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시 진전면 호산마을 인동장씨 호강재 虎岡齋

천부인권 2019. 9. 15. 17:00



2015.11.6. 오서리 호산마을 인동-옥산장씨 호강재(虎岡齋) 전경


진전면 오서리 76-1번지는 인동-옥산장씨(仁同-玉山張氏) 호강재(虎岡齋)가 위치한다. 대문인 경운문(慶雲門)과 재실(齋室)인 호강재(虎岡齋)는 일본식 기와이며 호강재 우측에는 비석 3기가 있으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내용을 살펴보지는 못했다. 호산마을을 지날 때 몇 번 밖에서 사진으로 남겼지만 글로 남길만한 내용을 얻지 못해 항상 컴퓨터에서 잠자는 자료인데 오늘 호강재기 원문과 해문을 옮기면서 기록에 남긴다.
호강재 기문은 포산(苞山) 곽종천(郭鍾千)이 썼는데 고성 서림(西林)에 살던 장석두(張錫斗)공이 이곳 창원시 진전면 호산마을에 이사를 오게 되어 그 후손들이 1965년에 뜻을 모아 호강재를 짓게 되었고 장세인(張世仁)이 기문을 요청하여 기문을 쓴다고 한다.
그 기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2015.11.6. 오서리 호산마을 인동-옥산장씨 호강재(虎岡齋)


[原文]
虎岡齋記
墓之有齋是爲其齋宿修歲時祀事也 祀必其墓前則齋必其墓前固可也 而東俗無族葬父子異壟考妣不同穴力不足 以遂墓爲齋者其來久矣 何不可之育 故玉山張公秋堂諱錫斗 家鐵城之西林 樂善好義鍾德積仁能散財 以得人心 而終墓在 葡萄山壬向原其後 子孫移于 昌原之鎭田其數不多 而皆知勤儉 食力敦厚好禮 有淳古之風 焉一日諸族相告曰 吾族雖小 祖先追墓之地不可 以無其齋所遂幷力齋誠相其地 而圖之不於 葡萄山墓前 而取此虎岡者因 其子孫之所在也 子孫之所在乃祖先之精神 聚且地近於所居 而利於守之至 暇時則會宗 於修睦延賓友 歌詠易得 以行之爾經始 於乙巳之春 不數月工告設旣落 張君世仁請余 爲一言記之余曰 有是哉誠也 誠之所到何事不齋 以若力綿能成事巨 其築室之誠 是墓先之誠 克盡其誠 致其如在則 神其亨如其不誠 而徒備虛禮 則神明豈亨之哉 盖祭主乎嚴敬 不敬則慢 不嚴則褻慢 而褻則無福 不慢不褻則神致 多福垂祿于無疆矣 安知來日之不有大亨乎 祖先積德之蔭至此可驗之矣 有張氏以德 爲家謨世 世守而勿失則吉慶如川方至 斯齋者亦此立境上與虎岩山同其奠安矣 姑書此以劤之


歲丙午陽復月 苞山郭鍾千 記
丁未炎夏 於서울 後孫世烈書
檀紀四三00年(西紀一九六七年)六月


경운문(慶雲門) 정면


[해문]
호강재기 虎岡齋記
묘(墓)가 있으면 재사(齋舍)가 있는데 시향(時享) 때에 재계(齋戒) 유숙(留宿)하면서 제사(祭祀)를 받드는 곳이다. 시향은 반드시 묘 앞에서 지내는 것이므로 재사는 반드시 묘 앞에 있는 것이 옳으나 우리나라의 풍속이 어느 문중 이던지 부자(父子)가 각각 무덤을 달리하고 고편(考騙)¹⁾이 혈(穴)을 달리하여 장례(葬禮)하므로 능력이 부족하여 묘마다 재사를 짓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으니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옛날에 옥산 장공(玉山 張公) 호 추당(秋堂), 휘 석두(錫斗)공이 고성 서림(西林)에 살았는데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 하였으며 덕(德)을 심고 인(仁)을 쌓았으며 재물을 아끼지 않아 인심(人心)을 얻고 돌아가셨다. 묘는 포도산(葡萄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있었는데 그 후손이 창원 진전으로 이사하여 그 수는 많지 않지만 다 검소(儉素)하고 근면(勤勉)할 줄 알고 예를 좋아하기를 두터이 하여 순박(淳朴)한 고인(古人)의 풍운(風韻)²⁾이 있었다.
하루는 여러 종족들이 서로 아뢰기를 우리는 족족은 비록 적지만 선조를 추모할 재사(齋舍)가 없어서는 아니 됨으로 힘을 합하여 재실(齋室)을 짓기로 하자하였다. 드디어 집터를 골라 재실 짓기를 도모(圖謀)하면서 포도산(葡萄山)의 묘 앞에 짓지 않고 호강(虎岡)을 택한 것은 자손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손들이 사는 곳에는 바로 조선(祖先)의 정신이 모이고 또 위치가 가까워 수호(守護)하기에 편리(便利)하여 여가(餘暇)가 있으면 종족이 모여 화목을 닦고 손님과 벗을 맞이하여 글 일고 시 읊기에 용이하다. 을사(乙巳, 1965)년 봄에 경영을 시작하여 몇 달이 안 되어 공사를 마치고 장군(張君) 세인(世仁)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내가 말하기를 이는 정성(精誠)이다. 정성이 이르면은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적은 힘으로 큰 역사(役事)를 이루었으니 재실을 짓는 정성은 祖先을 추모하는 정성이니 정성을 다하여 祖先이 옆에 계시듯이 받들면 신이 흠향(歆饗)³⁾할 것이며 만약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한 갖 허례(虛禮)가 될 것이니 밝은 신이 어찌 흠향하겠는가. 제사(祭祀)는 엄숙(嚴肅)과 공경(恭敬)이 주가 되니 공경하지 않으면 방자(放恣)⁴⁾하고 엄숙하지 않으면 설압(褻狎)⁵⁾하게 되니 방자하고 설압하면 복을 내리지 않을 것이요 방자하지 않고 褻狎하지 않으면 신이 많은 복을 내리고 록(祿)을 드리우는 것이 무궁하리니 어찌 훗날의 큰 형통(亨通)이 있을 것을 모르겠는가. 祖先이 덕을 쌓은 음우(陰佑)⁶⁾가 여기에서 징험(徵驗)⁷⁾하리로다.
오직 장씨(張氏)는 덕(德)을 가문의 법도로 하여 대대로 지켜 가면은 좋은 경사가 냇물처럼 흐를 것이니 이 齋舍에 온 후손들은 호암산(虎岩山)과 함께 우뚝 솟은 묘에서 祭祀를 편안하게 드릴 것이다. 이와 같이 글을 지어주며 충고(忠告)하노라.


병오(丙午, 1966)년 10월에 포산 곽종천(郭鍾千)⁸⁾이 기록한다.
정미(丁未, 1967)년 6월에 서울 후손 세렬(世烈)이 글씨를 쓰다.
단기 4300년(서기 1967) 6월


【주석】
고편(考騙)¹⁾ : 남자조상(考)과 여자조상(騙)을 뜻한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고비각설(考騙各設)(考妣各設)이라 하여 내외분이라도 남자 조상과 여자 조상은 상을 따로 차린다. 그러나 정자(程子)의 제례에 따르면 두 분을 같이 모셔 배향(配享)한다. 주자는 원칙(原則)을 말한 것이요, 정자는 인정(人情)에 바탕을 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자의 제례를 따라 두 분을 같이 합사(合祀)하는 경우가 많다.
풍운(風韻)²⁾ : 풍류와 운치
흠향(歆饗)³⁾ : 신명(神明)이 제물을 받음.
방자(放恣)⁴⁾ : 삼가지 않고 제멋대로 놂
설압(褻狎)⁵⁾ : 버릇없이 굶. 행동이 무례함.
음우(陰佑)⁶⁾ : 남 몰래 도움
징험(徵驗)⁷⁾ : 징조를 경험함.
곽종천(郭鍾千)⁸⁾ : 곽종천(1895~1970)의 자는 내성(乃成),  호는 정헌(靜軒)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살았던 곳은 경남 고성군 효대리(固城郡 孝大里)였다.




경운문(慶雲門) 편액



호강재(虎岡齋) 우측의 비석군



담장 넘어에서 본 호강재(虎岡齋)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