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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도태마을 창원구씨 중시조 구복한 비명

천부인권 2020. 3. 4. 15:30



2020.2.26. 북면 내곡리 도태마을 구복한 묘


북면 내곡리 산 129번지에는 창원구씨 중시조인 구복한공의 묘소와 비갈이 서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18m이고 「위도 35°21′06″N 경도 128°34′17″E」를 기록한다. 묘소 입구에는 구복한공을 배향하는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구복한묘갈명具復漢墓碣銘은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이 기록했다. 아래에는 묘지의 비명을 옮겨 둔다.




구복한 비갈과 묘소




嘉善大夫行全羅兵馬節度使具復漢墓碣銘
不佞璘嘗聞 郡北乃谷之原 有封向丙 曰故全羅兵馬節度使仇公之藏也 皇明正德十年表題云 日後孫麟元 以狀來 屬余爲銘曰 吾祖而尙闕顯刻 子孫之不肖也 惟是之懼 敢以請時余在憂服中 無以泚筆 續因其子然入之踵至 遂按狀而復之 公諱復漢 字象伯 具氏本姓 仇氏昌原人 正廟朝改錫今姓 高麗勳臣贊成事義昌君成吉 其上祖也 子喜亦贊成事 累傳歷生員雪 有曰宗吉我 世宗壬寅 中庭試 官至直提學 號川谷 卽公之考也 妣淑夫人星山李氏恬女 公性正直方嚴 才器夙就 官忠淸都事 江界府使 湖南兵馬節度使 江界有去思碑 此盖公之履歷大槪 而餘無可稽 生卒亦未詳 在子孫 殊爲可恨耳 然公當國初擧賢進能之日 始仕陞五品 從而莅邑制閫 遺愛在人 抑可以槩其蘊也 公嘗居乃谷之上里 居人名之曰 都事址 崔相國閏德遺墟 亦在其南 到于今竝稱之 配淑夫人昌寧卞氏璋女葬祔 公有子五人 男碩從義城訓導 理從 順從 俱進士 末從 女適黃自華 孫男有溫進士 有良 有恭 有儉 有績 英達 英春 安文 成敬 善達通政 哲達進士 豊善 餘不錄銘曰
若稽昌辰 則哲官人 公時膺選 珪組來纏 片石堪言 西民頌仁 百體雖虧 足辨肘跟 母或躪蹂 時維大夫之阡
己卯穀雨節 立
金柄璘 撰


가선대부행전라병마절도사구복한묘갈명
내가 일찍이 들으니 군 북쪽의 내곡乃谷 병향丙向에 봉분封墳이 있는데 옛날 전라병마절도사 구공의 장리藏履라고 하였다. 황명정덕皇明正德 18년 표제表題에 이르기를 후손 인원麟元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碑銘을 부탁하였다. “나의 선조의 무덤에 비명이 없으니 이는 자손이 불초한 탓입니다. 이제 글을 남겨 후세에 징험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병으로 몸이 좋지 않고 아름다운 문장도 잘 쓰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연팔然八까지 연이어 와서 부탁하였다. 이에 드디어 그 행장을 살펴보고 글을 쓰게 되었다. 공의 휘는 복한復漢이며 자는 상백象伯이다. 구씨仇氏는 창원인이다. 정조대왕 때 현재의 성인 구具씨를 하사하였다. 고려 훈신인 찬성사贊成事 의창군義昌君 성길成吉이 그 윗대 조상이다. 그 아들 喜 역시 찬성사贊成事이다. 여러 대를 전하여 생원 雪 그리고 종길宗吉이 있다. 조선 세종 임인년에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관직이 直提學에 이르렀는데 호를 천곡川谷이라 하니 공의 고考이시다. 비妣는 숙부인 성산 이씨 념恬의 딸이시다. 공의 성품은 정직하고 방엄方嚴하며 재능과 기량이 일찍이 다듬어졌다. 관직은 충청도사, 강계부사, 호남병마절도사 등을 거치셨는데 강계江界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이것이 공의 이력의 대략인데 다른 것은 계고稽考할 수 없다. 생졸연대 역시 미상이며 자손들만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공이 일찍이 조선 초기에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쓸 때 정오품의 벼슬로 관직에 올랐다.  이어서 바로 고을의 수령을 맡아 백성들을 아끼어 거사비去思碑를 사람들이 남기게 되었으니 그 온축된 대략을 알 수 있다. 공은 일찍이 내곡의 상리에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도사都事 집터라고 일컬었는데 상국 최윤덕의 유허이다. 또한 그 남쪽도 지금까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배(配)는 숙부인 창녕 변씨卞氏 장璋의 따님인데 합부하였다. 공의 자녀는 다섯인데 석종碩從은 의성훈도이며, 理從. 順從은 모두 진사이며 末從이 있다.  그리고 딸은 황자화黃自華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유홍(有泓)은 진사이며 유량, 유공, 유검, 유적,  영달, 영춘, 안문, 성경, 선달(通政), 철달(進士), 풍선 등이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왈 若稽昌辰, 卽哲官人, 公時膺選, 珪組來纏, 片石堪言, 西民頌仁, 百體雖虧, 足辨肘踉, 無或躪蹂 是維大夫之阡
나라가 창성할 시대에는  관직에 사람을 밝게 뽑아 쓰는데 공은 이 때 천거를 받아 벼슬을 하시게 되었다. 비석에 몇 마디 말을 남기지만 이미 강계의 백성들이 그 어짊을 칭송하였다. 모든 행적을 다 기록하지는 못하지만 그 삶의 대개는 족히 판단할 수 있으니 그로 인하여 짓밟히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곳이 바로 대부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기묘곡우절 립
김병린金柄璘 찬하다.
번역 박태성




구복한 공 비 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