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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토월동 창원황씨 고산재 高山齋

천부인권 2019. 12. 14. 10:59



2019.12.13 창원 토월동 고산재 정면 모습


성산구 토월동 129번지는 비음산의 날개가 봉덕산(鳳德山)을 이룬 곳 남쪽이다. 그 봉덕산 아래 창원황씨 성재(城在) 응견(應堅)를 기리는 고산정(高山亭)이 있다. 현 토월동 고산마을의 재 입향조는 춘욱(春昱)으로 어머니 남평문씨는 1692년에 돌아가셨고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이 고산재(高山齋)는 2002년 7월에 건설하고 기문은 박주댁(朴注宅)이 기록했다. 멋스러운 솟을삼문의 편액은 앙지문(仰止門)으로 하고 본 건물은 고산재(高山齋)라 이름 했다.
고산재(高山齋) 앞에는 『성재창원황공휘응견지유적비(城在昌原黃公諱應堅之遺蹟碑)』와 『고산정봉선사업추진비(高山亭奉先事業推進碑)』가 나란히 서있다. 마당의 우측에는 『고산재중건기(高山齋重建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고산재(高山齋) 뒤쪽에는 『열부증동몽교관조봉대부회산황공성표처령인김녕김씨지려(烈婦贈童蒙敎官朝奉大夫檜山黃公成表妻令人金寧金氏之閭)』라 판석한 정려비가 있다. 아래에는 그 내용들을 옮겨 둔다.




고산재 솟을삼문의 앙지문(仰止門)편액



고산대 앞 세거비와 황응견 유적비




嘉善大夫弘文館提學 城在昌原黃公諱應堅之遺蹟碑
가선대부홍문관제학 성재창원황공휘응견지유적비


공(公)의 휘(諱)는 응견(應堅)이요 자(字)는 응오(應五)이며 호(號)는 성재(城在)로 가선대부홍문관제학(嘉善大夫弘文館提學)이시다. 고려금자광록대부문문하시중휘충준(高麗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諱忠俊)은 창원황씨(昌原黃氏) 시조이시며 휘신(諱信)은 일세조(一世祖)로 고려조경윤정의대부공부상서정토장군(高麗朝京尹正義大夫工部尙書征討將軍)이시다. 기자휘거정(其子諱居正)은 조선조가정대부형조판서개국재명삼등훈(朝鮮朝嘉靖大夫刑曹判書開國在命三等勳)으로 의창군(義昌君)에 봉(封)되시고 증대광보국숭록대부령의정(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이시며 시(諡)는 평장(平莊)이다. 조고(祖考)의 휘는 신중(愼中)이요. 자(字)는 택지(擇之)이며 통사랑영고별검(通仕郎永庫別檢)이시다. 고(考)의 휘(諱)는 변(汴)이시며 자(字)는 운보(雲甫)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이시다. 제학공(提學公)은 국중문무관벌(國中文武官閥)의 후손(後孫)으로 조정(朝廷)의 위업(偉業)에 공(功)이 가전진세(可傳振世)하였으나 호란(胡亂)으로 민심(民心)이 흉흉(凶凶)하고 조야(朝野)가 어지러워 충간(忠諫)이 불낙(不諾)되어 관직(官職)을 사양(辭讓)하고 남하진주(南下晋州)에서 은거중수요(隱居中壽夭)하니 향년삼십일세(享年三十一歲)이시다. 오호(嗚呼)라 독자춘욱(獨子春昱)은 겨우 삼세(三歲)에 자자고자(子子孤子)가 되시고 정부인남평문씨(貞夫人南平文氏)는 얼마나 애통지사(哀痛之事)이리요 사대부지예(士大夫之禮)를 다하여 부군(夫君)의 상(喪)을 치렀다. 연이(然而)나 모자자효(母慈子孝)하여 총명(聰明)과 기상(氣像)이 출상(出象)하여 팔세(八歲)에 이르러 모자상의(母子相議)하니 선세(先世)의 연고지(緣故地)인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가 사람 살만한 곳이라 현사파동고산(現沙巴洞高山)에 복지이사(卜地移徙)하여 자휘춘욱공(子諱春昱公)은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성장하여 이조인묘(李朝仁廟)에 치사통정대부병조참의(致仕通政大夫兵曹參議)에 이르렀다. 비남평문씨(妣南平文氏)는 서기일륙일칠년정사생(西紀一六一七年丁巳生)으로 일륙구이년(一六九二年) 임신(壬申)에 졸(卒)하시니 묘(墓)는 선영국내임좌(先塋局內壬坐)이다. 손(孫)에 삼형제(三兄弟)를 두니 장손(長孫)에 휘순봉(諱舜奉)은 가선대부이조참의(嘉善大夫吏曹參議)이시고 차손휘의봉(次孫諱義奉)이요 계손휘귀봉(季孫諱貴奉)이시다. 석벽영판인희(石碧榮板仁喜)이다. 증손이하번연부진록(曾孫以下繁衍不盡錄)이다. 오호(嗚呼)라 공(公)이 차지(此地)에 이거(移居)한지 어언삼백오십유여(於焉三百五十有餘)에 업적(業績)의 음덕(陰德)으로 후손(後孫)이 흥성(興盛)이나 지우금(至于今)까지 입창선조(入昌先祖)의 유적표식(遺蹟標識)하나 없음은 심(甚)히 수치(羞恥)스러워 차일피일상념(此日彼日想念)해 오던 중금번종원(中今番宗員)의 정성(精誠)이 합치(合致)되어 보덕추모지의(報德追慕之意)로 벌석정민(伐石貞珉)하여 유적비(遺蹟碑)를 근수(謹竪)하니 충효전래(忠孝傳來)의 가문(家門)이라 숭조종목(崇朝宗睦)이 영세불망(永世不忘)하며 천세번영(千世繁榮)하리라.
西紀二千二年 壬午 月日
後孫一同 謹竪
監役 澈煥 潤鈺
十二世孫 珠煥 謹識




高山亭奉先事業推進碑
고산정봉선사업추진비


범종사(凡宗事)는 세대의 문헌(文獻)과 관직연혼(官職連婚)을 구명(究明)하여 혈연(血緣)을 실감(實感)케 하고 동정려(同旌閭)에 친목(親睦)하여 종기발전(宗基發展)에 기여(寄與)한다. 천지만업(千枝萬業)의 자손이 산재(散在)하고 물질문명이 충효(忠孝)의 인륜(人倫)을 땅에 떨어트려 그 뿌리를 망각(忘却)한 사례(事例)가 허다사호(許多思湖)로 범행(犯行)이나 오문숙원(吾門宿願)인 유아호조정랑공휘변제학공휘응수량세선조(維我戶曺正郎公諱汴提學公諱應竪兩世先祖)께서는 당시관아(當時官衙)의 유업(遺業)이 가전세진(可傳世振)이로다. 불연(不然)이라 호변(胡變)으로 유민심(遺民心)이 난마(乱麻)하고 조야석잡(朝野昔雜)하여 폐란지축(廢乱之築)으로 가전 남하진주(南下晋州)하셨는데 명지불숙(命之不淑)으로 양대서거(兩代逝去)하시니 정부인남평문씨(貞夫人南平文氏)의 곤궁지운(困窮之運)이 불항기거이창원고산(不恒其居而昌原高山)이니라. 자여손(子輿孫)이 부진(不振)하여 막도미황(莫道未遑)으로 심묘구이(審墓久而)이나 불호득죄(不獲得罪)하다. 미면목시(未免睦時)이나 기의전시즉제족(其意傳示則諸族)이 찬동(贊同)하여 금위설대수비(今爲設壇竪碑)하고 위계후일기념(爲計後日紀念)으로 대석표식(代石表識)하노라.
西紀一九一七年丁卯七月 日
祭壇碑推進執行委員長 黃龍泰
委員 明煥 武性 珠煥 正均 三均 乙鳳 鐘均 載烒 五道 興善 秀龍 秀均 雨根 外煥




고산재 모습


高山齋重建記
고산재중건기


舊昌原大都護府吐月洞高山(槐山)(구창원대도호부토월동고산(괴산))은 창원황씨세거지(昌原黃氏世居址)이다.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야 오곡(五穀)이 풍요(豐饒)롭고 인정(人情)이 넘쳐 남도(南道)의 명승지(名勝地)로 칭(稱)하였다.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 산업화시대(産業化時代)로 개발(開發)되면서 창원시(昌原市)로 승격(昇格)되어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심역할(中心役割)을 하는 도청소재지(道廳所在地)로써 비약적(飛躍的)인 발전(發展)에 국내유일(國內唯一)의 공업(工業)요람 도시(都市)로 변모하니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感)을 준다. 창원시청동역진례산성서하인근양지(昌原市廳東域進禮山城西下隣近陽地)바른 봉덕산(鳳德山)은 창원황씨고산문중(昌原黃氏高山門中)의 선영산(先塋山)이다. 무릇 종사(宗事)는 효(孝)에 바탕하며 위선(爲先)함이요 종족간(宗族間)에 화목(和睦)하며 상부상조(相扶相助)로 발전(發展)함이다. 십세조휘변(十世祖諱汴)은 호조정랑(戶曹正郎)이요 기자휘응견(其子諱應堅)은 가선대부홍문관제학(嘉善大夫弘文館提學)이시다. 량공(兩公)이 조정의 위업(偉業)에 공(公)이 가전진세(可傳振世)하였으나 불행(不幸)이도 호란(胡亂)으로 민심(民心)이 흉흉(凶凶)하고 조야(朝野)가 어지러워 충간(忠諫)이 불낙(不諾)되어 관직(官職)을 사양(辭讓)하고 충간(忠諫)이 불납(不納)되어 관직(官職)을 사양(辭讓)하고 남하진주(南下晋州)에서 은거중수요수(隱居中壽夭壽)를 다하지 못하고도 서거(逝去)하니 貞夫人南平文氏는 예(禮)에 맞게 상(喪)을 치루니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칭송(稱訟)이 자자(藉藉)하다. 생계(生計)가 쇠진(衰盡)하여 선세(先世)의 연고지(緣故地)인 창원고산(昌原高山)에 이사세거(移徙世居)하니 어언삼백오십유여(於焉三百五十有餘)이다. 다행(多幸)이도 후손(後孫)이 번연(繁衍)하여 정랑제학량공(正郎提學兩公)에 대(對)한 추원지성(追遠之誠)으로 고산재(高山齋)를 건립조두(建立俎豆)응 마련 매년추향(每年秋享)하고 있으나 세구년심(歲久年深)하니 노후(老朽)로 기훼지경(杞毁之境)이라 종회(宗會)에 부의(附議)한바 중건(重建)키로 결의(決意)하고 재정(財政)은 도시계획(都市計劃)에 편입(編入)된 종토(宗土)의 보상금(補償金)을 주로하고 종원(宗員)의 성표금(誠表金)을 충당(充當)하여 동량주연(棟樑柱椽)을 구재(求材)하여 경영일년(經營一年)에 준공(竣工)을 보니 이에 후손(後孫) 주환(珠煥), 철환(澈煥), 윤옥보(潤鈺甫)가 휴초장방여청기(携草狀訪余請記)한데 천학비재(淺學菲才)라 사양(辭讓)이 마땅하나 평소정분(平素情分)을 절념(切念)하니 고사(固辭)치 못함이라 봉덕산선영하(鳳德山先塋下)에 고산재(高山齋)가 외외(巍巍)하여 사간고첨(四間高詹)이 웅자휘기(雄姿翬跂)하니 후손(後孫)들의 기상(氣像)이로다. 뿌리 없는 가지 없고 선조(先祖)없는 후손(後孫) 없다. 위선추원면려(爲先追遠勉勵)하며 만세(萬世)에 누리라.
西紀二千二年壬午 月日
密城 朴注宅 謹撰




고산재 편액



고산재 주련


軒窺大海朝宗  軒에서는 大海朝宗을 보고
戶納高山仰止  戶에는 高山仰止를 들였네
村閭百世同居  마을에서 백세토록 함께 살았으며
姓貫千年古閥  관향은 천년토록 오랜 벌열일세.
敬祖睦族遺德  조상을 공경하고 종족과 화목하게 지내는 덕을 남겼네.


*大海朝宗 : 물이 모여들어 대해를 이룬 것인데, 여기서는 종족이 많이 번성한 것을 말한다.

*高山仰止 :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길을 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였는데,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