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남해 금산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9. 1. 5. 13:30



2019.01.03. 남해 상주면 금산봉수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 2573번지 금산(錦山)의 정상에 위치한 남해 금산봉수(南海 錦山烽燧)는 1987년 5월 19일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에 지정된 문화재이다. 남해 금산봉수는 위치기반 고도계가 해발 678m를 기록하고, GPS고도계는 698m를 가리키며 「위도 34°45′14.5″N 경도 127°59′01″E」를 표시한다. 이곳 망대 안내판은 고도를 705m로 기록하고, 남해 금산(南海 錦山) 안내판은 681m로 적었으며, 다음 지도에서는 701m로 기록하고 있다.




2019.01.03. 북쪽에서 바라본 금산봉수


남해 금산봉수에서 남해 원산(호구산)봉수까지 서북 방향으로 직선거리 7.31km, 남해 설흘산봉수까지 서남쪽으로 7.87km, 미조 망산봉수까지 동남쪽으로 6.49km이다. 북쪽의 대응봉수인 창선 대방산봉수까지는 직선거리 11.73km이다. 또한 동북 방향의 사량도 칠현산 주봉봉수와는 24.15km이며, 북서쪽의 고성 좌이산봉수와는 26.54km이다.
남해 금산봉수는 창선 대방산봉수를 거쳐 사천 각산봉수로 연결되어 서울로 가는 제2거선 제9간선이며, 또한 남해 소흘산(설흘산)봉수로 전하여 전라도 여수 돌산봉수로 이어지는 제5거선의 통로이기도 한 매우 중요한 위치의 봉수이다.




2019.01.03. 서북쪽 신천마을에서 바라본 금산봉수


네비에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 6-1을 입력하고 가면 ‘국립공원 복곡주차장’이 나오는데 주차비 4,000원을 내야 한다. 보리암매표소가 있는 제2복곡주차장으로 가려면 위쪽의 차량이 내려와야 올라 갈 수 있으므로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 제2복곡주차장에서 주차를 하고 금산봉수로 가려면 보리암매표소를 지나야 하는데 1인당 문화재 구역입장권 1,000원을 구입해야 한다.
문제는 금산 보리암에서 영수증을 발행하는데 금산의 명승지와 기념물은 보리암과 상관없는 시설과 경관이다. 그 비용으로 주차비를 내었다면 다시 보리암 구경비용으로 1,000원을 받는 것은 종교의 상업화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보리암 매점 좌측으로 금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보리암매표소에서 약 800m 비포장도로는 보리암매점에서 끝나는데 관광객들은 걸어서 가야하며, 보리암과 단군성전, 부소암, 금산산장 등의 사람들만 이 구간에 차량을 이용하는 곳으로 보인다.
남해 금산 보리암(菩提庵) 매점에서 보리암으로 내려가는 길과 금산의 정상에 위치하는 금산봉수(錦山烽燧)로 올라가는 길이 갈라진다. 이 지점에 ‘탐방로 안내도’가 있으며 잡석으로 만든 돌계단을 오르면 오른 쪽에 ‘명승 제39호’로 지정 된 ‘남해 금산(南海 錦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안내판에는 이렇게 기록 했다.
『해발 681m의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 중에서 유일하게 산악공원에 해당한다. 바다에서 솟아 오른 산이기 때문에 내륙에 있는 산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예전부터 남해의 소금강으로 알려진 이 산은 원래 이름이 보광산(寶光山)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성계가 이 산에서 200여 일 간의 기도를 한 후 산신(山神)의 영험을 받았으며, 그 때 자신이 왕이 되면 산을 온통 비단으로 감싸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침내 왕이 된 이성계는 산신과의 약속에 따라 산의 이름을 비단 금(錦) 자를 써서 금산(錦山)이라 명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의 정상부는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이루며 우거진 숲과 함께 철따라 수려한 경관을 연출한다. 특히 자연석굴인 쌍홍문(雙虹門)을 비롯한 38경은 소금강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신라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지었다고 하는 보리암(菩提庵)에는 인도에서 제작되어 용왕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까지 왔다고 전해지는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그런 영험 덕분인지 오늘날에도 이곳은 전국에서 으뜸가는 기도처로 이름이 높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보리암 앞에는 가락국의 김수로 왕비가 인도에서 배에 실어 왔으며 그 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묻었다고 하는 3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 위에는 나침판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데 이 역시 신비할 따름이다. 이처럼 금산은 많은 전설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멀리 보이는 상주 해수욕장과 더불어 이 고장 최고의 명승지 이다.』




단군성전 방향과 정상으로 가는 방향에 세운 표지 우측에는 시누대가 있다.


매점에서 시작하는 금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은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이 끝나고 우측 금산봉수로 가는 길옆에는 시누대가 빼곡히 자란다. 수많은 바위에는 옛 선인들의 이름이 곳곳에 새겨져 있는데 인간이 이름을 남기려 하는 노력이 가상하다. 정상에 당도하니 금산봉수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남해 금산봉수대(南海 錦山烽燧臺)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91
『봉수(俸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俸]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금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둔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 번 올리지만[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네 번,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 금산 봉수대는 고려 의종(毅宗, 1147~1170 재위)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이다.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四川), 진주(晉州)등을 거쳐 서울에 전달되었다.』





또한 남해 금산봉수대 앞에는 금산 제1경 망대에 대한 안내판이 있는데 이곳에 적은 망대(望臺)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05m)로서 사방의 조망이 넓고 아름다운 남해 바다를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망대라 한다. 이곳에 오르면 금산의 38경과 남해의 망경창파를 한 분에 볼 수 있으며 장엄한 일출은 가히 절경이다. 망대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경남지역의 봉수Ⅱ」에 의하면
금산봉수대는1999~2000년에 걸쳐 남해군 창선면에서 지표조사 하였으며, 현재는 연대와 연통, 측면에 나선형의 계단시설을 갖춘 채 복원되어 있다.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봉수는 연대, 추정 건물지, 추정 호(壕)의 형태를 확인하였다. 연대는 자연암반을 이용하였고 주변자연석으로 허튼충쌓기하였다. 지형에 따라 석축의 높이는 동쪽 0.9m, 서쪽 27m, 남쪽 1.6m, 북쪽 2.5m로 북서쪽 면이 짧은 방형이나 남동쪽 전면은 타원형을 취하고 있으며, 토석 혼축이다. 남동쪽 장축방향은 길이 9.9m, 남서쪽을 축으로 하는 단벽 길이는 6.2m이다. 연대 상부면은 주변에 흩어진 자연석을 이용하여 지름 2.4m의 원뿔형으로 높이 l.7m정도 쌓았다. 조사 시 원뿔형의 자연석을 제기하니 연대의 상부에 그을린 흙과 지연석이 혼합된 지름 2.4m의 둥근 흔적이 나타났으나, 이 부분을 연조의 바닥으로 단정하기에 미흡한 점이 많다. 봉수대로 오르는 계단시실은 북서쪽에 위치하며 자연석까지 포함하여 16단으로 조사 되었다.
봉수대 앞 평탄지에는 추정 건물지가 있는데 남·서쪽 경사면에 「ㄱ」자 형태의 자연석 석축을 축조하였다. 호는 연대의 북동쪽과 북서쪽에 위치하고 북동쪽은 연대에서 9.2m 떨어진 경사가 완만한 장소에 길이 22m, 너비 2.1m이고, 북서쪽은 낮은 경사면에 너비 2m, 깊이 0.4m 정도의 호로 보이는 시설이 있다.
복원된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으로 연대, 연소시설의 형태이다. 자연암반 위에 평탄하게 정지작업을 거친 후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연대는 자연암반까지 포함해 4~4.5m, 석축 부분의 높이는 3m이고, 둘레 26m이다. 지름은 남북 8.8m, 동서 6m이다. 연대의 축조 방식을 보면 자연암반을 기저부로 인근에 있는 상판의 자연석을 모아 축조하였으며 하부에는 큰 석재를 사용하고 상부에는 작은 판석으로 쌓았다.




특이하고 잘 생긴 바위를 찍고 보니 문장암이다.


慶尙道地理誌(경상도지리지)는 1425年(世宗 7)에 편찬된 慶尙道(경상도)의 地理志(지리지)로 河演(朝鮮)하연(조선)이 편찬한 책이다. 慶尙道地理誌(경상도지리지) 晉州道(진주도) 昆南郡(곤남군) 조의 남해에 있는 봉수의 기록은 이렇게 적었다.
錦山烟臺烽火在島東 西望島中所屹山烟臺烽火 相去陸路三十里 自所屹山烽火 西望望雲山烽火 相去三十里 自望雲山烽火 北望晉州任內金陽部曲地 陽芚山烽火 相去二十六里
금산연대봉화는 섬의 동쪽에 있다. 서쪽을 보면 섬의 중앙에 소흘산연대봉화가 있고, 서로의 거리는 30리이다. 소흘산봉화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망운산봉화가 있고 서로의 거리는 30리이다. 망운산봉화에서 북쪽을 보면 진주 임내 금양부곡 지역의 양둔산봉화가 있고, 서로의 거리는 26리이다.




문장암의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 글귀


금산봉수의 계단과 마주하는 커다란 바위를 문장암(文章庵)이라 일컫는데 나막신처럼 생긴 바위에 경유(景遊) 주세봉(朱世鳳, 1495-1554)이 곤양현감으로 있을 때 이곳 금산에 올라 이 바위에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하여 문장암이 되었다 한다. 바위에 새긴 내용은 아래와 같고 그가 시를 남겼으니 다음과 같다.

              

由虹門 上錦山 

무지개 문¹⁾으로 금산에 오르다.

嘉靖戊戌歲

가정²⁾ 무술년(1538)

前翰林學士 朱世鳳景遊

전 한림학사 주세붕 경유³⁾ 

尙州浦 權管 金九成 又  

상주포 권관⁴⁾ 김구성과 또

進士 吳季鷹翰之 

진사 오계응 한지⁵⁾

僧戒行同登翰之子顯男

중 계행과 한지의 아들 현남과 함께 올랐다.

書刻 僧 玉道

중 옥도가 글 쓰고 새겼다.



花田風光名波

화전⁶⁾의 풍광 소문이 멀리 이름 높아

百里路二日到

백리길 멀다 않고 이틀 만에 당도하네.

由虹門上錦山

쌍홍문 거쳐서 금산에 올라보니

神仙奇巖萬處

신선이 놀다 간 곳 처처에 기암일세.

山野秋色蔓延

산과 들은 가을 색으로 깊어 가는데

學斐裙裳好愛

추색도 좋다마는 학비치마⁷⁾ 더 좋더라.



【주석】
무지개 문¹⁾ : 무지개 문(虹門)은 남해 금산을 상주 방향 등산로에서 오르면 쌍홍문(雙虹門)을 지나게 된다. 커다란 바위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이 무지개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가정²⁾ : 가정(嘉靖)은 명대(明代)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이다.
경유³⁾ : 경유(景遊)는 주세붕(朱世鳳)의 자(字)이다. 예전에는 성인이 되어 장가를 들면 이름(名) 대신 자(字)를 지어 불렀다.
권관⁴⁾ : 권관(權管)은 조선시대 변경지방 진관(鎭管)의 최하단위인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守將)을 말한다.
한지⁵⁾ : 한지(翰之)는 오계응(吳季鷹)의 자(字)이다.
화전⁶⁾ : 화전(花田)은 남해의 별칭으로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김구(金絿)가 남해도(南海島)로 유배되었을 때 남해의 뛰어난 경치와 향촌(鄕村)의 인물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정서와 감회를 경기체가(景幾體歌)로 지은 화전별곡(花田別曲)으로도 유명하다.
학비치마⁷⁾ : 학비군상(學斐裙裳)이란 한바탕 여흥 끝에 기생 학비의 치마에 시를 적어 준 것.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1425) 진주도 남해(晉州道 南海)에는
[煙臺烽火 縣東錦山烽火 北與晋州興善島臺方山烽火相准 西與縣南所屹山烽火相准 所屹山烽火西越大海全羅道順天東突山烽火相准]
연대봉화 : 현의 동쪽에 금산봉화가 있다. 북쪽 진주 흥선도 대방산봉화와 서로 통하고, 서쪽의 현 남쪽 소흘산봉화와 서로 통한다. 소흘산봉화는 서쪽 큰 바다를 넘어 전라도 순천 동쪽의 돌산봉화와 서로 통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45) 경상도 진주목 곤남군(昆南郡)에는 이처럼 기록했다.
烽火三處, 錦山在南海島東, 【西準本道所屹山】 所屹山、【西準望雲山。】 望雲山在南海島南。 【北準晋州 金陽部曲陽芚】
곤남군(昆南郡) 봉화가 3곳이니 금산(錦山)은 남해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所屹山)에 응한다.】 소흘산(所屹山) 【서쪽으로 망운산(望雲山)에 응한다.】 망운산(望雲山)은 남해도 남쪽에 있다. 【북쪽으로 진주(晉州) 금양 부곡(金陽部曲)의 양둔(陽芚)에 응한다.】




정남쪽에 위치한 세존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남해현(南海縣)에는 3곳의 봉수를 기록하고 있다.
[錦山烽燧 北應晉州臺方山西應所訖山及猿山]
[所訖山烽燧 東應錦山北應猿山]
[猿山烽燧 東應錦山南應所訖山]
금산봉수 북쪽으로는 진주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흘산 및 원산에 응한다.
소흘산봉수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원산에 응한다.
원산봉수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소흘산에 응한다.




동남쪽의 미조 망산봉수


『화전고을 땅이름 유래를 찾아서』라는 책에는 금산봉수(錦山烽燧)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 봉수는 원산(猿山)과 미조항진(彌助項鎭) 두 개의 간봉(間烽)을 가진 남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봉수대로서 창선도 대방산봉수(彰善島 臺方山烽燧)로 연결하는 봉수대이다.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¹⁾에는 ‘금산봉수는 현의 동쪽 30리에 있고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晉州 坮方山)²⁾에 보고하였고 그 거리는 45리이다. 서쪽으로 소흘산봉에 보고하고 서로의 거리는 35리이다. 북쪽으로 원산봉에 보고하고 서로의 거리는 20리이다.’
또 다른 기록인 남해읍지(南海邑誌)³⁾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해상을 즉시(卽視)하고 처음 봉화를 올리면 동으로 가서 진주 창선 대방산 봉화대에서 응하고 서로 가서 현지경(縣地境) 설흘산 봉화대에서 응하고 북으로는 원산봉수대에서 응한다.

【주석】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¹⁾ :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錦山烽燧 在縣東三十里 北報晋州坮方山烽 相距四十五里 西報所屹山烽 相距三十里五里 北報猿山烽 相距二十里」
진주 대방산(晉州 坮方山)²⁾ : 지금의 창선 대방산봉수(彰善 臺方山烽燧)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창선도가 진주목의 월경지였다.
남해읍지(南海邑誌)³⁾ :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錦山烽燧 卽海上初烽 而東去應 晋州臺方山烽 西去應縣境雪屹山烽 北去應縣境猿山烽」





아래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지리지 종합정보>에서 찾은 3개의 남해군지에 대한 기록이다.


1786년경 남해현(南海縣)에서 발행한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의 기록은 이렇게 했다.
「烽燧 錦山烽燧 在縣東三十里 北報晋州坮方山烽 相距四十五里 西報所屹山烽 相距三十里五里 北報猿山烽 相距二十里, 所屹山烽燧 在縣南三十里 東應錦山烽 西報全羅道順天府古突山烽 相距六十里, 猿山烽燧 在縣南二十里 東應錦山烽 西報本縣止」
봉수 금산봉수는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봉수에 보고하고 서로의 거리는 45리이다. 서쪽으로 소흘산봉수에 보고하고 서로의 거리는 35리이다. 북쪽으로 원산봉수에 보고하고 서로의 거리는 20리이다. 소흘산봉수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동으로 금산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전라도 순천 돌산봉수에 보고하며 서로의 거리는 60리이다. 원산봉수는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동으로 금산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본 현에 보고한다.





남해 상주 해수욕장 모습


1899년 남해군(南海郡)에서 발행한 남해읍지(南海邑誌)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烽燧 錦山烽燧 卽海上初烽 而東去應 晋州臺方山烽 西去應縣境雪屹山烽 北去應縣境猿山烽, 猿山烽燧 東自來應錦山烽 尺報本縣尙止, 雪屹山烽燧 東自來應錦山烽 西去應全羅道順天府突山烽」
봉수 금산봉수는 바다의 상황을 봉화를 처음 올리는 곳으로 동쪽으로 가서 진주 대방산봉화에 응한다. 서쪽으로 가서 현의 땅에 있는 설흘산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가서 현의 땅에 있는 원산봉수에 응한다. 원산봉수는 스스로 동쪽 금산봉수에 와서 응하고 본 현에 항상 보고한다. 설흘산봉수는 스스로 동쪽 금산봉수에 와서 응하고 서쪽으로 가서 전라도 순천 돌산봉수에 응한다.





1907년경 남해군(南海郡)에서 발행한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에는 이처럼 기록했다.
「烽臺 所屹山烽燧 西接全羅道順天府突山烽燧 北來應猿山烽燧 報本邑錦山烽燧 西接猿山烽燧 北去應晋州臺方山烽燧」
봉대 소흘산봉수는 서쪽의 전라도 순천부 돌산봉수에 접한다. 북쪽으로 원산봉수와 오고가며 응한다. 본읍의 금산봉수에 보고하고 서쪽으로 원산봉수와 접하며 북쪽으로는 진주 대방산봉수와 응한다.




북쪽의 사천 각산봉수가 나무가지 사이로 보인다.


남해 납(원)산봉수

남해 설흘(소흘)산봉수

남해 미조 망운산봉수


남해 금산봉수


창선도 대방산봉수


사천 각산봉수


사천 안점산봉수

사천 우산봉수

 ⇔

 진주 망진산봉수



진주 광제산봉수 ⇔ 단성 입암산봉수 ⇔ 삼가 금성산봉수 ⇔ 합천 소현봉수 ⇔ 거창 금귀산봉수 ⇔ 거창 거말흘산봉수 ⇔ 상주 지례현 구산봉수



출처 및 참조
花田고을 땅이름 유래를 찾아서(2001.1.20.)-김우영/문성인쇄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지리지-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 1786년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지리지-남해읍지(南海邑誌 : 1899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지리지-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 : 1907년경)
남해의 관방유적 성곽과 봉수-남해문화원(2011.12.29.)/김우영, 민부경-문성인쇄출판사.
경남지역의 봉수Ⅱ-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3.11.30.)/강순형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조선시대의 연변봉수-김주홍(2010.11.5.)/한국학술정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