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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 중흥조 등암대종사 공덕비와 백당선생 글씨

천부인권 2020. 9. 11. 07:11

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

성주사비석군聖住寺碑石群이 위치한 곳은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로 이곳의 해발고도는 135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35"N 경도128°42'59"E」이다.
이곳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 공덕비문』을 비롯하여 전면에 『성주사중수급사적비성금인방명기聖住寺重修及事蹟碑誠金人芳名記』와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 『임춘옥유공비林春玉有功碑』 및 『자연보호비自然保護碑』 등 5기의 비석이 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들 중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의 글씨를 쓴 분이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로부터 추서를 받지도 못한 백당白堂 정기헌鄭基憲선생이다. 

비좌규수碑座珪首의 형태를 가진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는 이중의 기단에 비좌규수碑座珪首로 갈碣을 만들었는데 아래의 비단碑壇은 너비 103cm, 폭 71cm, 높이 47cm이고 위쪽 단은 너비 80cm, 폭 52cm, 높이 38cm이다. 비신碑身은 높이 146cm, 너비 49cm, 폭 19cm이다. 

 

비를 바라보는 우측은 아래처럼 새겼다.
縁化秩
住持 姜靈河 監務 姜雲松 監事 金淸湖 法務 董雪海 知殿 李慶庵 山監 朴永秀 供司 鄭雲潭 知賓 李炳浩 負木 鄭尙得 
僧門 金擎山 具桂潭 金玩溟 具檀溪 姜雲松 李慶庵 韓蓮蒲 金雨潭 외 31명 
刻手 朴鶴伊 石工 李能植

좌측에는 아래처럼 새겼다.
俗門
姜周中 姜敬中 姜漢中 姜文中 姜完中 姜碩中 姜萬中 姜千中 姜壽中 姜相德 姜虎用 姜鎬正 姜鎬駿 姜鎬贊 姜鎬同 姜鎬郡 姜鎬尤 姜基淳 姜昌淳
鄭白堂篆

뒷면에는 아래처럼 새겼다.
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壬午年】
  佛母山聖住寺 是千年前羅代古蹟 新羅興德王時 無染國師 始創此寺 而中間嗣葺 雖或有之 歲月寢久 殘敗益甚 殿閣 多荒凉 道場盡頹廢 常使觀者 自不禁寒心之歡 際玆藤嚴和尙 自梵魚 移錫此寺 慨然有革新之意 吟一詩曰 百里歸來思革新 靑山獨立幾經春 回看佛界多荒艸 愁殺禪窓靜坐人 因卽投身募捐 竟以火栴檀數年 告成功 此中仍舊修繕者 爲數十棟 創新設立者 亦四五處 而寺中所有 如大鍾金口等重大金石之物 頃因勢孱而見移他寺者 一祘搜還之 其他釐正之土地新具之物品自足 爲永久維支之方 於是一圓道場煥然革新 而數百年寂寞空山之中 復有誦禪鍾磬之聲 聞于朝夕 諸佛皆微笑 有憙色而宛似無染國師之八定前身 還復出定而降臨矣 於乎余嘗觀古人傳道之要 皆以心相授受 則惟玆國師之始創也 和尙之重創也 其心皆有佛 千載之間 兩心相照 一般做此事 便是直接相授受而乃傳鉢也 豈曰世遠乎哉 是所謂朝暮遇之者也 和尙晉陽姜氏 翠竹公後也 其先妣朴氏 夢虎而生和尙 宛然有龍虎之象 年十六 祝髮棲峰門下纔數年博涉羣經 能演三車言語德行 一無圭点 而處大衆 以六和合爲主 在私家親戚又六行盡備 蓋以其士家名祖之後孫 所學有慈悲禪敎 故其心 常兼存儒佛也歟 過椿曆後 更入梵魚寺內院禪 室面壁二十年參究遠摩宗旨 一朝豁然貫通 究了生死大事 會門徒 囑遺事 奄入大涅槃 享年八十四 茶毗之夜 一道光明照耀四境 三畵夜 不絶大衆欽歎 嗚呼和尙 雖逝此刹尙存 和尙此刹尙存 和尙之名 亦不泯 然豈如貞珉之永久壽世乎 現住持姜靈河上人 與大衆議 將竪石而求文于余 余於和尙 嘗有太嶺舊交 故不必强辭 書見聞而副其勒請 係詩曰 佛母靑山靑不老 樂川流水流無窮 欲知和尙眞功德 盍往看他山水中
玄黓敦牂 攝提月 下澣 
成均博士全州李起住撰  篆書 鄭白堂

성주사 중흥조 등암 대종사 공덕비 【壬午年(1942)】
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壬午年】

  불모산 성주사는 천 년 전 신라시대 고적이다. 신라 흥덕왕 때 무염국사가 처음으로 이 절을 창건하였고, 중간에 뒤이어 수리한 적이 비록 간혹 있었지만, 세월이 점차 오래되자 무너지고 사라진 곳이 더욱 많아졌다. 
  전각은 대부분 황량하고 도량은 다 무너져버려서 항상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한심하다는 탄식을 금하지 못하게 했다. 
  이 때에 등암화상이 범어사에서 이 절로 옮겨와서(석장을 옮겨) 흔쾌히 혁신할 뜻이 있어서 다음과 같이 시 한수를 읊었다. 

백리 멀리서 돌아와서 혁신을 생각하였는데                            百里歸來思革新
청산은 홀로 서서 몇 번이나 봄을 지났던고                             靑山獨立幾經春
부처님 세계를 돌이켜보니 거친 풀만 무성한대                         回看佛界多荒艸
선방에서 몹시 시름에 잠겨서 정좌한 사람 있네                        愁殺禪窓靜坐人

  그리하여 곧바로 일에 투신하여 성금을 모았다. 마침내 전단향¹⁾ 피운지 몇 년 만에 낙성의 공을 알렸다. 
  이 가운데 옛것을 따라 수선한 것이 수십 동이고, 새롭게 만들어 세운 것도 네 다섯 곳이었다. 그리고 대종과 금구 등 중대한 금석의 물건처럼 절에서 소유한 것은 지난번 형세를 따라 신중하게 놓고, 다른 절에서 옮겨진 것은 한가지로 찾아서 돌려주었다.
  그 외 정리하여 바로잡은 토지와 새로 장만한 물품을 자급자족하여 영구하게 유지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이에 일원一圓²⁾ 도량이 빛나게 혁신되어서 수백 년 적막하여 인적 없던 산 속에 다시 불경을 낭송하고 종경鍾磬³⁾의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들리게 되었다. 제불諸佛이 모두 미소짓고 기쁜 안색이 있어서 무염국사의 팔정八定⁴⁾전신前身이 도리어 다시 선정에서 나와서 강림한 듯하다. 
  이에 내가 일찍이 고인古人들이 도를 전한 요체를 살펴보니, 모두 마음으로 서로 전수하였으니 오직 이 국사의 창건과 화상의 중창에는 그 마음에 모두 부처가 있었다. 천년의 사이에 두 마음이 서로 비추어 똑같이 이 일을 하였으니 바로 직접 서로 주고받은 것이고 바로 의발을 전한 것이다. 
  어찌 세대가 멀어졌다고 말하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아침 저녁 사이에 만난다’⁵⁾는 것이다.
  화상은 진양 강씨로 취죽공의 후예이다. 그 선비先妣 박씨가 범꿈을 꾸고 화상을 낳았는데, 뚜렷하게 용호龍虎의 상이 있었다. 
  16세에 서봉棲峰 문하에서 머리를 깍은 지(출가한 지) 겨우 몇 년 만에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여 삼거三車⁶⁾의 언어와 덕행을 펼 수 있었다. 
  한결같이 규점圭点이 없고 대중과 지낼 때 육화합六和合⁷⁾을 위주로 하였다. 사가친척에 있어서도 육행六行⁷⁾을 다 갖추었다.
  대개 사가士家의 이름난 선조의 후손으로서 배운 것이 자비慈悲의 선교禪敎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유불儒佛을 함께 간직했을 것이다. 
  춘력이 지난 뒤에 다시 범어사의 선원에 들어가 방에서 면벽한지 20년에 원마遠摩의 종지를 참구하여 하루 아침에 활연관통豁然貫通⁸⁾하여 마침내 생사의 대사를 마쳤다. 
  문도門徒를 모아 남은 일을 부탁하고 갑자기 대열반大涅槃에 드시니 향년 84세이다. 다비하는 밤에 일도一道의 광명이 사방에 비추고 삼일 밤낮으로 대중의 흠탄欽歎이 끊이지 않았다.
  아아! 화상께서 비록 가셨지만 이 절에는 아직도 화상이 살아 있다. 화상께서 이 절에 아직도 계시니 화상의 이름이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빗돌이 영구히 세상에 오래 남는 것만 같겠는가! 현 주지 강영하 스님이 대중들과 의논하여 장차 빗돌을 세우려고 나에게 글을 요구하였다.
  내가 화상에 대하여 일찍이 태령太嶺에서 오래된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꼭 억지로 사양하지 않았다. 보고 들은 것을 적어서 억지로 요청에 부응한다. 
  시를 붙여둔다.

불모의 푸른 산 푸르름 시들지 않고                                  佛母靑山靑不老
요천⁹⁾에 흐르는 물 물길이 끝이 없네                                樂川流水流無窮
화상의 참 공덕을 알려고 한다면                                      欲知和尙眞功德
어찌 다른 산수에 가서 보지 않는가                                  盍往看他山水中

현익돈장(壬午年, 1942) 섭제월(寅月, 정월) 하순
성균과 박사 전주 이기주가 짓고, 전서는 정백당이 적다.

【주석】
전단향¹⁾ : 전단향 전단(栴檀)은 향기가 많이 나는 나무로, 불상(佛像)을 새기거나 불단(佛壇)을 만드는 데 쓰인다. 여기서는 불사을 중창하는 것을 말한다.
일원一圓²⁾ : 일원一圓 일정한 범위의 지역을 일컫는다. 
종경鍾磬³⁾ : 종경鍾磬은 일반적으로 쇠북과 경쇠를 일컫는다. 여기서는 절에 있는 종과 부처에게 절할 때 흔드는 동으로 만든 작은 종을 말한다.
팔정八定⁴⁾ : 색계(色界)의 사선정(四禪定)과 무색계(無色界)의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말한다.
‘아침 저녁 사이에 만난다’⁵⁾ : 오랜만에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 기쁨을 비유하는 말이다. 
삼거三車⁶⁾ : 《법화경》 〈비유품(比喩品)〉에서 말한 우거(牛車), 녹거(鹿車), 양거(羊車)를 말하는데, 이들은 각각 보살승(菩薩乘) 즉 대승(大乘)과 연각승(緣覺乘) 즉 중승(中乘)과 성문승(聲聞乘) 즉 소승(小乘)에 비유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만세의 뒤에라도 이 해답을 아는 대성인을 만나게 된다면, 이것도 아침저녁 사이에 만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萬世之後 而一遇大聖人知其解者 是朝暮遇之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육화합六和合⁷⁾ : 육화합(六和合)은 부처가 공동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여섯 가지의 중요한 윤리덕목(倫理德目), 즉 동계화경(同戒和敬)ㆍ동견화경(同見和敬)ㆍ동행화경(同行和敬)ㆍ신자화경(身慈和敬)ㆍ구자화경(口慈和敬)ㆍ의자화경(意慈和敬).을 말한다. 이것을 육화(六和), 육화경(六和敬)또는 육합념법(六合念法)·육화(六和)라고도 한다.
육행六行⁷⁾ :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에 “대사도(大司徒)가 지방에서 세 가지로 백성을 가르치고 인재를 천거하니, 삼물三物은 첫째는 육덕(六德)으로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이고, 둘째는 육행으로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고, 셋째는 육예(六藝)로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라고 하였다.
활연관통豁然貫通⁸⁾ : 활연관통豁然貫通은 “힘쓰기를 오래 하게 되어 하루 아침에 환하게 관통하게 되면 모든 사물의 표리와 정추가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이 밝지 않음이 없다.[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라고 한 말이  《대학장구》 수장(首章)의 주자 주에 보인다.
요천⁹⁾ : 요천(樂川)은 불모산에서 발원하여 천선동과 안민동 사이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다. 1859년 소산(小山) 김기호(金琦浩)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회인 요천시사(樂川詩社)에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