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불렀다. 선생이 두 차례나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입궐하여 사은숙배(謝恩肅拜)하니, 숙종이 선생을 맞이하고 하사품을 내림에 있어 예우가 극진하였다. 당시에 예송 문제로 금고(禁錮)되었던 사람들도 차례로 조정에 복귀하여 관직에 임용되었다. 이에 나라의 왕통(王統) 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었으니, 군자는 한마디 말만으로도 지혜롭다는 평을 듣는다고 한 것은 아마도 선생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듬해 봄에 상소를 올려 정사의 폐단에 대해 진언하였는데, 신분과 지위를 엄격히 구분하고 국가의 정법(政法)을 바로잡고 공경과 겸양을 숭상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고 덕과 은혜를 널리 베풀라는 말씀이었으니, 모두가 당시 세상에서 절실히 필요한 일들이었다.
얼마 후 이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덕(德), 예(禮), 정(政), 형(刑)의 의미와 국방력을 강화하자는 말씀을 진달하고, 또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상전심법도(堯舜禹相傳心法圖)〉를 올렸다.
여름에 특명으로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좨주에 제수되자, 다시 임금의 덕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올리기를, “덕(德)은 선(善)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고, 치(治)는 백성을 보호하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고, 정(政)은 혼란을 안정시키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고, 업(業)은 원칙을 세우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성상께서는 이에 힘쓰소서. 덕은 편안함과 탐욕을 추구하는 데에서 쇠퇴하고, 치는 참소와 아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쇠퇴하고, 정은 사적으로 가까이하는 데에서 쇠퇴하고, 업은 몸을 게을리하는 데에서 쇠퇴하니, 성상께서는 이를 조심하소서.”하였다.
또 좌참찬을 거쳐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었다가 드디어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가을에 대관(臺官)이 삼공(三公)에 대해 언급한 일로 파직되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인혐(引嫌)하고 숙종에게 진언하기를, “근래의 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조사수(趙士秀)가 심연원(沈連源)을 논박하자 심연원이 그를 가리켜 국가의 복이라고 칭찬하였고, 강서(姜緖)가 윤두수(尹斗壽)에게 죄줄 것을 청하자 윤두수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영구(宋英耈)가 이항복(李恒福)을 칭송하자 도리어 이항복이 기필코 그를 쫓아내고야 말겠다고 말했습니다. 조정에서 간관(諫官)의 기상을 키워 준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신(儒臣)들이 삼공을 칭송만 하고 있으니, 이는 조정의 큰 수치입니다.” 하였다.
상이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지어 신하들을 훈계하자, 선생이 상의 뜻을 이어받아 그 의미를 해설하고 경계의 말씀을 올렸는데, 궤장(几杖)을 하사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듬해 봄에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일이 없는 까닭에 장수를 누리고 있으니, 청컨대 이를 가지고 전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생각이 고요해지고, 생각이 고요해지면 외부의 사물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함부로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고, 함부로 움직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일이 없게 되어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를 집안이나 국가에 적용해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하였다.
종신(宗臣)인 영평정(寧平正) 이사(李泗)가 상소를 올려 선생을 비방하였는데, 상이 진노하여 유배의 명을 내렸다. 선생이 교외로 나가 대죄하자 상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선생이 다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선생이 선영에 분황(焚黃)하러 가겠다고 간절히 청하고 이어 길을 떠나자, 상이 태복시의 말을 둘러보고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내려 주고는 관찰사에게 명하여 수행하게 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연천(漣川)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자전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들어왔다. 재차 차자를 올려 이사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마지못해 따랐다.
겨울에 특별히 기로소(耆老所)를 주관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또다시 나이를 들어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오년(1678, 숙종4) 봄이 되어서야 중추부의 관직으로 체차되었다. 선생이 이에 주저 없이 시골로 돌아오며 작별의 말을 올려,“수십 년 사이에 세도(世道)가 크게 변함에 따라 혼탁한 풍조가 만연하여 나라에 충성해도 칭찬받을 곳이 없고 죄를 지어도 두려워할 데가 없습니다. 민심이 이반되어 뒤숭숭하고 자연재해가 경고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광경이란 말입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궁궐의 내부를 엄격히 단속하고 사사로운 마음을 억누르며 충성스런 간언을 받아들이고 아첨하는 말을 물리쳐서 선왕께서 물려주신 어렵고 중대한 왕업을 실추하지 마소서.”하였다.
상이, 선생이 거처할 집을 새로 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게 집을 지어 준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이듬해 여름에 역변(逆變)이 발생하였다. 숙종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나라 안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청하였다. 죄인을 잡은 뒤에 공초를 받아 보니 그 내용이 송시열과 관련되어 있었다. 조정의 여론이 그 근원을 끝까지 파헤치자고 주장하며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리기를 “모의에 참여한 것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흉적이 하는 말만 믿고 형벌을 가한다면 왕법(王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하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에 앞서 영의정 허적(許積)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었으므로 권세를 좋아하는 자들이 그를 추종하였다. 선생이 몇몇 대부들과 우뚝이 일어서서 사림(士林)의 영수가 되니, 세상에 청론(淸論)과 탁론(濁論)의 지목이 생기게 되었다. 허적은 또 패륜을 일삼는 아들 허견(許堅)을 매우 신임하여 아들이 불법을 자행해도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집안도 잊고서 오래도록 마음을 다해 노력하여 왔는데, 이때에 와서 간언을 올려 그의 죄를 논하기를,“지금 세상은 교화와 형정(刑政)이 무너져 법도와 기강이 없어졌습니다. 당파를 만들어 서로 공격하면서 임금을 속이고 사적인 이익만을 취하고 있으니, 사람의 도리가 극도로 문란한 상태에 있습니다. 영의정 허적은 임무가 크고 책임이 막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권세와 지위가 높아지자 외척과 결탁하여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였고, 환관과 근신(近臣)들을 밀객(密客)으로 만들어 임금의 동정을 살펴 영합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자 허견은 하는 일이 대부분 오만무례한데도 국법을 담당한 자들이 금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구만(南九萬)이 이 사실을 폭로했다가 남구만만 귀양 가고 허견은 끝내 무사하였습니다. 그의 집 문전은 드나드는 사람으로 시장을 이루고 뇌물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사람을 얻어서 함께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시니,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기란 어려운 일입니다.”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진노하여 다른 사람의 부추김을 받아 그런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이 일로 임금의 심기를 건드려 전후로 축출을 당하니,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 유생으로서 귀양 간 사람도 네 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시골집으로 내려가 대죄하였다. 이듬해 경신년(1680, 숙종6) 여름 5월에 허적 등이 패사(敗死)하자 서인(西人)들이 이것저것 주워 모아 선생의 죄를 만드니, 선생 역시 벼슬에서 삭출되었다.
2년이 지난 여름 4월 갑진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다. 가을에 모산(某山)에 임시로 안장했다가 기사년(1689) 윤3월에 연천(漣川) 서쪽 선영의 건좌(乾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상이 이에 앞서 관작을 회복시켰고, 이때에 와서 담당 관청에 명하여 장례를 의례에 맞게 치러 주도록 하고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그리고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유문(遺文)을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2년이 지난 신미년(1691)에 마전군(麻田郡)에 사당을 세우고 미강서원(嵋江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전례에 따라 시장(諡狀)을 갖추지 않은 채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내렸다. 시법(諡法)에, 도와 덕을 갖추고 문견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정도(正道)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을 정(正)이라 한다. 계유년(1693)에 특명으로 나주(羅州)에 사당을 세우도록 지시하고 미천서원(眉泉書院)이라 사액하였다. 모두 관리를 보내 치제하였다. 18년이 지난 무자년(1708)에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 배향되었다.
선생은 야윈 얼굴에 눈썹이 길고 키가 훤칠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처럼 보였고 가까이 다가서면 시원스런 모습이었으니, 한마디로 말해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초야에 있을 때는 산수에 마음을 붙이고 무릎을 포개 앉아 선왕의 도를 노래하면서 죽을 때까지 그리할 것처럼 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초빙하자 세 번 사양한 후 조정에 나아갔다. 훌륭한 계책을 임금에게 고할 때는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을 만들려는 뜻이 간절히 배어났고, 간흉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준엄하게 비판하여 마치 팔이 잘려 나가도 돌아보지 않을 듯이 하였다. 조정 신하들의 건의로 체찰부(體察府)를 별도로 설치하여 서울에 병사를 주둔하게 되자 선생이 이를 보고 탄식하기를 “대권(大權)은 용(龍)과 같아서 그가 지나는 곳에는 반드시 뇌성벽력이 치고 산천초목이 꺾이고 요동을 치게 마련이다. 이 사람들은 아직도 대재앙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줄을 모르고 있구나.” 하였다. 선생이 도성을 떠나자 체찰부를 확대하여 허적이 통솔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화란이 일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오직 한 부류의 선비나마 다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청의(淸議)를 주장한 덕분이었다.
이상으로 행적의 대략을 기술하였다. 나머지 일상적인 행실은 이에 비해 말단의 일이므로 생략해도 될 것이다.
정경부인 이씨(李氏)는 왕실과 동성(同姓)으로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선생보다 30년 앞선 계사년(1653, 효종4)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선생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었다. 장남 훤(翧), 둘째 함(?)은 현감을 지냈고, 셋째 도(翿)는 양자로 나갔다. 사위는 윤승리(尹昇离)와 정기윤(鄭岐胤)이다.
훤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상(恦), 돈(惇), 원(㥳)이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이진하(李震夏)이다. 상은 현감을 지냈고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보(溥), 급(汲), 식(湜), 담(潭), 징(澂)이다. 돈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형(泂)이다.
함은 변(忭)을 양자로 들였다. 변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정일(鄭佾)이다.
도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염(恬), 변(忭), 유(愉), 이(怡)이다. 변은 양자로 나갔다. 염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혼(混), 육(淯)이다.
윤승리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이구(李絿)이다.
정기윤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중리(重履), 중익(重益), 중겸(重謙), 중항(重恒)이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윤천정(尹天挺)이다.
보(溥)는 아들 정(楨)을 두었고 식(湜)은 아들 권(權)을 두었는데, 이번에 나를 찾아와 비명을 부탁한 이는 정(楨)의 아들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생은 세상에 보기 드문 기운을 타고난 분 / 先生間氣也
좋은 문장 곱씹어서 / 咀嚼英華
글의 진수 배 채우고 / 飽飫腴眞
도가 장차 의지할 곳 / 道將有待
바로 당신 몸이로세 / 曰在吾身
옛것을 좋아하여 천년 전 일 / 悅古則千歲以前
어제처럼 가깝게 여기고 / 近若隔晨
세상을 근심하여 넓은 사해 / 憂世則四海之廣
동포처럼 사랑했네 / 同胞共仁
임금 예우 융숭하여 / 際會之盛
사신의 수레 행차 준교(浚郊) 위빈(渭濱) 잇달았고 / 使者冠蓋相望於浚之郊渭之濱也
극진한 임금 보필 / 輔導之至
요순의 일을 들어 최선이 아니면 아뢰지 아니했네 / 左勳右華非第一等不屑陳也
사특한 것 배척할 땐 단칼에 동강 내듯 / 其斥邪也一刀兩段
그 기미 귀신처럼 알아냈고 / 知幾其神
인혐하고 물러날 땐 주저 없이 떠나가서 / 其引退也浩然餘裕
산야의 백성들과 다름없이 살아갔네 / 混迹於山氓野民
신선 같은 자태 예스런 용모 / 仙姿古貌
반듯한 관에다 큰 띠 두르고 / 正冠垂紳
홀로 있을 때도 부끄러울 일 없고 / 幽獨不媿
변함없이 후생들 교육하니 / 諭後無磷
오늘날의 이른바 사범이요 / 今之所謂師範
옛적의 이른바 대신이로다 / 古之所謂大臣 




2019.4.8. 북면 외감리 달천동 각자 모습


文政公眉叟許先生遺址(문정공미수허선생유지)」와 불과 10m 거리의 달천계곡에는 편평하고 널찍한 바위에 ‘달천동(達川洞)’이란 3자의 글이 새겨져있다. 이 글은 전체 길이 174cm이고, 達 54cm, 川 54cm, 洞 44cm인 힘이 넘치는 해서체로 새겼다. 옛 사진에는 洞자가 완벽했지만 지금은 훼손된 흔적이 있다. 오른쪽에는 먹을 갈았다고 전하는 장방형의 벼루 홈이 남아있다.




2019.4.8 성재허선생 계원들이 남긴 마애비


文政公眉叟許先生遺址碑(문정공미수허선생유지비)」 바로 아래 쪽 계곡에는 달천회 계원 6명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비(磨崖碑)가 있는데 1942년(壬午) 음력 9월(季秋)에 남긴 비이다. 이들 대부분은 창원향교를 출입했던 유림으로 그 내용은 이렇게 적혀 있다.


眉叟許先生遺地(미수허선생유지)


壬午季秋達天會(임오계추달천회)
李樟煥 全義人(이장환 전의인)
金吉元 金海人(김길원 김해인)
金鎬源 商山人(김호원 상산인)
曺璟煥 昌寧人(조경환 창녕인)
金厚元 金海人(김후원 김해인)
安斗馨 順興人(안두형 순흥인)
性齋許先生有稧帖序(성재허선생유계첩서)




2019.4.8 달천동 마애비 전체 모습


여기에 이름을 올린 여섯 분들 대부분은 창원향교에 걸려 있는 편액에 이름이 나오며 일제강점기의 험난한 시대를 온 몸으로 느끼며 살다간 분들이다. 미수허선생의 유지인 달천동을 성재허선생이 김해부사 시절 방문했을 때 허전선생의 학덕을 따르며 계를 모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마애비를 남긴 것으로 보여 진다.


허전(許傳:1797~1886)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 출생. 허병(許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윤(許玧)이고, 아버지는 허형(許珩)이며, 어머니는 이중필(李重泌)의 딸이다.
1855년 당상관에 오르면서 벼슬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 민란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들끓자, 그 해소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로 부임해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는 한편,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쳐,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6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그는 경의(經義)와 관련해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바탕한 구체적인 개혁안도 제시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종요록(宗堯錄)』·『철명편(哲命編)』을 비롯해,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士儀)』 등이 있다.




2019.4.8 달천동 마애비와 달천동 풍경



출처 및 참고
한국민속문화 대백과사전-허전(許傳) 

한국문집총간 > 성호전집 > 星湖先生全集卷之五十八 > 碑銘/한국고전번역원-최재기(2011)
창원전사록-金蘭契/평화보문사(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