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비석군聖住寺碑石群이 위치한 곳은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로 이곳의 해발고도는 135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35"N 경도128°42'59"E」이다.
이곳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 공덕비문』을 비롯하여 전면에 『성주사중수급사적비성금인방명기聖住寺重修及事蹟碑誠金人芳名記』와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 『임춘옥유공비林春玉有功碑』 및 『자연보호비自然保護碑』 등 5기의 비석이 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는 뒷면에 『창원군불모산성주사사적비명병서昌原郡佛母山聖住寺事蹟碑銘 並書』가 기록되어 있고 비의 형태는 이중 대석臺石에 개석은 없고 비신만 있는 형태이다. 맨 아래 대석은 너비 91cm, 폭 61cm이고 위의 대석은 너비 46cm, 폭 40cm이며, 비신은 높이 172cm, 너비 60cm, 폭 30cm의 크기이다.
昌原郡佛母山聖住寺事蹟碑銘竝書【乙亥】
佛去後 惟存敎理 敎理深玄 衆人難得 其所入之門 其在流通分上 不可不先用神變 其使人人目覩自信而入東漸 支邦旣然 而夲土亦添也 夫此佛母之聖住 特爲國內名山巨刹者 距今千九十四年前 新羅第四十二世興德王時 外寇犯國境 王甚憂之 無染祖師自智異山來住玆山 卽以錫杖竪山頂 草木皆兵 左手扣其腹 雷聲盛作 冦大懼退去 王卽命平章事柳齊等 極力所創也 遂以田三百六十結 及奴婢 百戶納寺以師爲國師 是時佛化大興 可想也 自此至壬辰 其間爲六七百年 而興廢年紀及何人之功 無文可攷者 是必見失於八年兵火中也 距今三百年前 眞鏡大師 來見山之勝寺之敗歎曰 殘基若是宏濶 可知羅王之創力國師之規度也 遂發大志 欲爲重創 忽於松蘿之裏 發見數三佛宇與其石塔石燈等物 其或爲殘缺 幸得見千載古跡也 卽旣伐木治石爲役 甚巨大 一日有多數熊羣會集 俱運木石 其久爲之役 易如反掌 其重創之運眞鏡之誠感熊之力 可謂時乎時乎 盖山名佛母 寺號聖住者 曾以聖人來住 敎化大興之兆也 眞鏡熊後之 後歲稱熊神寺 只表那時紀念而已 今還從本號也 眞鏡後二百餘年 藤巖長老 自梵魚寺來住者數年 人稱中興大師 這間新建者 修繕者 什物者 無一非着手處也 智閑師之鑄梵鍾 桂潭師之建鍾閣 竝爲功盛而名著也 且蓉峯玩溟二師建事務室 慶海師 道場繕治 事蹟收蒐 特竪豊功 且於新造佛像新畵後幀 映月師 專力也 其於李朝末年大小寺刹 滅無形跡者 八百餘所 而玆寺不入於彼禍 至今千有餘年 輯熙而存者 可知開山鼻祖之明眼也 玩溟師現任住持 而常歎玆寺之無歷事所傳 今欲以前任住特所採得者 傳之于後 求余文以爲銘 現權¹⁾退寇揚化之故 選勝卜築將雨法雨 羅時佛化東方道場 敎民善俗贊王宏綱 理關消長興廢無常 鴻碩間作應有名芳 壬辰之後鏡師大功 誠無不到羣熊自融 藤老來住綢繆多年 建者繕者隨事俱圓 伊後諸師事業彌章 勒千貞珉久遠垂光
敎撲主應化 二千九百六十二年 乙亥 三月 日
南泉金翰圭撰而書
창원군 불모산 성주사 사적비명 병서 【乙亥(1935)】
昌原郡佛母山聖住寺事蹟碑銘竝書
부처가 떠난 뒤에는 오직 교리만 남아 있다. 교리가 깊고 오묘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터득하기 어렵다. 교리에 들어가는 문은 유통분流通分¹⁾ 상에 있으니 신변神變²⁾을 먼저 쓰지 않을 수 없다. 신변은 사람마다 눈으로 보고 스스로 믿게 하여서 동쪽으로 들어와서 번져갔다. 중국도 이미 그러하였고 우리나라도 성하였다.
이 불모산의 성주사가 특히 국내의 명산거찰名山巨刹이 된 것은 지금부터 1094년 전 신라 제42대 흥덕왕 때이다. 왜구倭寇가 국경을 침범하여 왕이 몹시 걱정하였는데, 무염조사가 지리산에서 이 산으로 와서 바로 석장錫杖³⁾을 산 정상에 세우니, 초목이 모두 병사가 되었다.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두드리자 우레 소리가 크게 일어나서 왜구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왕이 곧바로 평장사 유제 등에게 명하여 힘을 다해 창건한 것이다. 마침내 토지 360결 및 노비 100호를 절에 보내고 조사를 국사로 삼았다. 이때에 부처의 교화가 크게 일어났음을 상상할 만하다.
이로부터 임진년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이 6~7백년이 되고, 흥망의 연대도 어떤 사람의 공인지도 상고할만한 문헌이 없는 것은 반드시 8년의 전란 중에 유실된 것이다.
지금부터 300년 전에 진경대사가 산의 경치와 절의 무너짐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남아있는 터가 이처럼 넓고 트여있으니 신라왕의 창건한 노력과 국사의 법도를 알 만하다.” 하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서 중창하고자 하였다.
갑자기 소나무와 넝쿨 풀 속에서 두세 개의 불당과 석탑, 석등 등의 물건을 발견하였는데, 더러는 깍이고 떨어져 나갔지만 다행히 천년의 옛 자취를 찾아볼 수는 있었다. 곧바로 나무를 치고 바위를 다듬은 다음 일을 하니 터가 매우 넓어졌다.
어느 날 많은 수의 곰들이 모여서 함께 나무와 바위를 옮기자 오랫동안 할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웠다. 절이 중창된 운수는 진경대사의 정성이 곰을 감동시킨 힘이니, 때를 만났다고 말할 만하다.
대개 산을 불모라 이름짓고 절을 성주라고 부른 것은 일찍이 성인이 와서 살았으니, 교화가 크게 일어날 조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경대사가 웅熊이라 후술하여 후세에 웅신사熊神寺라 일컬은 것은 다만 그때를 드러내어 기념했을 뿐이다. 지금은 다시 본래 이름⁴⁾을 따랐다.
진경이 입적한지 200여 년이 지나서 등암장로가 범어사에서 와서 머문 지 몇 년 만에 사람들이 중흥대사라 일컬었다. 이 사이에 신축한 것, 수선한 것, 집물들이 하나라도 등암장로가 착수한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지한 스님이 범종을 주조하였고, 계담 스님이 종각을 지었으니, 모두 공이 많고 명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한 용봉·완명 두 스님은 사무실을 짓고, 경해 스님은 도량을 보수하고 사적을 수습하는데, 특히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불상을 새로 만들고 새로 후불탱화를 그린 것은 영월 스님 혼자의 힘이었다.
조선 말년의 크고 작은 사찰들이 형체가 없이 사라진 곳이 8백여 곳이지만 이 절이 저런 재앙에 빠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1천여 년 동안 계속하여 밝혀서⁵⁾ 보존한 것은 개산비조의 밝은 안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완명 스님이 현임 주지로서 항상 이 절이 전할 만한 역사歷事가 없음을 탄식하고, 이제 전임주지가 채집한 것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면서, 나에게 글을 요청하여 이로써 명을 짓노라.
現權退寇揚化之故 권능을 드러내 왜구를 물리친 건 교화가 드날린 까닭이라
選勝卜築將雨法雨 뛰어난 명승에 절을 지으니 장차 법우⁷⁾가 내리리라
羅時佛化東方道場 신라시절 부처의 교화가 동방 도량에 미쳤으니
敎民善俗贊王宏綱 사람을 가르치고 풍속을 선하게 하여 왕의 큰 법을 도왔도다
理關消長興廢無常 다스림 관계 소장하고 자라며 흥망가 무상한데
鴻碩間作應有名芳 석학들이 간간히 일어나니 응당 향기로운 이름이 있겠구나
壬辰之後鏡師大功 임진년 뒤에 진경대사 공이 크니
誠無不到羣熊自融 정성이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곰들이 절로 융화되네
藤老來住綢繆多年 등암장로가 와서 머물며 주무⁸⁾한지 여러 해라
建者繕者隨事俱圓 건축도 수선도 일마다 모두 원만하였네
伊後諸師事業彌章 이후에도 여러 스님들 사업 더욱 빛나니
勒千貞珉久遠垂光 빗돌에 새겨서 영원히 광채를 드리우리라
교주 응화 2962년 을해년(1935) 3월 일 남전 김한규⁸⁾ 짓고 쓰다.
【주석】
유통분流通分¹⁾ : 경전의 글을 삼분三分하면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으로 나눈다. 서분은 서론이며, 정종분은 경전의 요점要點을 말한 부분이며, 유통분은 설한 교법을 후세에 유전하기 위하여 제자에게 위촉하는 부분으로 결론에 해당한다.
신변神變²⁾ :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변화하여 나타나는 신통神通이나 기적奇蹟을 말한다.
석장錫杖³⁾ : 승려들의 지팡이를 말한다.
본래 이름⁴⁾ : 본래 이름은 성주사를 말한다.
밝혀서⁵⁾ : 계속하여 밝힌다는 뜻으로, 임금의 학문이 성현의 경지에 접근해 가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서 문왕의 덕을 찬양하여 “거룩하신 문왕이여, 계속하여 밝히고 공경하였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법우⁶⁾ : 초목을 적시는 단비 같은 부처의 교법敎法을 말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의 〈대법송(大法頌)〉에 “자운은 은택을 토해내고, 법우는 서늘함을 드리운다.[慈雲吐澤, 法雨垂涼.]”라고 하였다. 《漢魏六朝百三家集 卷82下 大法頌》
주무⁷⁾ : 등암장로의 신축 개축 집물한 공을 가리킨다. 《시경》 〈치효(鴟鴞)〉에 “하늘에 구름이 끼어 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주워다가 문을 칭칭 감는다면, 이제 너희 땅에 사는 인간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기랴.[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고 하였다.
김한규⁸⁾ : 남전 김한규(1868 ~ 1936)의 휘는 한규(翰圭), 법명은 광언(光彦), 호는 남전南泉, 자호는 우두산인牛頭山人·백악산인白岳山人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아버지는 병용炳鎔,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동에서 태어났다. 7세부터 경상북도 안동군 석적면 거문간동 사숙에서 서송재徐松齋의 문하로 들어가 12년간 한학을 배웠다. 이 기간 동안 《사략》과 《통감》 《고문》《소학》 《논어》 《중용》 《맹자》 등을 12년간 수학하였는데, 이때 시(詩)와 서(書), 백가(百家) 등의 내용들을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1885년 가야산 해인사 신해(信海)에게 출가한 뒤 백련암에서 정진하여 완허 장섭(翫虛仗涉의 법을 이었다. 김천 청암사에서 혼원 세환世煥에게 《사집》 《능엄경》 《기신론》《반야경》 등을 배웠고, 회응晦應에게 《사교》 《선문염송》 《화엄경》 《전등록》을 배우면서 명필로 이름났다. 1904년 해인사 주지로 취임하여 승풍을 바로잡고 사찰을 정비하였으며 선종 포교에 힘을 기울였다. 1908년에는 해인사 금강계단에서 제산으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받았다. 1911년부터 동래포교소와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 등에서 포교사로 활동하였고, 도봉·석두·성월과 함께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을 세웠다. 이후 직지사 조실, 통도사 보광전 주석 등을 지냈으며, 당대의 고승 경봉鏡峰과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1936년 선학원에서 나이 69세,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보봉준표와 석주·일부 등의 제자를 두었다.
권현權現⁹⁾ : 권현權現이란 본래 신라 사람 일라(日羅)로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갔다가 죽어서 신(神)이 되었다 한다. 61년 갑신(甲申)에 고구려(高句麗)가 개국하였다. 《星湖先生僿說卷之十八》 〈經史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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