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 다구리 도만마을 은진임씨 경모재 景慕齋

천부인권 2019. 9. 16. 06:30



2019.7.5. 진동면 다구리 은진임씨 경모재 대문


진동면 다구리 23번지는 다구리 도만마을에 위치한 은진임씨 경모재(景慕齋)가 있는 곳이다. 이 경모재는 현대식 붉은 벽돌집으로 마을 위쪽에 자리하여 원거리에서는 재실이 잘 보이는 편이나 접근하면 전체 모습을 보기 어렵다. 우리글로 적고 한자로 토를 단 경모재기景慕齋記)는 1998년 종족인 임태종(林兌鐘)이 찬했으며 그 내용에서 도만마을 최초 입향인은 우곤공(右坤公)이라 주장하여 임씨의 족보를 보면 도만마을에 사람이 살게 된 년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방문 당시 경모재을 관리하는 주인을 만나지 못해 돌아갈까 하다가 기문이 보여 이처럼 기록으로 남겨 둔다.




2019.7.5. 진동면 다구리 은진임씨 경모재



2019.7.5. 진동면 다구리 은진임씨 경모재(景慕齋) 편액 




경모재 주련
天聽寂無音  하늘의 들으심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으니
蒼蒼何處尋  아득히 먼 저 어느 곳에서 찾을 것인가.
非高亦非遠  하늘의 들으심은 높지도 아니하고 멀지도 아니하니
都只在人心  모두가 다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라.


【주석】
天聽(천청): 하늘이 들음.  寂無音(적무음): 고요하고 소리가 없다.
蒼蒼(창창): 아득히 멀다.  何處尋(하처심): 어디서 찾을 것인가?
都(도): 모두.
강절소 선생(康節邵 先生)




경모재기문(景慕齋記文)
경모재(景慕齋)는 은진임씨(恩津林氏) 의령공파(宜寧公派) 조(祖) 휘(諱) 천년공(千年公)의 삼자(三子) 휘 자혜공(自惠公) 팔대 손(孫) 휘 무연공(茂淵公)과 그의 아들 휘 우곤공(右坤公) 및 우곤공의 아들 휘 성원공(盛源公) 삼부자(三父子) 묘소(墓所)의 분암(墳菴)인데 일찍이 영조(英祖) 3년 나라에 은덕잠행(隱德潛行)으로 성조은전(星祖恩典)이 오세(五世)의 추증관작(追贈官嚼)으로 가문을 빛내고 세상을 놀라게 한 증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漢城府左尹)이 계셨으니 그가 휘 춘영공(春榮公)이시니 자혜공(自惠公)의 육대손(六代孫)으로 무연공(茂淵公)의 선조고(先祖考)이시다. 三父子 묘소는 각각 분산(分散)되어 있는데 무연공(茂淵公)과 두 배 위는 미산의 선영(先塋) 하불당산 임좌(壬坐)와 관등(串嶝)정좌(丁坐) 및 금국해좌(金局亥坐) 등에 안치되어 있고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휘 성원공(盛源公)과 배위문화류씨(配位文化柳氏)는 구산면 구복동 장고섬 기곡사좌(基谷巳坐)에 쌍분(雙墳)으로 안치되어 있으며 사실상 도만동 역사(歷史)의 창시자(創始者)이신 휘 우곤공(右坤公)만이 외로이 재사(齋舍)가 있는 연봉유좌(連峯酉坐)에서 자손들이 추원보본하는 정성을 받으면서 또 지켜보며 안장되어 있다. 다만 개척 초창기에 아들 한분을 남긴 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친 배위밀양박씨(配位密陽朴氏)는 장고섬 논곡손좌(論谷巽坐)에서 아들 성원공을 지켜보고 있는 형상을 짓고 있는 것이며 무연공 사손(嗣孫)은 영태(永台)이다. 공은 선조의 일을 올바로 후손에게 전하고저 그의 아들을 우곤공과 애환(哀歡)을 달래면서 또한 칠전팔기(七顚八起)하는 노력으로 마침내 오늘날의 자손번연(子孫蕃衍)과 경제성장을 이룩하므로써 옛 말씀에 이르는 오유반포지정(烏有反哺之情)하고 달유보본지성(獺有報本之誠)하는 뜻을 본받아 사람으로써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정성을 바치고자 하니 이 어찌 메말라 가는 현실 속에서 구름과 진흙의 동떨어짐이라 아니하리오. 정축년(丁丑年) 가을 향사(享祀) 때 함안 대문중 영후손 임종(任鍾)씨가 문중 원로 태종(兌鍾)씨와 필종(必鍾)씨를 동반하여 제참(祭參)하였을 때 재사건립(齋舍建立) 문제가 거론 되니 종원(宗員)들의 호응(呼應)과 정성이 폭주(輻湊)하여 단시일내에 거금(巨金)이 모여 기공(起工)한지 불과 몇 달만에 영후손 익종(益鍾)군이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기문(記文)마져 함께 청하는 지라 내가 평소 익종(益鍾)군의 품성이 위선(爲先)에 성독(誠篤)하고 중망(衆望)이 두터움을 아는지라 사양(辭讓)할 바를 몰라하는데 동행했던 대문중 원로들과 도만문중 중심인물인 구종(九鍾)군과 권종(權鍾)군이 옆에서 간곡히 조언(助言) 하는지라 이에 다시 행장(行狀)을 살피고 서술(敍述)하노니 은진임씨는 그 선대(先代)를 거슬러 보면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민족 공통성에 예외가 될 수 없던 상고대(上古代)는 말할 것도 없고 족보시대(族譜時代)로 접어들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대적 배경(背景)에서 족벌과장(族閥誇張) 차원의 알력(軋礫)과 분쟁(分爭)에서 파생(派生)된 의령공(宜寧公) 삼자(三子) 휘 자혜공 증손 휘 명추공(命秋公)만을 진지(眞志)로 개명(改名)하여 첨모당(瞻慕堂) 넷째 휘 승후공(承厚公)의 계자(系子)로 일방적으로 족보에 등재(登載)하면서 사유(事由)가 불투명(不透明)한 생가(生家)의 상대삼세(上代三世)를 탈락(脫落) 시킴으로써 첨모당 후손과 자혜공 후손 양대종가(兩代宗家)의 후손들이 곤혹(困惑)을 치루게 했는데 다행이 번역문집(飜譯文集) 사태발생(事態發生)이 계기가 되어 거창(居昌) 대종회의 결단(決斷)이 주효(奏效)하여 후손들의 예지(叡智)가 급속도록 합쳐 일찍이 갈천(葛川) 선조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양주(兩主)에게 치도(治道)를 묻는 말에 답한 정심수신(正心修身) 정신(情神)에 입각(立脚) 첨모당의 五子 설을 고치는 동시 자혜공을 원래의 의령공 三子의 위상(位相)이 정립(定立) 될 것을 믿어 의심(疑心)치 않으며 떳떳히 동근동조(同根同祖)의 후손으로 화합과 단결이 더욱 아름답기를 바랄 뿐이다. 그밖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신 공의 선고위(先考位) 휘 원중공(元重公)과 배위 공인(恭人)회산감씨(檜山甘氏)는 각각 대산옥열리(代山玉悅里) 곤좌(坤坐)와 미산 음양지 해좌에 안치(安置)되고 세 아들 중 장백(長伯) 휘 무장공(茂長公)은 종사(宗嗣)로써 배위 달성서씨와 함께 미산옥녀산 해좌원에 합폄되어 안치 되고 주손(胄孫)은 영대(永大)이다. 중씨(仲氏) 휘 무성공(茂成公)은 배위 해주오씨와 함께 혈곡 신좌(辛坐) 쌍분으로 모셨는데 지종손(支宗孫)은 영석(永碩)으로 경모재 건립 때는 모두 헌성(獻誠)하는 정성이 괄목할만 했다. 살치건대 재사(齋舍)는 웅장한 고전은 아닐찌라도 현대에 알맞게 재호(齋號)와 주련(柱聯) 그리고 마루와 문총이 넓고 환하여 조화를 잘 이루어 후손들의 강례(講禮)와 독서(讀書)는 물론 정신 도야(陶冶)의 도량으로 뿐만 아니라 능히 빈객(賓客)을 맞이하고 종친들이 모여서 선조를 숭앙하는 행사(行事)의 병행에 넉넉할 것이다. 하나같이 뭉쳐 단시일에 추원보본의 전당(殿堂)이 완성됨은 위대하신 선령들의 음덕이 함께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겠으니 후손들이 세상을 올바로 보고 사는 보람일 것이니 슬기로운 발전이 무궁하리라 이로써 기문으로 한다.
乙酉解放後 五十四年 戊寅 四月 西紀 一九九八年(1945년 해방 후 54년, 서기 1998년)
後孫 兌鐘 謹記(후손 태종 삼가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