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북면 월백리 의령남씨 모목재 慕睦齋

천부인권 2020. 9. 29. 06:46

2019.4.22. 모목재 대문 추열문追悅門 모습


의창구 북면 월백리 447-1(백월로277번길 16-7)은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재실齋室인 모목재慕睦齋가 위치한 곳이다. 모목재는 임진왜란 후 경기도에서 이곳 월백리로 은둔한 둔일遯逸 남분南玢을 제향하는 곳으로 400여년이 흐른 후 1964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대문에는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가 쓴 추열문追悅門 편액이 걸렸고 본실은 모목재慕睦齋라 했으며 5개의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는 부인찬미문夫人贊美文과 모목재기慕睦齋記 및 모목재상량문慕睦齋上樑文 등이 걸려 있다. 

 

추열문追悅門 편액
모목재慕睦齋 전경
모목재慕睦齋 편액

海山 李殷春
睦於同族慕其先 일가끼리 화목하고 그 선조 생각하는 
慕睦高名亘萬年 모목慕睦이라는 높은 이름 만년을 이어가리
依舊家規敦孝友 오래된 가문의 법도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고
至今村俗襲淳全 지금까지 마을 풍속 순수하고 온전하게 이어지네
靑山秀麗藏身後 청산은 수려하여 죽은 후 묏자리 있고
碧瓦崔嵬照眼前 푸른 기와 높이 서서 눈앞에 빛나구나
南閥幸居南栢里 남씨 문벌 다행이도 남백리에 살게 되어
愛如蜀栢世相傳 촉백蜀栢같이 사랑하며 대대로 이어가리

 

此瞻月岳如人拱揖
出恭入孝後孫準程
崇義敦仁道德俱行
世代繼承花樹自成
西望盤湖映我心誠

 

부인찬미문夫人贊美文
모목재기慕睦齋記

 

慕睦齋記【甲辰年】 [해문-조여 이현호]

南之氏宜寜者 綦盛於國初 厥有寶文閣提學諱實 卽領相忠景公之弟也 至其來孫諱玢 當壬辰亂 自圻甸避遯于昌原之南白里 號稱遯逸 公子孫 仍世居之 今十餘代而爲家至百餘甍 中間文獻之不足 有可慨恨者 旣又爲生計所驅轉 移他方者 甚多 冑嗣廷周 聚其族而謀曰 以吾姓之閥閱於東方而 吾族之嚮隅如此 此無他由 忽於所當事故也 自吾遯逸公之墓 于是歷四百年 而舊碣磨泐 幾無以考其遺蹟 旣不容不汲汲改竪 而諸族之蕩析難居者 亦不可無歲時團會之所 每霜露香火之餘 燕私以盡歡而胥講惇睦之誼 不亦爲吾人之所當亟圖者乎 衆皆一辭贊美 無或違者 於是咸皆競趨發力 起一齋墓下里畔 經始於癸卯之秋 而明年春季竣工 工旣訖 其族弘熙君 以其門議來要余爲記 余謂南氏之爲其善矣 遠而不忘其本 疎而視之如一 傳曰 葛藟猶能庇其根 慕先之謂也 詩曰 敦彼行葦 牛羊勿踐履 方苞方體 維葉泥泥 睦族之謂也 范文正公有言 吳中宗族 於吾固有親疎 自吾祖宗視之 均是子孫 是則睦族之道 固自慕先而推之 是齋之名以慕睦 其亦可矣夫 因爲之書以朂之
龍集甲辰蜡月中浣 義城 金榥 記

 

모목재기 慕睦齋記                    

 

  의령남씨는 조선개국 초에 몹시 성대하였다. 의령남씨 중에 보문각 제학 휘 실實은 바로 영의정인 충경공忠景公¹⁾의 아우이다. 래손²⁾ 휘 분玢에 와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경기도에서 창원의 남백리로 은둔하여 호를 둔일遯逸이라고 하였다.
  공의 자손이 이때부터 대대로 의령에 살게 되었는데, 이제 10여 대이고 집안이 100여 집에 이르게 되면서 그 사이에 문헌文獻³⁾이 부족해졌고, 개탄할 만한 점은 더욱 생계에 내몰리게 되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 간 사람들이 몹시 많았던 것이다.  
  종손인 정주廷周가 그 집안사람들을 모아서 계획하여 말하기를, “우리 성씨가 우리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가문이었는데, 우리 집안이 외딴 구석에서 이 모양이 되었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없고 집안일을 맡는데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둔일공의 묘소가 이제 400년을 지나게 되자 오래된 묘비가 닳고 갈라져서 거의 공의 남은 자취를 살펴볼 방법이 없으니, 이미 비석을 다시 세우는데 급급해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집안사람들 중에 뿔뿔이 흩어져 함께 있기 어려운 사람들도 세시歲時에는 단합하는 곳도 없어서는 안 되고, 해마다 가을에 제사지낸 뒤⁴⁾에 사적으로 잔치하면서 모두 기뻐하며 서로 돈목의 우의를 익히는 것도 빨리 우리 종인들이 빨리 도모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자 모인 종인들이 모두 한마디로 찬미하고 혹시라도 거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다투어 달려가고 힘을 보태어 묘소 아래 마을 가에 재사를 세웠다. 계묘년(1963) 가을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1964) 봄(3월)에 준공하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 종족인 홍희弘熙 군이 집안의 의논이라고 하며 나에게 기문을 지어주기를 요청했다. 
  내가 말하기를, “남씨들이 그 선善을 실천함이로다. 오래되어도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멀어져도 뿌리를 살피는 것이 한결같다.” 하였다. 
  옛 기록에 말하기를, “칡넝쿨이 그 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은 선조를 사모함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에 말하기를, “수북한 저 길가의 갈대, 소와 양이 밟지 않으면 바야흐로 움트며 형체를 이루어 잎이 부드럽고 윤택하리라.”⁵⁾고 한 것은 집안을 화목하게 함을 말한 것이다. 
  범문정공⁶⁾이 말하기를, “오현吳縣의 종족은 내 입장에서는 진실로 가깝고 먼 차이가 있지만, 우리 조종祖宗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자손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종족을 화목하게 하는 도리는 진실로 선조를 사모하는 데서부터 미루어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재사의 이름을 모목慕睦으로 이름 짓는 것도 좋다.” 이로 인해 이 기문을 짓고 힘쓰게 하노라.
  갑진년(1964) 12월 중순에 의성 김황이 기문을 적다.

【주석】
충경공忠景公¹⁾ : 충경공은 남재南在이다. 남재의 부친은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경렬공景烈公 남을번南乙蕃이다. 그는 고려말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조선개국에 참여하였다. 아들로 충경공 남재南在는 영의정을, 강무공 남은南誾은 판상서사를, 목재공 남실南實은 보문각제학, 남지南贄는 우의정을 지냈다. 남재의 아들인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는 태종의 부마로 태종의 따님인 정선貞善 공주에게 장가들어 아들 남빈南份을 낳았고 남빈南份의 아들이 남이南怡 장군이다.  남이南怡 장군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손자이다.
래손²⁾ : 래손來孫은 현손의 아들, 즉 5세손을 말한다. 먼 손자나 일반적인 후손을 일컫기도 한다
문헌文獻³⁾ : 문은 기록 자료를 말하고, 헌은 전해 줄 인물을 말한다. 공자가 “하나라 예를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기나라에서 증거 자료를 찾기가 어렵고, 은나라 예를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송나라에서 증거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이는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문헌만 충분하다면 내가 실증할 수가 있다.(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라고 했다. 문헌에 대해서 주희(朱熹)는 “문은 전적을 가리키고, 헌은 현인을 가리킨다.(文, 典籍也 獻 賢也.)”라고 풀었다. 〈팔일八佾〉 《논어》 
제사지낸 뒤⁴⁾ : 상로향화霜露香火는 가을 제사인데,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놀라고 슬퍼하는 효성을 말한다.  “가을에 서리가 내린 뒤에 군자가 밟고서 반드시 서글픈 마음이 생기니 그 추위 때문이 아니요, 봄에 이슬에 젖으면 군자가 밟고서 반드시 놀라는 마음이 생기니 마치 부모를 다시 뵐 듯하기 때문이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라고 하였다.  〈제의祭儀〉 《예기》
윤택하리라.⁵⁾ : 《시경》 〈대아大雅 행위行葦〉에 나온다.
범문정공⁶⁾ : 중국 북송 때의 학자인 범중엄范仲淹(989 ~ 1052)으로, 자는 희문希文이고,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시문 등을 모은 《범문정공집范文正公集》이 있다.

 

모목재상량문慕睦齋上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