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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세병관 내 두룡포기사비 頭龍浦記事碑

천부인권 2020. 2. 16. 06:50



2010.11.29. 세병관 내 두룡포기사비 전경


아마도 한창 문화재를 찾으려 다닐 때 통영의 문화재를 보기 위해 갔을 것으로 생각 된다. 거의 20년이 흘러 이 사진을 보니 삶이란 눈 깜짝하는 사이에 흘러갔나 보다. 아래에는 통영시지의 내용을 옮겼다. 공부를 하는 것은 먼저 시작한 사람의 오류를 거치지 않고 배우기 위함인데 이때만 해도 잊어야 할 것이 많다보니 무작정 현지를 돌아 다녔던 것 같다. 사람이 여행을 통하여 마음이 커지는 것은 잊을 것을 잘 정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12호
지정일자 : 1974. 12. 28.
소 재 지 : 통영시 문화동 62(세병관 경내)
제    원 : 높이  215㎝,  폭 90㎝  


 세병관 경내 수항루 뒷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는 두룡포 기사비는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우리 고장(당시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치적(治積)이 새겨진 통영의 뿌리를 밝히는 사적비(事蹟碑)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3년(1625) 제19대 구인후(具仁垕) 통제사가 세웠는데, 당시 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 박홍미(朴弘美)가 지은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통제사 이경준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혜안(慧眼)과 업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통제영 남문 밖 바닷가 큰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무 8년(1904) 이곳 사람인 이학재(李鶴在) 이승주(李承周) 두 사람이 세병관 앞뜰에 옮겨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귀부(龜趺)가 없어진 듯하며 비신(碑身)의 아랫부분을 땅에 묻어 오랫동안 비문의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다. 1996년 4월 12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비각을 짓고 하대를 새로 만들어 옮겨 세움으로써 1세기 만에 비신의 하부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수(螭首)는 운문(雲紋) 위에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으로 조형미가 특히 뛰어나다.






頭龍浦記事碑

頭龍浦之設鎭非古也。萬曆中。故統制使李公慶濬之所建。公旣有惠澤在於人。又設鎭要害。爲萬世之利。人安其利思其德。咸欲石以記其蹟。以壽其傳。訴於今統制具公。於公曾爲幕佐。受知最深。亦思其澤。樂聞而成其美。命余爲之記。嚴不敢以不文辭。紀其梗槩如左。公故宰相某之子。韓山牧隱公之後也。氏族之盛。世德之茂。載在國乘。銘在墓道。卽於是碑。斯可略矣。公兄弟四人。聯璧共顯。其一卽今知事慶涵。宿德重望。爲當今第一。其一故佐郞慶流。壬辰之亂。死於國事。不克展其才蘊。其一卽今少尹慶滉。雖不由科第以進。而醇謹奉職。累遷中外官。有能名。公雖以武藝發身。博通書史。敦說詩禮。雍容有古儒將風。故所至輒有聲。再鎭關西。再鎭海西。一師湖右。兵民愛之若父母。畏之如神明。封疆帖然無事。盖其仁威方略有大過人者。是以朝廷重焉。委以鎖鑰。再爲統制。統制之職。兼領三道。控扼嶺海。位尊任重。閫外之寄。無出其右。故非當世極選。不能居是職焉。然統制之設。亦非古也。粤在壬辰。李公舜臣以海上偏師。克摧大敵。使不得水陸並進。爲中興第一功。朝廷無官以賞之。且不卑重權。無以憚壓羣帥。捍禦東南。故特置統制以官之。其營始在閑山。卽偏於右而遠於左。中移固城。卽宜於藏船而不便於應卒。相繼爲帥者。狃於姑息。莫能改置。及公爲帥。慨然以爲己任。相度地形。移鎭于頭龍。西依握浦。東控見梁。南通大洋。北連平陸。深而不奧。淺而不露。眞水陸之形便。關防之要害。自東而南而西之賊。不得過此而橫行。海波不驚者。殆將數十年矣。昔祖逖移鎭譙城。而後趙不敢近。庾翼徙治沔口。而北虜不敢窺。地利之險。雖天所設。必待人而後得所焉。自古及今。其揆一也。今夫頭龍未得其人。卽一海港瀉鹵之地。荒榛狐兔之墟而已。歷幾千萬年。閱幾千百人。而始成之於公之手。天之設是險以待時又待人。豈偶然哉。忠武克敵於前。以收中興之績。公設鎭於後。以爲萬世之利。前後二李之出。雖謂之應時可也。而獨公之迹。幾乎泯沒而無傳。豈無賢子孫能業其家者歟。噫。頭龍之險。得公而爲關防之地。公之功與德。又得具公而有峴之傳。則不惟地之待人。人亦待人。亦豈偶然哉。具公名錄靖社二等之勳 戚重臣來守是鎭而其功名事蹟 公方在鎭 又幹是事故不敢 有所稱頌以俟來者云
通訓大夫 昌原大都護府使 朴弘美 撰
禦侮將軍 行訓 
天啓五年三月 日
高宗甲辰本郡人 李鶴在 自浦邊 移立於洗兵館廣場


두룡포기사비 頭龍浦記事碑 
 두룡포(頭龍浦)에 진영(陣營)을 설치한 때는 오래되지 않았다. 선조 때(1604년)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제6대 통제사 : 1603년-1605년 재임)이 세웠다. 그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또 요충지에 진영을 설치하여 만세토록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로움을 잊지 않고 그 덕을 생각하여 돌에 그의 업적을 기록하여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통제사 구공(具公)(具仁후 : 제19대(1623-1625), 제25대(1633-1633) 통제사)에게 하소연하였다. 구공(具公)은 일찍이 공(公)의 보좌관으로 있을 때 공에게 크게 신임을 받았던 적이 있어 또한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그 기록을 빛내고자 나에게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 그 대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公)은 옛날 정승을 지냈던 증(增)의 아들이며 한산 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가문의 흥성함과 세상에 전해진 덕의 무성함은 나라의 역사에 새겨져 있고, 묘비(墓碑)에도 새겨져 있으므로 이 비문(碑文)에서는 생략한다. 공(公)의 형제는 네 분인데 함께 나란히 세상에 드러났다. 첫째는 현재 지사(知事)인 경함(慶涵)이니 쌓은 덕과 높은 명성이 당대의 제일이다. 세째는 좌랑(佐郞)을 지낸 경류(慶流)인데 임진란(壬辰亂)에 휩쓸려 나라 일에 종사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 능력을 다 펴지 못하였다. 네째는 현재 소윤(少尹)인 경황(慶滉)인데 비록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여 여러 번 내직, 외직으로 옮겨다니며 벼슬을 하여 유능하다고 알려졌다.
  공(公)은 비록 무예로써 몸을 드러내었으나,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널리 통하였고, 시(詩)와 예(禮)에도 조예가 깊었다. 태도가 온화하여 옛날 선비같은 장수의 기풍이 있었다. 그래서 이르는 곳마다 명성을 얻었다. 평안절도사(平安節度使)를 두번 지냈고, 황해절도사(黃海節度使)도 두번 지냈으며, 충청병사(忠淸兵使)를 한번 지냈다. 군사와 백성들이 부모처럼 그를 공경하고, 신명(神明)같이 위엄있게 느꼈다. 그가 다스리는 땅은 편안하고 무사하였으니, 그의 어짐과 위엄과 일을 처리해 나가는 솜씨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정에서 그를 중히 여겨 요새지를 맡겼고 두 번이나 통제사로 삼았다. 통제사라는 직책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三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지키는 자리이며, 벼슬이 높고 임무가 중대하여 지방의 무신(武臣) 가운데 이보다 중요한 자리는 없다. 그러므로 당대의 으뜸이 아니면 능히 맡지 못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통제영(統制營)이 설치된 것도 오래되지는 않았다. 임진란(壬辰亂)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바다 위에서 적은 군사로 큰 적을 무찔러 이겨, 바다와 육지에 진로를 차단함으로써 나라의 중흥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조정은 관직으로써 그에게 상줄 만한 것이 없었고, 또 중대한 권한을 주지 않으면 군사를 통솔하여 나라의 동남쪽을 방어하기 어려우므로, 특별히 통제사라는 관직을 만들어 그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니 통제사라는 직책은 이순신 장군 때문에 마련된 것이었다.
 통제영(統制營)은 처음에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멀어서 고성(固城)으로 옮겼다. 배를 숨기기에는 편하였으나 갑자기 당하는 변을 막는데는 불편하였다. 통제사로 오는 사람들이 우선 편한 것만 생각하여 능히 고치지 않고 두었는데, 공(公)이 통제사가 됨에 미쳐 개연히 이를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마땅한 땅을 살펴서 진영을 두룡포(頭龍浦)로 옮겼다. 서쪽으로는 판데목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見乃梁)을 끌어안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숙하면서도 구석지지 않고, 얕으면서도 노출되지 않아 진실로 수륙(水陸)의 형세가 뛰어난 곳이요, 국방(國防)의 요충지(要衝地)이다. 동쪽에서 쳐들어와 남해안과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적들이 이곳을 지나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해서  바다가 조용해진 지 수십 년이 넘었다.
 옛날 조적(祖狄)이 초성(醮城)에 진영을 옮기니 후조(後趙)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고, 유익(庾翼)이 면구(沔口)에 진영을 옮기니 북로(北虜)가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지리(地利)의 험난함은 비록 하늘이 베푸는 것이지만 반드시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국방의 요충이 되는 것이니, 이는 예나 이제나 같은 이치이다. 지금 이 두룡포(頭龍浦)가 옳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낱 소금기가 많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바닷가 어촌,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잡초 우거진 언덕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미 몇 천 년 만년동안 몇 천 몇 백 사람들을 겪어 오다가 비로소 공(公)의 손에서야 이 일이 이루어졌다. 하늘이 이 요새를 설치하고서 이 때를 기다렸고 또 그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앞서 적을 파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킨 업적을 세웠고, 공(公)이 뒷날 진영을 설치하여 만세토록 이로움을 주었으니, 전후 두 이씨(李氏)의 출현이 때를 맞추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유독 공(公)의 행적은 거의 허물어져 전하여지는 것이 없으니, 어찌 현명한 자손이 능히 집안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겠는가.
 아. 두룡포(頭龍浦)의 요해지가 공(公)을 만나 국방의 요충지가 되었고, 공(公)의 공적과 덕이 또 구공(具公)을 만나서 비석에 새겨 전하게 되었다. 그러니 단지 땅만이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사람도 또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니, 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구공은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이며 왕실의 외척(外戚)이다. 외척 중신(重臣)이 이 진영을 맡았으니, 그 공덕과 명성과 쌓은 업적에 대해서는, 공(公)이 지금 진영에서 통제사로 있고 또 이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감히 찬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고 뒷사람이 논하기를 기다리노라.
통훈대부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 찬하고
어모장군 행훈   쓰다.               
천계(天啓) 5년(AD 1625) 3월   일
고종갑진본군인 이학재 자포변 이립어세병관광장






출처 및 참조
통영시지-통영시사편찬위원회-행정과/동아출판인쇄사(2018.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