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두암 조방선생 휴허비가 낙동강에 있는 이유

천부인권 2020. 2. 21. 06:00



2020.2.18. 두암 조방선생 유허비와 말바위 위치


함안조씨咸安趙氏 조방(趙垹:1557~1638)선생의 『두암조선생반구정유허비斗巖趙先生伴鷗亭遺墟碑』가 위치한 곳은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891-6번지로 낙동강 둑 안쪽에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5m을 표시하고 「위도 35°23′07″N 경도 128°29′16″E」라 알려 준다. 이곳 낙동강 안쪽에 반구정유허비伴鷗亭遺墟碑를 세운 것은 이곳이 옛 두암(斗巖: 말바위)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암조선생반구정유허비斗巖趙先生伴鷗亭遺墟碑』가 있는 곳에서 낙동강 쪽으로 80m 안쪽에 위치한 말바위가 조방趙垹선생이 지은 옛 반구정伴鷗亭이 있던 자리이다.
반구정伴鷗亭은 낙동강 우포藕浦나루가 있던 두암斗巖 위에 있었으나 후손들에 의해 1858년 현재의 위치인 용화산 중턱의 옛 청송사(靑松寺)가 있었던 자리로 옮겼다




2020.2.18. 반구정유허비伴鷗亭遺墟碑 모습


『두암조선생반구정유허비斗巖趙先生伴鷗亭遺墟碑』의 비문은 이가원李家源이 지었고 단기 4314(서기1981)년에 후손 조광제趙光濟가 세웠는데 한문인 원문과 국한문 혼용의 배문준이 해석한 국문을 함께 새겼다. 아래에는 그 내용을 적었다.





伴鷗亭遺墟碑銘
烏虛此斗巖趙先生垹伴鷗亭舊址也先生實於漁溪先生爲玄孫蚤承家學復從李篁谷偁遊得聞退陶指訣尤嫥精於聖學十圖學旣成矣適値壬辰訌率家僮往從郭忘憂再祐於鼎津丁酉再亂復赴火旺山城輒有奇績 難旣定歸築玆亭於洛江之斗巖以寓忘機之趣然其思親戀君之意發於歌詠未嘗少歇亭之北有忘憂之滄巖亭扁舟還往每値良辰美景與鄭寒罔逑張旅軒顯光諸賢約爲勝集風流文雅極一大之選有龍華同泛錄傳于世亭旣歲久水嚙而頹後孫改建于合江亭之右合江者公之從子澗松任道之所居也明沙十里蒼壁千仞風颿煙釣古松猗竹江山勝槪固無遜於斗巖而亭亦屢修而重新草樹增馥猿鶴無恙然猶慈孫之心不忍遽忘 其舊今欲堅一石於之巖之顚招工將雕其更則盛濟獨力以擔孟濟性智鏞業孝濟鏞泰等齎先生遺集北走冽上責家源爲之銘家源竊念先生爲老祖夫子之再傳旣有淵源家誼又念夫先生之尸祝於道南院也我高王考古溪府君譔奉安文曁常享祝詞亟贊其詩禮之淵源之懿眇余末學烏敢以不文辭諸乃敬爲之辭曰 若有人於江之渚夸紉芷荷以爲裳翳漁爺之耿介夸旣氣血之傳芳承退陶之餘緖芳撫十圖而究方何島夷之猖(囱)獗夸掩卷起而慨慷疇謂書生踈於兵夸仗義鋒以巢+刂狂置一亭而彛琴尊夸伴白鷗於江鄕集東南之名勝夸鳴襟佩之鏘鏘亭雖女+亶而址存夸草樹猶被耿光想當日之風悰夸曠千示+異而敢忘琢貞石以紀遺蹟夸慈孫遑其未遑徵我辭而勒之深夸爰庸詔夫無疆淸洛流以不息夸金華高而蒼蒼.
辛酉中秋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敬譔


반구정유허비명伴鷗亭遺墟碑銘
아! 이곳은 두암(斗巖) 趙선생이 서식(棲息)하시든 반구(伴鷗)의 옛터이다. 선생은 생육신(生六臣) 어계(漁溪)선생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학(家學/詩禮之訓)을 정수(精修)하고 다시 이황곡(李篁谷) 칭(偁)에게 수업(受業)하여 퇴계(退溪)선생의 심법(心法)을 전수(傳受)하고 더욱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정력(精力)을 기울여 학문(學問)이 대성(大成)하였다.
임진(壬辰)년에 도이(島夷)가 작란(作亂)함에 가동(家僮)을 데리고 곽망우재우(郭忘憂再祐)와 정암진(鼎巖津)에서 항적(抗敵)하고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다시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출전(出戰)하여 기적(奇績)이 많았다. 난(亂)이 평정(平定)됨에 공명(功名)을 버리시고 낙동강 변 두암(斗巖)에 정자를 지어 세외한정(世外閑情)을 즐겼으나 사친연군(思親戀君)의 회(懷)는 가영중(歌詠中)에 끝임이 없었다. 망우당(忘憂堂) 창암정(滄岩亭)이 강북(江北)에 상망(想望)함에 항시(恒時) 편주(扁舟)로 왕래서회(往來敍懷)하고 양진가절(良辰佳節)에 정한강구(鄭寒岡逑)와 장려헌현광(張旅軒顯光)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풍류문아(風流文雅)가 백세성사(百世盛事)를 이루어 용화동범록(龍華同泛錄)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정자가 퇴폐(頹廢)됨에 후손이 합강정(合江亭) 우편에 이건(移建)하니 합강정(合江亭)은 선생의 종자(從子)인 간송당(澗松堂) 임도(任道)의 소점(所占)인데 십리명사(十里名沙)와 천인창벽(千仞蒼壁)과 송죽(松竹)이 위요(圍繞)하여 풍연(風煙)의 두암(斗巖)과 방불(彷佛)하다. 그러나 자손(慈孫)들의 성심(誠心)이 선조의 구지(舊址)를 잊을 수 없어 두암정상(斗巖頂上)에 비석을 세워 기념코자 함에 후손 성제(盛濟)가 경리(經理)를 전담하고 주손(冑孫) 맹제(孟濟) 및 후손 성지(性智), 용업(鏞業), 효제(孝濟), 용태(鏞泰) 제장보(諸章甫)가 천리원정(千里遠程)의한수(漢水)를 건너 선생의 재전(再傳)의 연원(淵源)도 중(重)하거니와 또 선생의 도남서원(道南書院) 시축(尸祝)에 아고왕고고계부군(我高王考古溪府君)이 소찬(所撰)하고 봉안문(奉安文)에 선생의 시례연원(詩禮淵源)을 극찬(亟贊)하였으니 가원말학(家源末學)이 어찌 감(敢)히 사양(辭讓)하리요. 이에 조심히 명(銘)하여 가로되(曰) 장한 어른이 낙동강가에 서식(棲息)함이여 연꽃잎으로 의상을 하였도다.
어계(漁溪)선생의 깨끗하신 절개(節槪)이어 받은 정신(精神) 꽃답기도 하도다. 퇴도(退陶)의 연원(淵源)을 이음이여 성학십도(聖學十圖)의 묘리(妙理)를 탐구(眈究)하였도다. 되놈이 미친 듯이 침범(侵犯)함이여 책을 덮고 분개(憤慨)하는 충신(忠臣)이로다, 뉘라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 병법(兵法)에 소홀하다드냐. 의분(義奮)의 칼날로 미친 도적(盜賊) 베었도다. 정자(亭子)지어 금존(琴尊)으로 소일(消日)함이여 백구(白鷗)로 벗을 삼아 강호(江湖)에 자락(自樂)하도다. 동남명사(東南名士)모아 오유(遨遊)함이여 울리는 금패(襟佩)소리 쟁쟁 하도다.
정자(亭子)는 비록 옮겼으나 옛터는 그대로이며 풀 나무 빛은 오히려 깨끗하도다. 당일의 풍범을 상상(想像)함이여 천세(千世)를 지낸들 감히 잊어자랴, 정민(貞珉)을 세워 유적을 기록함이여 자손(慈孫)들의 성의(誠意) 더욱 장(壯) 하도다, 내 명사(銘詞) 지어 사실(事實)을 천양(闡揚)함이여, 천만세(千萬世) 무궁(無窮)토록 길이 전(傳)하리로다. 낙동강(洛東江)물 흘러 쉬지 않음이여 용화산(龍華山) 빛과 더불어 오래 창창(蒼蒼)하리라.
신유중추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삼가 찬함.





출처 및 참고
함안조씨 두암공파 종회(http://hamanjoduam.co.kr)
함안누정록-함안문화원/대보사(1986.10.05.)
함안 반구정 이야기(http://webzine.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