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함양박씨 영사정 永思亭

천부인권 2022. 5. 12. 16:53

2022.5.10.함양박공숭모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352(금당실길 127)에 함양박씨 금당 입향조 박종린(1496~1553)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추원재 옆 영사정永思亭은 그 후손들이 1940년에 세운 정자이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141m, 좌표는 36°41'38"N 128°246'31"E를 가리킨다.

 

2022.5.10.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함양박씨 영사정永思亭 전경


영사정永思亭은 입향조 박종린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금당실의 함양박씨 문중 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정자이다. 건립 내력과 취지를 담은 영사정기에 의하면, 정자의 이름은 『시경』 대아大雅 하무 편의 永言孝孝思維(길이 효도할 마음을 생각하니, 효도하려는 생각이 준칙이 됨이라)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영사정의 건물과 담장 등의 모양을 보면, 상주에서 박눌이 다섯 아들을 공부시켰던 모정과 유사하다. 이는 벼슬에 올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 박종린의 심정을 후손들이 짐작하여 담은 것이다.

 

영사정永思亭 편액

영사정永思亭을 방문하게 된것은 창원문화원 답사에 의한 것이지만 창원향토사연구회의 일원으로 참석하게 됐다. 몇 번에 걸쳐 예천醴泉을 답사했지만 금당실은 처음 방문하게 됐다. 정감록의 십승지 중 한곳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마을의 규모가 크고 평지에 위치하며 풍수적 비보로 소나무 숲이 마을을 에워싸도록 만든 솔 숲이 일품이었다. 

마을은 함양박씨 동원공파의 재실과 정자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었지만 단체 답사의 단점인 한 곳에 오래 머무러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운 곳이다. 인파를 따라 함께 가려 했지만 결국 따로 떨어져 나오는 길에 만난 곳이 영사정永思亭 이었고 잠시 들러 기록이 될만한 것을 사진에 담았다. 요즘 관심이 많은 기문記文을 보게 돼 옮겨 적어 본다.

 

水思亭記
易曰 肥遯無不利 詩曰 永言孝思 孝思維則 此斯亭之所以起乎 恭惟我先祖吏郎府召 杏亭府君之季子也. 大明弘治丙辰 府君生於成昌郡利安里 第五棣聯床 克遵庭訓 成就學業 俱掛蓮桂榜後 先登顯仕 光榮動京鄉 時則李朝仁明廟之際也 府君歷玉堂至銓郞 將展驥步圖鵬程 而方小人陰據勢位 居同里閈 任同朝著 此君子見幾而作之秋也 府君之小人 無係無滯 不嫌不疑 斯乃不侯終日飄然遠逝 謝宦海之風浪 携鄉園之琴鹤 遂退遯於醴泉金塘谷 能克危機 寬裕自得 其視知讒佞之必潰而不早 遜避晦迹 反為所陷辱者 不可同日而語矣 然古之人以不去其鄕為戒 府君之此舉 蓋出於不得已也 想象其心曰 村前之小邱上茅亭 吾兄弟侍先君做工大處也 亭前之鴨脚樹 先君之所種也 桑梓故里 祖父青山 森然在目 靡日不思 所以卜新基 治居第也 拓場间一邊置數間精舍 命名曰 水思 爲一生思慕之所 若使茲構離在刑業 則必與青氈舊物 保守到今也 府君已沒 數百年之間 桑溟閱劫之餘 並與當時之第宅 爲墟里荒烟 是可嘆也 嗚乎 府君位不滿德 壽不稱仁 自是無顯名於世 豈不為子孫恨也 筮遯于此地 非擇而取之也 以地靈聞於東方 府君爲始遷之祖 家世積累之功 能使子孫得其所繁延熾昌 德行也 文詞也 仕宦也 師儒儀表 圭組袍笏 不贊綿綿 皆種德之慶也 其又可忘耶 自邇通來先父兄體府君之心 爲重建之計 而屋尚未就 去庚子春 聚族而謀 迺卜築於追遠齋之東便 體制從簡 示遠中爲堂 而兩頭房前危欄而壯層棟 雖非奇絶之處 而亭中勝狀在金塘一壑洞天也 離塵垢 而清閑靜寂 俯閭閻 而平廣華麗 北峙雲巒 疊疊租峰 小白南亘 松郊落落 子葉晚翠 西來竹林清風 東望柳堤烟濃 朝暮之景 四時之興 不可勝算 在登臨者之所自得也 世已遠 而芳躅依然如昨 遺孫之思府君 亦如府君之思父祖也 見古書 則思其躬讀咿唔 見喬木 則思其手植 蒼茫風月 良宵 則思據梧吟弄泉石 幽逕 則其杖藜逍遙 見烟霞 則思其適 見魚鳥 則思其樂觸物興思其有窮乎 至於書愰而進課程 則思其侍大人而勤學 立國朝而開宦路 則其遠小人而勇退 顧各思義體先啟後 向所謂孝思維則 則無不利者也 遊於斯者 其志之哉
檀紀四二九五年千寅三月下浣
十三代孫 禧洙 謹記
十五代孫 魯濚 謹書

영사정기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너그럽고 여유 있는 은둔隱遯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길이 효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효도는 모든 사람에게 법이 되었다.”하였으니 이 두 가지 뜻이 영사정永思亭을 세우게 된 까닭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회고하건댄 우리 선조 이랑부군吏郞府君은 행정부군杏亭府君의 계자季子이시다. 명明나라 홍치弘治 병진년(1496)에 함창군咸昌郡 이안리利安里에서 오형제로 태어나서 가정의 교훈을 잘 따라서 학업을 성취해서 소과小科·대과大科에 다 함께 급제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높은 벼슬에 올라 영광이 경향京鄕을 움직였으니 때는 이조李朝 인조仁祖·명종明宗 때였다. 공께서 옥당玉堂을 거쳐 이조정랑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천리마와 봉황처럼 뜻을 펼 수 있는 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 소인小人이  권세를 잡았었는데 그 사람은 한 마을에 함께 살았었고 같은 조정에서 함께 관직에 있었으니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군자가 기미幾微를 보고 현명하게 처신할 때이었다. 공께서 그 소인과 어떠한 관계나 협의도 없었지만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미련 없이 멀리 떠나셨다. 드디어 버슬길의 험한 풍랑風浪을 버리고 아끼던 거문고를 가지고 예천 금당곡으로 은둔함으로 위기를 면하여 너그럽고 여유있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으니 참소자讒訴者나 아첨배阿諂輩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찍이 겸손하게 피하거나 자취를 감추지 못하다가 도리어 욕된 지경에 빠지는 사람과 견주어 볼 때에 이는 동일선상에서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그 고향을 버리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공께서 하신 이일은 대체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한 일이었다. 공의 그 당시의 심경을 상상해보건댄 '마을 앞의 조그만 언덕 위의 소박한 정자는 우리 형제가 선군先君을 모시고 공부하던 곳이요, 정자 앞의 은행나무는 선군先君께서 심으신 것이요, 고향 옛 마을과 부조父祖께서 계시는 청산의 무성한 모습이 눈에 보이듯이 생각에 떠오르지 않는 날이 없다.'는 이러한 심경이 새로운 터를 잡아 정착한 까닭이리라. 집 주위에 포전圃田을 개척하고 곁에 몇 칸 정사精舍를 마련하여 영사永思'라 하니 일평생 사모思慕의 처소로 삼기 위해서였다. 만약 이 정사가 별장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더라면 대대로 내려오던 유물과 함께 지금까지 보전 되어 왔으리라.
공께서 가신 후 수 백년이 지나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변하여서 그 당시의 공의 제택第宅(집과 정자)은 황량荒凉한 빈터가 되었으니 한스러울 따름이다. 아! 공께서 작위爵位가 덕망德望에 미치지 못하였고 수壽도 인자仁者에 걸맞지 못하여서 세상에 현명顯名이 없었으니 이 어찌 자손들에게 한이 되지 않겠는가? 공께서 이곳에 은거隱居하심은 금당곡金塘谷이라는 영지靈地가 동방東方에서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입향 선조로서 후대를 위하여 쌓은 공적이 너무나 컸으므로 자손들이 매우 번창하게 되었다. 덕행과 문사文詞와 사환仕宦 등이 유림儒林에 사표師表가 되고 높은 벼슬도 면면綿綿히 이어졌으니 이 모두가 공께서 덕德을 베푸신 결과이니 잊을 수가 있으랴? 근래近來에 선부형先父兄(돌아가신 부노父老)께서 정랑공의 마음을 체득해서 정자를 중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룩하지 못했더니 지난 경자년庚子年 봄에 일족一族이 모여서 상의하여 추원재追遠齋의 동편에 '영사정을 세우게 되니 체제는 간약簡約하나 전망이 좋아 멀리 바라보였고 중간에는 당堂이요 양쪽에는 방이며 앞에 난간은 높아 전체가 장엄하니 비록 기이한 절경은 아니나 정자를 중심으로 한 경치가 금당金塘 한 골짜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저속低俗함을 떠나 있으니 청한淸閑하고 정적靜寂하며 여염閭閻을 내려다보니 넓고 화려하며 북쪽 산마루에는 구름이 첩첩한대 조봉祖峰인 소백산의 아름다움이며 남으로는 솔밭이 장엄하게 이어져 푸르름을 자랑하며 서쪽으로는 죽림竹林의 맑은 바람이며 동으로는 언덕의 버들과 짙은 노을이니 아침저녁의 경치와 사계절의 감흥을 이루 헤아릴 수 없나니 이는 곧 이곳에 와서 완상玩賞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체득할 바이다.
세대는 이미 멀어져도 꽃다운 자취는 어제와 같이 완연하니 유손遺孫들이 부군府君을 생각함이 부군께서 부조父祖를 생각함과 같을 것이다. 고서古書를 볼 때엔 공께서 글 읽는 모습을 생각하고 교목喬木(큰 나무)을 보면 공께서 손수 심으셔서 푸르고 크게 자람을 생각하고 풍월風月이 아름다운 밤이면 공께서 오동梧桐에 기대어 시를 읊으심을 생각하고 수석水石이 그윽한 오솔길에는 청려장靑藝杖을 짚고 소요逍遙하시던 일을 생각하고 안개와 노을 등 산수의 경치의 아름다움을 보면 공께서 이것을 즐기셨음을 생각하고 어조魚鳥를 보거든 이 또한 공께서 좋아하셨음을 생각할 것이니 만물萬物을 대할 때에 흥취와 사려思慮가 끝이 있겠는가? 서재書齋에서 과정을 공부할 때는 대인大人(아버님)을 모시고 부지런히 공부함을 생각하고 조정에 나아가 벼슬 할 때엔 소인小人을 멀리하고 미련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니 명예를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해서 선조의 유훈遺訓을 체득하고 후손들을 잘 계도啓導하는 것이 지난번에 말한바 시경의 '효사유칙孝思維則이라 무불리자야無不利者也니 이곳에 유람하는 사람들은 이에 그 뜻을 찾아야 하리라.
1962년 임인壬寅 3월 하순 
13대손 희수禧洙 삼가 짓고, 
15대손 노형魯濚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