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김해 대동면 진주강씨 3인 효열비 孝烈碑

천부인권 2020. 3. 19. 06:00



2020.3.8. 김해시 대동면 초정리에서 원지마을로 가는 도로 모습



2020.3.8. 김해시 대동면 초정리 진주강씨 비각 모습


대동면 초정리 산 30(대동로 555)은 초정리草亭里에서 원지院址마을로 가는 길 좌측에 위치하며 진주강씨 3인의 효렬비孝烈碑 3기가 하나의 담장 안에 서로 마주하며 있다.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13m이고 「위도 35°14'39"N 경도 128°58'30"E」를 가러킨다.
이 3기의 비석은 진주강씨 박사공파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 후손들의 충훈과 효자의 비석으로 비 제목들은 정면의 비는 『충훈진주강공지비忠勳晋州姜公之碑』 좌측의 비는 『효자가선대부진주강공지비孝子嘉善大夫晋州姜公之碑』 우측의 비는 『효자통덕랑진주강공지려孝子通德郞晋州姜公之閭』이다.

가선대부 강득대와 통덕랑 강성대의 비는 효자비이고 강득대의 손자 강홍수의 비는 충훈비이다. 이들의 선조인 강보손의 묘갈명도 옮겨 적어 둔다.





2020.3.8. 비각의 정면


牧使晋陽姜公甫遜墓碣銘並序
公諱甫遜姜氏晋陽大族 文敬公君寶 恭穆公蓍 麗之名卿 恭穆公之 曾孫曰孟卿 本朝領議政諡文景生允範 監司是爲公高祖 曾祖自明牧使 祖守仁司猛 考繼原府使 妣金海金氏 公生于晋陽 以門蔭拜牧使 壬辰之燹 轉轉至金陵之草亭 丁酉賊猝入里 中率二家僮 以杖擊賊殺畧干人 度不能賊登後山 大聲叱敵曰 我李氏臣下 欲爲爾所俘 以冠纓絞項而死 賊義之表識 其死所而去 大因瘞于 其地 卽今冠項山枕艮原 山之得名 以公死義之實也 配金海金氏墓 詩禮店谷 子希壽麟壽 孫男秀蘭 丙子殉節于 南漢城下 孫應淑 曾孫士楠愛楠愛福士笠 後孫大鉉大玉 以舊碣磨泐擬改竪 碣請文于 相穆銘曰 才足以牧民 義足爲殉身 澤足以裕後人
丁卯立夏節光州盧相穆 撰
歲丁卯立夏節後孫大鉉 謹書


목사진양강공보손묘갈명병서
공公의 이름은 보손甫遜이요 강씨姜氏는 진양晋陽의 대족大族으로 문경공文敬公 군보君寶와 공목공恭穆公 시蓍가 고려의 명관名官인데 공목공恭穆公의 증손曾孫 맹경孟卿은 본조本朝의 영의정領議政으로 시諡호가 문경文景으로 윤범允範을 낳으니 감사監司로써 이 분이 공公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자명自明은 목사牧使였고 조祖 수인守仁은 사맹司猛이요 고考 계원繼原은 부사府使이며 비妣 김해김씨가 진양晋陽에서 낳으니 문벌門閥의 음직蔭職으로 목사牧使가 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전전하다가 김해金海 초정리草亭里에 이르렀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적賊이 갑자기 마을에 이르니 두 가동家僮을 이끌고 몽둥이로 적 약간 인을 쳐 죽이고 대적할 수 있음을 헤아려 뒷산에 올라 큰소리로 적을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이씨李氏의 신하로 너희 놈의 포로가 되고 싶지 않다.』하며 갓끈으로 목을 매어 죽으니 적들이 정의롭게 여겨 죽은 곳을 표시하고 떠나갔다. 크게 곧 그 땅에 묻으니 곧 지금의 관항산冠項山¹⁾ 간좌艮坐 언덕이요 산 이름은 공公이 정의롭게 죽은 때문에 얻은 것이다.
배위配位 김해김씨는 무덤이 시례詩禮²⁾ 점곡店谷이요 아들은 희수希壽와 인수麟壽이며 손남孫男 수란秀蘭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남한산성 아래에서 순절했고 손자孫子는 응숙應淑이며 증손曾孫은 사남士楠 애남愛楠 애복愛福 사립士笠이다.
후손後孫 대현大鉉과 대옥大玉이 옛 비석이 풍마우륵風磨雨泐³⁾하여 고쳐 세우려고 상목相穆에게 글을 청하니 명銘하여 가로되 “재주는 목민관牧民官이 될 만하고 의리義理는 순국殉國할 만했도다. 몸으로 남긴 혜택이 후손에 넉넉할 만하였구나,”
정묘丁卯(1927)년 초5월에 광주 노상목盧相穆 찬하다.
세정묘歲丁卯 여름 후손 대현大鉉이 삼가 글씨를 씀.


【주석】
관항산冠項山¹⁾  : 김해시 대동면 초정리 뒷산으로 지금은 백두산(353m)을 말한다.
시례詩禮²⁾ : 대동면大東面 예안리禮安里를 이른다.
풍마우륵風磨雨泐³⁾ : 바람에 마모磨耗되고 빗발에 결이 일어남.


朝鮮寰輿勝覽 金海 조선환여승람 김해군편 기록
강보손(姜甫遜) - 진주인(晉州人)이며 정유년(丁酉年)에 집안 아이들을 이끌고 적(敵)에 항거(抗拒)하다가 형세(形勢)가 어려워지자 갓끈으로 목을 매어 순절(殉節)하였다. 이로 인(因)하여 그 산(山)의 이름을 관항산(冠項山)이라고 하게 되었다.

강수란(姜秀蘭) - 강보손(姜甫遜)의 증손(曾孫)이며 병자년(丙子年)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다가 호(胡)에게 잡혀서 항거(抗拒)하다가 절사(節死)하였다.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2020.3.8. 진주강씨 3인 효열비 모습



충훈진주강공지비忠勳晋州姜公之碑 - 강홍수의 비




嘉善大夫晋州姜公諱得大褒彰完議文
本所建 孔夫子廟刊五倫行實 以爲尊聖獎 善而列郡單子 繼續來到中 謹按慶南有司 及儒林薦狀
則同道金海郡下東面草亭里 孝子姜公諱得大晋陽人 兵馬節度使都元師諱以式后 通亭公諱淮伯十五世孫 諱梅碩之子也 天性純良 早年失怙 奉偏慈以孝 晨昏定省 甘旨進供 隨時殫竭 靡有懈怠 出告返面 無倚閭之望 其慈八耋老齡 遇患髮際瘡數 朔若痛侍湯吮 瘡百方救療 一無效能 醫言山狐皮裹瘡 則最良云 故齊沐入山 祝天禱靈 其夜三更 家犬亂吠 明朝出視 則山狐一首 斃於門前 卽去皮裹 其瘡口不幾 日去舊生新快得神効 後以天年考終 哀毁逾制 葬祭哭泣克遵先人之禮 少無幽明之憾 居廬三載 行素深黙 遂日省掃 不怕雨雪 盡禮終祥噫 公之德行異蹟 可以模楷後世 世宜有綽楔闡揚 而時制不古 尙在湮沒 故士論發及 於本所玆付 鋟梓繼建閣碑 以爲褒彰而壽傳實蹟 永樹風敎圖 存不朽之意 成完議文事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五年 甲子十一月 日


가선대부진주강공휘득대포창완의문
본소本所에서 세운 공부자묘孔夫子廟에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¹⁾를 간행함은 성현을 높이고 선을 권장하려는 까닭이며 여러 고을의 충효열忠孝烈 명단名單이 계속 도착하는 중이다.
삼가 경남 유사有司와 사림이 추천하는 행장行狀을 살피니 동도同道 김해군 하동면下東面 초정리草亭里 효자 강공의 이름은 득대得大고 진양인晋陽人이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도원사都元師 이름 이식以式의 후손이며 통정공通亭公 이름 회백淮伯의 15세손이며 이름 매석梅碩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어질고 젊은 나이에 부친父親을 잃고 편모偏母를 효도로 받들어 혼정신성昏定晨省²⁾에 맛난 음식을 올리고 때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게으름이 없으며 나갈 때는 아뢰고 돌아와선 낯을 보여 동구 밖까지 나가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하였다.
그 어머니가 80세 고령老齡에 병을 얻어 머리털 끝에 부스럼으로 몇 개월 고통인데 양약湯藥을 모시고 부스럼을 빨아도 온갖 구호가 효력이 없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산여우 가죽으로 부스럼을 싸매면 가장 좋다하므로 목욕재계하고 산에 들어가 하늘에 빌고 신령에게 기도하니 그날 밤 삼경에 집의 개가 어지럽게 짓기에 다음날 아침 나가보니 산여우 한 마리가 문 앞에 죽어 있어 즉시 껍질을 벗겨 고름구멍에 싸매니 며칠이 되지 않아 고름이 빠지고 새살이 차올라 상쾌히 신통한 효과를 보았다.
뒤에 천수를 마치니 슬픔이 예제禮制³⁾를 넘었고 장례 제례의 곡읍哭泣을 능히 선인의 예禮를 따라 조금도 이승저승의 유감遺憾이 없게 하였다.
여묘살이 삼년 동안행실이 본디 매우 묵중하여 날마다 성묘 소분掃墳⁴⁾하여 눈과 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를 다하여 대상大祥⁵⁾을 끝내었다.
아아! 공公의 덕행과 이적異蹟은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며 대대로 작설綽楔⁶⁾이 있어 천양闡揚⁷⁾하기에 마땅하나 시대時代의 제도가 예스럽지 않아 인멸되었음으로 사론士論이 크게 일어나 본소本所에 이르렀으니 현판을 새기고 비석을 세워 포창하여 실적實蹟을 오래 전傳하여 영원히 풍교風敎⁸⁾를 세워 썩히지 않을 뜻으로 완의문完議文을 작성한 것이다.
공부자孔夫子의 탄강誕降 2475년 갑자甲子(1924)년 11월 일.


【주석】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¹⁾ : 1434년(세종 16)에 설순이 지은 〈삼강행실도〉와 1518년(중종 13)에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이륜행실도〉를 합해 정조의 왕명으로 1797년(정조 21)에 간행한 유교윤리를 담은 책. <다음백과사전>
혼정신성昏定晨省²⁾ :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함을 이르는 말<다음 국어사전>
예제禮制³⁾ : 상례에 관한 제도
소분掃墳⁴⁾ :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무덤을 깨끗이 하고 제사지냄<다음 국어사전>
대상大祥⁵⁾ : 사망한 날로부터 만 2년이 되는 두번째 기일(忌日)에 행하는 상례의식
작설綽楔⁶⁾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사는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던 붉은 문<다음 국어사전>
천양闡揚⁷⁾ :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
풍교風敎⁸⁾ : 교육이나 정치를 잘하여 세상의 풍습을 잘 교화시킴





孝子通德郞晋州姜公諱聖大褒彰完議文
本所建 孔夫子廟刊五倫行實 以爲尊聖獎 善而列郡單子 繼續來到中 謹按慶南有司 及儒林薦狀
則同道金海郡下東面草亭里 孝子姜聖大晋陽人 兵馬節度使都元師諱以式后 通亭公諱淮伯十五世孫 壽職崇政大夫 諱應碩之子也 天性純實自幼稍 知事親之道 父母偕老俱亭 百歲家素貧寠 雖蔬食藜羹養 其口體以至誠篤敬順 其心志往在 己未兩親俱終 天年哀毁泣血 送終之儀 祭奠之節 克遵古體 少無餘憾葬于 家後山麓 昏定晨省 一如事生 雖烈風暴雨不 避不懈往來山路 有虎送迎 此非天感所致耶體終 三祥不失尺寸 又値壬戌 懷襄之變 近江全坪浸枯無餘 惟孝子之畓 三斗落獨得 其收入皆曰 此亦天賜也 昔聞雪庭挻筍旱田注水 今見類似實蹟 猗歟休哉 宜有綽楔闡揚 而時制不古 尙在湮沒 故士論發及 於本所玆付 鋟梓繼建閣碑 以爲褒彰而壽傳實蹟 永樹風敎圖 存不朽之意 成完議文事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六年 乙丑正月 日


효자 통덕랑 진주강공 휘 성대 포창완의문
본소本所에서 세운 공부자묘孔夫子廟에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¹⁾를 간행함은 성현을 높이고 선행善行을 권장하려는 까닭이며 여러 고을의 충효열忠孝烈 명단名單이 계속 도착하는 중이다.
삼가 경남 유사有司와 사림이 추천하는 행장行狀을 살피니 동도同道 김해군 하동면下東面 초정리草亭里 효자孝子 강성대姜聖大는 진양인晋陽人이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도원사都元師 이름 이식以式의 후손이며 통정공通亭公 이름 회백淮伯의 15세손이요 이름 수직壽職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어질고 어릴 때부터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알아 부모가 함께 늙어 다 백수百壽를 누리나 본디 가난하여 나물밥 명아주 국으로 입과 몸을 봉양하며 지극 정성으로 그 마음과 뜻을 돈독히 공경하였다. 지난 기미년(1919)에 양친이 함께 천수天壽로 별세하자 슬픔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상례 장례의 의식이나 제사 올리는 절차가 능히 옛 의례를 따라 조금도 유감없이 했으며 집 뒤의 산기슭에 장례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²⁾을 한 결 같이 생시生時처럼 하여 비록 바람 소나기라도 피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으니 호랑이가 마중하고 보내주니 이것이 하늘이 감동한 소치所致 아니겠는가.
예禮를 다해 3년 대상大祥³⁾을 마쳐 조금도 예를 잃지 않았는데 또 임술년壬戌年(1922)에 수재水災의 변란을 만나 강 가까운 온 들판이 물에 잠기고 말아 살아남은 논이 없었는데 오직 효자의 논 3두락은 홀로 그 수입을 얻었으니 이것 역시 하느님이 내린 것이다.
옛날 들으니 눈 쌓인 마당에 죽순이 솟고 메마른 밭에 빗줄기를 쏟았다 하니 비슷한 실적을 보니 아아! 아름답구나.
작설綽楔⁴⁾이 있어 천양闡揚⁵⁾하기에 마땅하나 시대時代의 제도가 예스럽지 않아 인몰湮沒되었음으로 사론士論이 크게 일어나 본소本所에 이르렀으니 현판을 새기고 비석을 세워 포창하여 실적實蹟을 오래 전傳하여 영원히 풍교風敎⁶⁾를 세워 썩히지 않을 뜻으로 완의문完議文을 작성한 것이다.
공부자孔夫子의 탄강誕降 2476년 을축乙丑(1925)년 1월 일.


【주석】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¹⁾ : 1434년(세종 16)에 설순이 지은 〈삼강행실도〉와 1518년(중종 13)에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이륜행실도〉를 합해 정조의 왕명으로 1797년(정조 21)에 간행한 유교윤리를 담은 책. <다음백과사전>
혼정신성昏定晨省²⁾ :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함을 이르는 말<다음 국어사전>
대상大祥³⁾ : 사망한 날로부터 만 2년이 되는 두번째 기일(忌日)에 행하는 상례의식
작설綽楔⁴⁾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사는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던 붉은 문<다음 국어사전>
천양闡揚⁵⁾ :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
풍교風敎⁶⁾ : 교육이나 정치를 잘하여 세상의 풍습을 잘 교화시킴


출처 및 참조
김해금석문총람-김해문화원/경남그라픽스(199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