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669-1번지에 위치하는 청계서원靑溪書院은 인접한 남계서원灆溪書院으로 인해 오히려 알려지지 못한 경우이다. 거의 모든 방문객들이 세계의 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만 방문하고 청계서원으로는 잘 가지 않는다. 몇 번의 방문에도 청계서원을 답사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다른 분들이 남계서원에서 해설을 듣는 동안 홀로 청계서원을 방문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6호로 등재된 청계서원靑溪書院은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1464∼1498)을 기리는 서원이다. 1861년 청계정사靑溪精舍를 유지에 세웠고 1921년 중건하면서 청계서원靑溪書院이라 했다. 인접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은 남계천灆溪川 앞에 세웠다고 이름했는데 청계靑溪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남계灆溪보다 더 푸른 빛을 발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한다.
靑溪書院記
天地至大也 日月至明也 人於其間參其大 而幷立爭其明 而同耀者惟道與義 而已天人卽一也 天地之通塞 日月之顯晦皆由乎 此道之廢興存亡 則不可以一日不講 其道尊其人者亦明矣 嗚乎惟我文愍公 濯纓 金先生亦 百世之師也 其淵源之正 道德之邃 文章之卓越 忠義之正直 炳郞乎日星 而戊午之禍尙忍言哉 盖此靑溪精舍之創 樂與吾先子一蠹道之志 而卽先子之所 命名者也 史禍連慘舍因廢 而耕牧相禪行旅 咨歎莫不惕 然起敬者 厥有三四百年于玆矣 歲丙午域中儒林 慨然于斯重建 是舍者亦出於地 不忍廢水不忍荒之意也 宋子有言先生生乎 程朱之後 而又與寒暄一蠹諸老先生 磨礱浸灌 則其擇之精也 在昔先賢 一嘯詠一逝息之地 無不起院 而祀之慕 况此先生 平日磨礱之地乎 相與謀曰 盍建祠于舍後 以亨先生之靈 始役於丁巳 告功于辛酉 而改額曰 院寔後學景賢 俎豆之所 不能無權宜者也 噫囊者著雍撤院之後 復設此擧雖若違格 而苟無悖於理 則不害 爲義起之常 况又先帝 壬午綸音 忠賢不祀 是子之罪大哉 皇言之炳炳者乎 於戯數百載 未皇之誠 於是奐焉輪焉 而與灆院之廟相捷乎 一席之地 則恰似乎 當日兩先生講磨 切偲之源 源而又於春秋 邊豆之薦 昭昭之靈 鶼蟨相將同時陟降 儼然若一堂之亨 則先生之格 思於是乎 妥寧後學之景仰於是乎 依歸吁亦盛矣哉 盖尊先生者所 以慕先生之道與義也 今諸生之居 是院者實心 相與實學 相究於動靜 語黙涵養省察之間 于以體先生之道 與義則雖九野 玄黃之極 先生之道 賴以不墜 吾黨之振 作將有根底于 一線之陽 而已塞之天地 已晦之日月 庶幾復明 於今日則先生之道 尤有光焉而斯院之義 起亦無負乎 先帝之遺旨矣 可不戒哉 可不勉哉 院中章甫 以余一蠹之后 託記實曰 雲仍若士林 各殫微誠 而物力之擔夯乎 願末者金永珪金炳坤云也
歲上章敦牂仲秋下浣
後學 河南 鄭承鉉 記
청계서원기靑溪書院記
천지天地는 지극히 크고 일월日月은 지극히 밝은데 사람은 그 사이에 있어 그 큰 천지에 참여하여 삼재三才로 병칭幷稱케 되고 그 밝은과 같이 빛나는 것은 천리天理인 도道와 의리義理가 있음으로 하늘과 사람이 곧 동일체同一體인 것이다. 천지의 통색通塞함과 일월의 회명晦明이 모두 이 도의 폐흥廢興과 존망에 연유되는 것이니 일일이라도 이 도를 강명講明하며 이 인간을 존상尊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호라! 우리 문민공文愍公 탁영 김선생은 백세의 사표師表이시니 그 연원이 바르고 도덕道德이 깊으며 문장이 탁월하고 충의忠義의 정직함이 일성日星같이 밝은데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이 청계정사靑溪精舍를 창립함에 우리 선조 일두一蠹와 가는 길과 뜻하는 바가 같이 한곳이며 선조께서 이름 지은 곳이다. 그런데 사화史禍의 참혹함에 이어 정사도 폐허가 되어 경지와 방목장放牧場으로 전해옴에 길가는 행려들이 창연悵然히 여겨 온지가 우금삼사백년于今三四百年이더니 병오丙午년에 향도유림鄕道儒林들이 이를 개연慨然히 여겨 정사를 중건하였음은 유지遺址를 보존하려는 뜻이 있었음이다. 송우암宋尤庵 선생이 말하되 선생이 정자程子·주자朱子 뒤에 나서 김한훤당 정일두 등 여러 노선생과 더불어 같이 공부하고 뜻을 상통하였으니 그 택우擇友의 정일精一함이 옛날 한나라와 당나라 사람들과 다를 것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참으로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옛날에 선현先賢들이 소영嘯詠하고 서식逝息한 곳에 모두 서원을 지어 제사지냈으니 하물며 선생이 평일에 공부하던 곳이니 그대로 방치放置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서 모의하여 정사 뒤에 사우를 세워 선생의 영靈을 봉향奉享할세 정사丁巳년에 시공하여 신유辛酉년에 준공하고 정사精舍한 액호額號를 서원으로 고쳤으니 이것은 후학들이 선현을 경모함에 수시변통隨時變通한 처사處事일 것이다. 오호라! 옛날 저옹著雍(무진戊辰)년에 훼철毁撤된 것을 복설復設하는 것이 실격失格인 듯하나 의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의기義起하는 것도 무방無妨할 것이요 또한 임오년에 고종황제께서 윤음綸音을 내려 말씀하되 충현을 불사不祀함은 나의 허물이라 하셨으니 황제의 말씀이 크고도 분명하도다. 오호라! 수백년간 이루지 못한 정성이었는데 이제 밝고 훌륭한 모습을 드러내어 남계서원사우灆溪書院祠宇와 서로 인접해 있으니 옛날 양선생이 서로 강론하여 서로 경계하는 것 같고 또한 춘추향사春秋享祀 때 소소한 영령이 함께 강임降臨하여 일실지내一室之內에 같이 흠향하는 듯하니 선생의 강임도 편하실 것이요 후학의 경모하는 마음도 의귀依歸할 곳이 있을 것이니 이 얼마나성盛한 일이었는가. 대저 선생을 존모尊慕함은 곧 선생의 도학과 의리일 것이다. 여러 선비들이 이 서원書院에 기거起居하는 분들은 실심실학實心實學으로 서로서로 갈고 닦아 동정動靜과 어묵語黙을 함양하고 성찰省察함에 선생의 도학과 의리를 체득하게 되면 천지가 번복할 지라도 선생의 도와 의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요 우리들의 진흥振興함도 이어져 일선一線의 양명이 비치어 천지일월이 다시 밝아 빛날 것이며 서원의 복원함이 선제先帝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서로서로 경계하고 힘쓸지어다. 원중院中의 여러 선비들이 나를 일두一蠹의 후손이라고 기문記文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자손들과 사림들이 각각 성금誠金을 내었고 시종간始終間에 물력과 공사를 담당한 자는 김영규金永珪와 김병곤金炳坤이라 하였다.
경오년 중추하완(8월하순)
후학 하남 정승현 쓰다.
출처
함양누정지-함양문화원/대보사(200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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