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구산면 옥계리 신촌마을 김녕김씨 금봉재 金峰齋

천부인권 2020. 2. 2. 21:55

 

 

 

2020.02.02. 구산면 옥계리 신촌마을 금봉재 전경

 

아들이 심심해하여 구산면 바닷가를 구경할 겸 구산면의 재실을 탐방하기로 했다. 오늘 찾아본 금봉재(金峰齋)는 구산면 옥계리 844번지에 위치하며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4M로 표하고 「위도 35°05′45″N 경도 128°35′09″E」라 알려 준다.
김녕김씨(金寧金氏)의 금봉재(金峰齋)는 정확한 위치만 모를 뿐 기문(記文)까지 대략 읽어본 상태로 출발했다. 내포리를 둘러 나오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이 있어 무작정 구산면 신촌마을로 차를 몰았다. 마을 입구에서 먼발치로 보니 재실의 모습이라 짐작되는 한 집이 눈에 들어와 무작정 그 쪽으로 가다가 마을 주민을 만나 물으니 생각했던 바대로 재실이라 한다. 골목길에서 보니 관리는 잘하는 편으로 확인되나 문이 열려 있는지가 궁금했다. 다행이 대문도 열려 있고 금봉재(金峰齋)도 열려 있어 사진으로 남겼다.
대문은 추원문(追遠門)이라 편액 했고, 재실은 금봉재(金峰齋)라 했으며, 마루에는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이 찬한 금봉재기(金峰齋記)가 걸려 있고, 10대손 기권(箕權) 봉권(鳳權)이 기록한 금봉재실기(金峰齋實記)도 함께 있다.

 

 

 

 

2020.02.02. 구산면 옥계리 금봉재(金峰齋)의 대문인 추원문(追遠門) 편액

 

 

 

2020.02.02. 구산면 옥계리

금봉재(金峰齋)

 

 

 

2020.02.02. 구산면 옥계리

금봉재(金峰齋) 편액

 

 

 


金峰齋記
古檜山府之西龜山面新村金柱山之陽 有穹然五楹之築者曰 金峰齋齋下有門欄鱗 接以孝友詩禮相傳勿替者 乃金寧金氏世居之庄 而庚申春胄孫箕權 與族溶甲溶在洪權 抱世譜在訪余于 金州之鳳陽山房託 以記實之文遂不辭 爲之述金氏 卽忠毅公白村先生之裔 而先生六代孫 士人諱麗秋 自密州之武安板谷移于 昌原內西面上谷 而士人公肖子諱重億 始奠居于玆土 迄今爲三百年之曠遠 而諸後孫合議 鳩財追慕士人公父子 肯構者也 竊惟忠毅公之貞 忠大節棟樑乎 宇宙昭揭乎 萬世而慘禍之餘 久不蒙丹書之洗 故後孫之滄 桑樓屑不遑厥居勢所然矣 一自王章已正爵諡崇報之曲 無復遺憾 而裔姓之克昌丕奕 則金氏今日之擧 而可不思報本哉 目不西湖日驅丸 於追先敦宗之事親 若先天物色早夜役役 惟謀利爭功而已 則是忘其本也 忘其本而未能有成者未之見也 金氏不贍之力克竣巨役 以達追遠之誠 則可謂賢且孝矣 自是益思其躬之所 由生丸歲時齋宿之際 花樹團聚之會 孝悌之心 敦睦之情 不覺油然 而生盖忠毅公之 道學節義 士人公之漑根錫蔭實 爲後孫之蓍龜箕氊 則敢不 以祖先均視之心 爲心聿修厥德 紹賢祖之懿謀 貽後孫之嘉猷乎 夫如是則斯齋也 如金山龜海 不崩不渴 將鞏固乎 千秋而金氏之門 亦安可不昌大乎 是爲記
歲庚申淸明 全州 李雨燮 記

 

금봉재기(金峰齋記)
옛 회산부 서쪽 구산면 신촌 금주산(金柱山) 양지쪽에 5칸의 집을 지어 하늘에 솟아 있는 것은 금봉재라 하고 재실 아래에는 난인(欄鱗)문이 있어 효도하고 우애하고 시(詩)와 예(禮)를 접하고 서로 전함을 바꾸지 않고 김녕김씨들이 대대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경신년 봄 종손 기권은 일족 용갑 용재 홍권과 더불어 족보를 안고 김해 봉양산방(鳳陽山房)에 사는 나를 두 번이나 찾아와 기문을 부탁했는데 사양하지 못했다. 김씨들은 즉 충의공 백촌선생의 후예로 선생의 6대손 선비의 이름이 여추(麗秋)께서 밀양의 무안판곡(武安板谷)으로부터 창원 내서면 상곡(上谷)으로 이거했고 사인공(士人公) 아들의 이름 중억(重億)이 처음 이 땅에 살기를 정했다. 지금으로부터 멀리 삼백년에 이르렀고 후손들은 합의하여 재산을 모으고 사인공(士人公) 부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즐거이 집을 지었음이라. 생각건대 오로지 충의공의 곧은 충절과 절개는 우주의 대들보로 만세에 높게 걸려 졌고 참화가 오래된 나머지 단서(丹書)로 씻음을 입지 못한 고로 상전벽해를 겪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느라 겨를이 없었다. 한번 왕장(王章;임금의 글)으로부터 벼슬과 시호를 이미 하사받아 큰 은전을 입었으나 보은하지 못하여 유감(遺憾)이었다. 후손들은 극히 성하고 넓게 컸음은 즉 김씨들이 오늘의 거사는 가히 선조에 보본하는 생각이 아니랴! 눈 아래에는 서양의 물결이 나날이 몰아 닥치는데 뭇 선조를 숭묘 하고 종사를 돈독히 하는 것은 선천적임을 보임과 같고 물색에 밤낮 골몰하며 오직 이 이(利)를 꾀하고 공(功)만 다투기를 하면 곧 근본을 잊을 것이요 근본을 잊는다면 능히 이루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김씨들은 넉넉지 않는데도 힘을 다하여 거역을 마쳤음은 추원의 정성이 다다랐으니 즉 가히 현명하고 또 효도했다 이를 만하다. 이로부터 그 몸이 태어난 바를 더욱 생각할 것이고 세시에 재계하고 묵은 끝에 친족끼리 모이면 효제의 마음과 돈목한 정은 생각하지 아니해도 구름일 듯 일어날 것이니 대체 충의공의 도학절의와 사인공의 뻗은 뿌리와 큰 음덕이라고 후손들은 점쳤다. 선조의 가업과 문물을 계승함인 즉 어찌 선조께서 두루 마음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선조의 그 덕을 이어 닦은 마음이요 현명하신 선조의 아름다운 계책을 잇고 후손에게 끼치니 아름다움 더하네 이와 같음인즉 이 재실은 금주산과 구산바다와 같이 무너지지 않고 마르지도 않고 천추(千秋)에 김씨 집안은 견고할 것이니 또 어찌 창대하지 아니하랴 이를 기록하노라.
경신년 청명절 전주 이우섭 기록함.

 

 

 

 


金峰齋實記
吾金之居龜山新村者 皆忠毅公白村先生之裔也 後有金柱山拱護焉 前有蓮花峰橫帶焉境幽地 僻宜隱者之可居 而我十代祖 府君諱麗秋 自密陽之武安板谷移于 昌原上谷 而迨其長胤諱重億 始卜于玆里者 距今己三百年之久 生齒益蕃門戶漸闢而尙無 爲二府君禹慕之所 每與宗族提議事巨力 綿然乃後孫之期 願未嘗一日 而忘經營也 何幸去歲春 宗論竣發構五楹之齋 稍備齊宿合 族迎賓講學之所 而此莫非 府君貽謨蔭佑之所賴 則敢不思報遠之道 而勉孝睦繼述之方乎 顔曰金峰齋 門曰追遠者 李友華齋雨燮所錫也 恭惟我十六代祖 白村先生 以文武顯官德被 生民功存社稷 而直非常之變 辦大節樹風聲 爲東方百世尸祝 然後孫之沈 晦不振由丹書之未洗 而屈伸興亡盖亦天也 萬派始於一源 千枝本於一根 則祖孫氣脈雖 千載之下 而流通無隔矣 彼桑梓之秀 先人之手澤也 某山某竌 先人之遊跡也 若堂若斧 先人體魄之藏也 可不瞻慕守省無忝厥祖乎 歲祀焉處薦宗族焉 敦睦敎子焉 詩禮式世勿替 是乃府君之所 望於後人者而無愧 爲白村先生之遺裔也 遂叙之如右願與宗族共勖焉
歲庚申暮春
十代孫箕權鳳權謹識
十代孫    中權謹書

 

금봉재실기(金峰齋實記)
우리 김씨로 구산(龜山) 신촌(新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충의공(忠毅公) 백촌선생(白村先生)의 후손들이다. 뒤로는 금주산(金柱山)이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연화봉(蓮花峰)이 가로 서서 안아주니 경치가 그윽한 곳으로 은거하는 사람이 살기에 마땅한 곳이다. 나의 10대조 부군 휘 여추(麗秋)께서 밀양(密陽) 무안(武安) 판곡(板谷)에서 창원(昌原) 상곡(上谷)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그 장자인 휘 중억(重億)에 이르러 비로소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부터 거의 300여년 전이다. 그 후손들이 갈수록 번성하고 문호가 점차 활달해졌지만 오히려 두 부군(府君)을 추모할 장소가 없어 매번 종중이 모여 의논을 하였지만 일이 너무 커서 해마다 기약만 하였지만 하루도 경영할 것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다행이 작년 봄에 종중의 의논이 발의되어 5기둥 4칸의 재실을 지어 제숙하고 종중이 모이고 손님을 맞이하고 강학하는 장소로 준비하게 되었다. 이것이 부군께서 후손들을 위하여 계획하고 남기신 음덕의 도움이 아님이 없으니 보본의 도를 생각하지 않으며 효도하고 돈목하고 선조의 업을 계승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줄 방도에 힘쓰지 않겠는가. 편액을 금봉재(金峰齋)라하고 문을 추원(追遠)이라고 한 것은 벗인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이 쓴 것이다. 생각건대 나의 16대조 백촌선생(白村先生)은 문무(文武)로 벼슬에 올랐고 임금의 덕을 입었으며 백성들을 살린 공으로 사직에 올랐으니 진정 비상한 변화 때 큰 절의를 일으켜 기풍과 명성을 세웠으며 우리나라에 영원히 제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난 후손들이 침체되어 떨치지 못하니 단서(丹書)의 비석도 씻지 못하였으니 굽히고 펼쳐지고 흥하고 망하는 것도 대개 또한 하늘의 일인 것이다. 온 자종이 모두 한 근원에서 비롯되고 천 가지가 한 뿌리에 근본하니 조상과 후손의 기맥이 비록 천년 아래라도 서로 통하여 간격이 없다. 저 무덤이 우뚝함은 선인들의 은택이 빛나는 것이다. 어느 산 어느 언덕 또한 선인들께서 노닐던 자취이다. 또한 재실을 짓고 사당을 세우는 것도 선인들의 혼백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그러니 우러러 사모하고 그 집과 무덤을 지키고 살피며 그 선조를 욕되게 함이 없을 것이리라. 이에 해마다 제사를 드리고 천신을 하며 종족을 화목하게 하고 자손들을 가르치며 시와 예를 대대로 법식으로 삼아 어긋남이 없으면 이것이 곧 부군쎄서 후세들에게 바라는 바에 백촌선생의 후손으로써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드디어 이와같이 그 전말을 서술하니 여러 종중들과 함께 힘쓸 것이다. 
경신(庚申)년 3월
10대손 기권(箕權) 봉권(鳳權)이 삼가 짓다.
10대손 중권(中權)이 삼가 쓰다.

 

 

 

 

주련[해문-전문]
奐然棟宇桑梓坊  환한 집이 뽕나무 가래나무에 있고
四時霜露增感愴  네 계절 서리와 이슬에 더욱 슬픔 사무치네.
一源孝水流不渴  하나의 근원인 孝水는 흘러 마르지 않고
合族肄經迎嘉賓  종족 모여 경서 익히며 가객을 맞이하네.
于以誠虔永無忝  이에 정성스럽고 경건하여 영원히 욕됨이 없도록 하라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