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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오서 회동마을 밀양박씨 회산재 檜山齋

천부인권 2019. 9. 21. 21:19



2019.9.16. 회산재 솟을삼문인 숭례문(崇禮門)


진전면 회동길 51-5는 밀양박씨 재실인 회산재(檜山齋)가 위치한 곳이다. 회산재는 1947년 회산정(檜山亭)으로 건축되었으나 사회의 구조가 바뀌어 훼철 되었다가 1995년에 지금처럼 복원 되었다. 출입문인 솟을삼문에는 숭례문(崇禮門)이라 편액하고 마당을 마주하는 회산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와가로 중앙의 2칸은 완전히 마루이고 좌우 뒤쪽으로 1칸씩 방이 있는 구조이다. 우측의 방문 앞에는 묵은당(黙隱堂)이라 편액 했고, 좌측의 방 앞에는 회산정(檜山亭)이라 편액 했다.




2019.9.16  오서리 회산재(檜山齋)



회산재(檜山齋) 편액



회산재의 5개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아래와 같다.


회산재 주련(檜山齋 柱聯)
矧爾祖先遺址 하물며 선조의 물려주신 터전에서
乃築室而完美 이에 결함이 없이 완전한 집을 지었구나.
頌三斯於千禩 칭송하길 삼사(三斯)¹⁾에서 천년 동안 제사를 지내고
羍梓猶爲敬止 태어난 고향(羍梓)²⁾에서 오히려 공손히 머무른다.
予孫旣受多祉 자손(予孫)은 이미 복(祉)을 많이 받았노라.



【주석】
삼사(三斯)¹⁾ : 세 가지(三)의 사(斯)란 다산 정약용의 시문집 '두 아들에게 부친다'에 나와 있는데 '용모를 움직이는 것(動容貌)',  말을 하는 것(出辭氣)',  '안색을 올바르게 하는 것(正顔色)'을 의미한다. 즉 ‘난폭하고 태만함을 멀리하는 것(斯遠暴漫)’,‘비루하고 천박함을 멀리하는 것(斯遠鄙倍)’, ‘진실을 가깝게 하는 것(斯近信)’을 가리킨다.
태어난 고향(羍梓)²⁾ : 달재(羍梓)는 어린 양과 가래나무를 이르지만 ‘태어난 고향’을 의미한다.





회산재중건기(檜山齋重建記)


이곳 회산동(檜山洞)은 옛 진해현의 한 구역으로서 적석산(積石山)을 주봉으로 하여 기름진 옥토가 펼쳐진 고을이며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생활 근거지 이다. 이곳에 사는 박씨는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의 후손인 밀성대군(密城大君)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고려 조선을 거쳐 오면서 문익공(文翼公 효신(孝臣)과 문헌공(文憲公) 영균(永均) 충숙공익(忠肅公翊)과 감찰공(監察公) 맹심(孟審) 등 명신(名臣)이 대대로 나와 명문가(名文家)의 세업(世業)을 계승하였다. 그 후 감찰공(監察公)의 후손인 세광공(世光公)이 창녕에서 이곳 회동으로 이사하였고 갑진(甲辰) 서기 1784년 3월 14일 묵은공(黙隱公)이 태어나면서 오늘날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다. 공(公)은 나면서부터 천품(天稟)이 뛰어나 학문에 정진(精進)하였고 중년에는 여러 번의 향시(鄕試)를 통해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공은 착실한 행실(行實)과 신의에 투철한 모범적인 인물로서 세속적 삶에 머물지 않았고 슬하(膝下)에 있던 여덟 아들을 효성과 우애 있게 키워 모두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였으며 각기 하나의 기예(技藝)를 익혀 가문의 운세를 번창 하게 하였다. 특히 병중에 계시는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 행적이 읍지(邑誌)와 교남지(嶠南誌) 효행편(孝行篇)에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진해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고 윤리도덕(倫理道德)과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바로잡기 위해 유지들과 힘을 모아 서기 1837년 흥학당(興學堂)을 창건하여 인재를 육성(育成)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고을의 풍기(風氣)를 바로잡아 그 명성이 높았다. 이러한 묵은공(黙隱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숭조(崇祖) 정성의 힘을 모아 서기 1947년 회산정(檜山亭)을 건립하였으나 6·25사변과 산업사회(産業社會)로 접어들면서 후손들이 도시로 진출함에 따라 관리가 소홀하여 흐무러지게 되니 1995년 종친(宗親)들이 모여 각자의 성의에 따라 건립자금을 모아 다시 회산재(檜山齋)를 중건하게 되었으니 묵은공(黙隱公)의 높은 정신이 재실(齋室)에 머물게 되었다. 이 회산재(檜山齋)는 종친(宗親)들의 숭조(崇祖)와 화목(和睦)과 우애(友愛)의 정신을 강론(講論)할 곳이다. 봄·가을의 명절에 각지에 흩어졌던 후손들이 함께 모여 선조의 은덕을 추모하며 선조의 선행과 미담을 강론하는 전통 교육의 계승지가 되어 우리 사회의 모범이 됨과 동시에 무너져 가는 인간성 회복의 산실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유(己酉) 서기 1999년 동지절(冬至節)
부산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이병혁(李炳赫) 삼가 기록하다(謹記)




묵은당(黙隱堂) 편액




[原文]
檜山亭記文
鎭之治四十里許 海灣亘 其東西南 諸峯蔚然深秀 谽谺成一區曰檜洞 銀山朴氏世庄也 朴氏卽忍堂冑子監察公之后也 歷生員牧使公 至諱世光 自昌寧始居于 此數世綿綿 又有分離之歎 黙隱公諱守敏 有子八人 或勤拾本業 或從事文學 各守一藝如 古鄧氏之法 自是門戶創立 而子姪遂蕃衍矣 今其曾孫漢琮 與其諸從經 始寓慕之所 而同聲呼邪 而成制度 四楹三架 扁之以檜山亭 盖因洞之名 而以其先有檜亭檜庵之號合 而標着也 拾是焉聚 族歌谷之所 成之子弟 春絃夏訟之方從 而得之西 序一室題 其軒曰遠慕 黙隱公以下 親盡廟遷 則必祭于 是世世衣鉢之藏 或近或遠 歲一祭之時 若爲雨雪所拘 則必祭于 是其規模之創 始大槩如 是凡作事之法先疎 而後密自租 而入精理之勢也 若其栗里之情 話桃園之樂 事韋氏之花樹 藍田之美 約必自有 宗論之所制者矣
漢琮其勉乎哉

庚寅孟春上澣 族孫鍾厚謹撰


[해문]
회산정기문(檜山亭記文)
진해현(鎭海縣) 현청(治)에서 서쪽으로 십리쯤 되는 바다의 만(海灣)에는 그 동서남쪽으로 여러 봉우리가 무성하게 뻗쳤고 깊숙하고 빼어나서 넓게 한 구역을 이루었으니 회동(檜洞)이라 이른다. 이곳은 은산박씨(銀山朴氏)가 대대로 살았던 장원(莊園)이다. 박씨는 곧 인당(忍堂)의 사자(嗣子)인 감찰공(監察公)의 후예인데, 생원 목사공(牧使公)을 거쳐서 휘 세광(世光)에 이르러 비로소 창녕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여러 대가 연면(連綿)히 이어진 뒤에 또 서로 나누어지는 탄식이 있었으니 묵은공(黙隱公) 휘 수민(守敏)에게 여덟 아들이 있어 어떤 이는 본업(本業;벼슬하는 일)에 힘쓰고 어떤 이는 학문에 종사하여 각기 한 가지 기예(技藝)를 지켜 옛날 등씨(鄧氏)의 가법(家法)과 같이 하였다. 이로부터 문호를 세워 자질들이 마침내 번성하였다.
지금 증손 한종(漢琮)과 제종이 비로소 추모하는 뜻을 붙인 처소를 세우는데 이구동성으로 탄식하고 기둥 넷과 선반 셋으로 제도를 갖추고 이루고서 회산정(檜山亭)이라고 편액(篇額) 했다. 대개 동네 이름에 말미암았으며 앞장서서 회정(檜亭)·회암(檜庵)이란 이름이 있으므로 합하여 표시하도록 붙인 것이다.
이에 일족들이 회합(會合)하여 찬송하고 통곡하던 장소에 자제들이 춘하(春夏)로 수업(受業)하고 송독(誦讀)할 방법을 이루고자 하여 좇아서 얻었다. 그래서 서쪽 제일 추녀에 이름 하여 원모(遠慕)라 했으니 묵은공 이하로 대(代)가 다하여 가묘를 옮겼으며 반드시 여기에 제사 지내야 할 것이며 대대로 의발을 묻은 곳이 혹은 가깝고 혹은 멀어서 1년에 한 번씩 제사지낼 때 만약 비와 눈에 구애받으면 반드시 여기에서 제사지낼 것이니 그 규범을 시작함은 대개 이와 같다.
무릇 일을 하는 방법은 먼저 엉성하게 하다가 나중에 긴밀하게 하고 조잡한데서 정밀한 대로 들어가는 것이 이치의 형세이다. 만약 그 율리(栗里)의 정다운 이야기, 도원(桃園)의 즐거운 일, 위씨(韋氏)의 화수(花樹), 남전(藍田)의 아름다운 기약은 반드시 종론이 정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한종(漢琮)은 힘쓸지어다.
1950년 초봄 상순에 후손 종후(鍾厚)가 삼가 지었다.




회산재상량문(檜山齋上樑文) 편액



회산정(檜山亭) 편액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