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30. 진동면 동전리 묵지마을 선파이씨 도산재
진동면 동전리 212번지에 위치한 선파이씨(璿派李氏) 도산재(道山齋)는 묵지(墨池)마을 깊숙한 안쪽에 도로를 마주하고 있다. 묵지길을 따라 마을로 진입하면 마을 입구에 도열한 서어나무 노거수 군락을 거쳐 마을의 중심부로 생활공동체 공간인 묵지마을회관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예인 이종은(李棕隱)을 모신 도산재(道山齋)를 마주하게 된다.
도산재는 출입문 좌우로 흙돌담장이 도산재 영역을 빙 둘러 쌓았고 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돌협문을 만들어 ‘효부밀양박씨창적비(孝婦密陽朴氏彰蹟碑)’를 세웠다. 물론 도로에서 효부비로 들어가는 철창살문도 마련해 두고 있으며 담장 밖에서 비(碑)를 볼 수 있다.
대문 안쪽에는 계단 위에 솟을삼문인 ‘유사문(由斯門)’이 있고 유사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도산재(道山齋)가 있다. 도산재 마당을 두고 좌우에는 현대식 관리사가 좌측에 있고 우측에는 옛 관리사로 쓰였을법한 건물과 화장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도산재의 뒤편에는 묘분(墓墳)이 있고 묘 앞에 ‘공인남양홍씨부(恭人南陽洪氏祔) 통선랑전주이공휘창령지단(通善郎全州李公諱彰齡之壇)’이 세워져 있다.
효부밀양박씨창적비(孝婦密陽朴氏彰蹟碑)와 도산재
동쪽 측면에서 본 도산재(道山齋)
2019.10.30 대문인 유사문
유사문(由斯門) 편액
솟을삼문에 편액한 ‘유사문(由斯門)’의 유사(由斯)는 <논어 옹야편 15장>에서 따온 글귀 ‘누가 집 밖에 나갈 때 문을 거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거늘 어찌하여 살아가는데 이 도를 따르지 않겠는가? [誰能出不由戶리오마는 何莫由斯道也오]’에서 ‘유 (由)’, ‘사(斯)’를 취한 것이다.
도산재 전경
도산재의 관리인을 만나지 못해 내부에 걸린 편액 등은 보지 못했다. 쪽지를 남겨 두었는데 연락이 없다. 아래에는 권용현(權龍鉉;1899~1988)¹⁾이 지은 도산재기를 옮겨 둔다.
【주석】
권용현(權龍鉉;1899~1988)¹⁾ : 권용현은 합천 초계 유하리에서 1899년에 만송공(晩松公) 재직(載直)과 초계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송공이 꿈에 용을 본 상서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용현’이라 지었다. 호는 추연(秋淵)이고 관향은 화산권씨(花山權氏)라고 한다. 1990年에 간행(刊行)된 추연문집(秋淵文集) 45卷15冊이 있다.
1979년 산청에서 중재의 장례식이 있은 후 10년 만인 1988년에 강우지역에서 시행한 유월장(踰月葬)이었다. 유월장은 죽은 달을 넘겨서 다음 달에 치르는 장사(葬事)로 전통사회 유가(儒家)에서 행하여졌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평생 우리 전통을 지켜온 선비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던 것이다.
합천에는 태암산 동쪽에 위치한 태동서사(泰東書舍)를 태동서원(泰東書院)으로 2012년 4월15일에 준공하였고, 태동서원은 경남 합천군 초계면 유하리에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1899-1988)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뜻을 모아 창건했다.
화산 권평현의 글씨 도산재 편액
2019.12.19 진동 묵지 도산재 道山齋 기문 記文
道山齋記
舊戊陵縣之匡廬山下 有曰東田洞者谷邃而幽可隱 而居璿派李氏主居之 李氏孝寧大君之裔 中世有郊波資 師金沙溪先生 有文行至 肅廟年間有諱棕隱居於 此不求名利 躬孝友睦婣任恤之行 嘗曰人不學不知道 道無以爲人 築東田書塾 以訓誨後進爲己 任人感其德服其義稻之 以東田處士久 而楢誦慕之 其葬在里之傍道 德谷以子 姓貧弱久未有丙舍 其九世孫秀榮 始倡於宗而竭 力經紀之 築數楹之屋於其下 因其地而扁曰道山 旣成奉公之狀 而徵余以記 其齋余按其蹟而 又有感於道山之名也 乃演而爲之言曰 夫所謂道者非高遠玄妙之之謂也 只在乎彛倫日用之 常而修之 而爲君子悖之 而爲小人壤之 而爲夷狄禽獸者 莫不在是 祖先之所 以貽謀於後 子孫之所 以追慕於先者 亦惟是道爲而以矣 公之平日修於己敎於人 而憂其不知而無以人者 惟在於是則其貽謀之正 有如是矣 故子孫能世守 勿贊雖當彛倫敗壤之 日能知述先之義拔 孤貧之力 而刱堂構之業者 非有見於 是能然乎 是則山之名 殆若有待 而相符者 而後之欲嗣守而無忝者 亦當因其名 而思公之遺訓 益務於學而知道 則斯其爲公之肖孫 而無愧於名齋之意也 公嘗愛墨池谷林壑之美欲卜僦 而未果後孫乃公志 而徙居焉 亦可見繼述之端云
乙亥秋花山權龍鉉記
도산재(道山齋)
옛 무릉현 광려산 아래 동전동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골이 깊고 그윽하여 가히 은거하여 살만하고 선파이씨(璿派李氏)들이 주로 살았다. 이씨(李氏)는 효령대군(孝寧大君) 후예로 중세에 교촌(郊村)이란 분이 계셨는데 사계(沙溪) 김장생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문행(文行)이 있었다. 숙종(肅宗) 년간에 휘 종은(棕隱)이 이곳에 살면서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효우(孝友)하고 인척간에 화목하고 벗에게 신의가 있고 남을 도우는 선행이 있었다. 일찍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배우지 아니하면 도를 알지 못하고 도가 없으면 어찌 사람이 되랴하였다. 동전(東田)에 글방을 짓고 후진을 몸소 가르치니 사람들은 그 덕의(德義)에 감복하였고 동전처사로써 오래도록 칭송하며 사모하였다. 그의 장사(葬事)된 곳은 마을 길가이다. 덕곡(德谷)에 사는 자손들은 빈약하여 병사(丙舍:묘각)을 두지 못함이 오래되었다. 그의 9세손 수영(秀榮)이가 처음 종중에 의견을 제창하고 힘을 다하여 터를 닦고 몇 칸의 재실을 광려산 아래에 세웠다. 그 터에 인하여 편액을 도산(道山)이라 하였다. 이미 낙성을 하고 공의 행장을 받들고 나에게 그 재실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이 행적을 살펴보고 또 도산(道山)의 이름에 느낌이 있었다. 이어 와 닿는 느낌을 말해두나니 소위 도(道)란 것은 높고 멀지도 않고 심오하다 이르느니라. 다만 떳떳한 윤리가 있음이요. 나날이 행하여도 떳떳하니 닦은 자는 군자가 되고 거역하는 자는 소인이 되고 무너뜨리면 오랑캐 금수가 되느니라. 조선(祖先)께서 소위 후손에게 계책을 끼쳤고 자손은 소이 선조를 추모하는 것은 이는 도(道)가 있는 것이다. 역시 이것이 도(道)가 될 뿐 이니라. 공(公)은 평소에 자기 몸을 닦고 사람을 가르쳤다. 그것을 알지 못하여 사람답지 못함을 걱정함이 있었음인즉 그 끼친 계책은 이와 같이 정확하였음이라 그런고로 자손들은 대대로 지키며 폐하지 안했다. 비록 떳떳한 윤리가 폐하고 무너진 때를 당하여도 능히 조선(祖先)의 의(義)를 발췌하여 폄에 홀로 가난의 힘으로 재실을 창건하는 것은 물려 내린 계책을 능히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곧 산(山)의 이름에 처음부터 기다렸다가 서로 부합된 것이니 뒤로 후손들이 지키고자함에 더럽힘이 없는 것이요 역시 그 산명(山名)에 인하여 공의 유훈을 생각하고 배움에 더욱 힘써 도(道)를 알았으니 곧 그것은 공(公)의 초손(肖孫)이 되어 부끄러움 없는 도산명(道山名)의 재실의 뜻이니라. 일찍 묵지곡(墨池谷)의 숲 골짝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이거하고자 점쳤으나 수행하지 못하고 후손들이 공(公)의 뜻을 이어 이사하여 살았음이니 역시 선인의 업을 정확히 이었다 이르겠네.
을해년(1935) 화산 권용현(權龍鉉) 짓다.
도산재 뒤쪽의 남양홍씨와 이창령공의 합묘와 비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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