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350(용문경천로 874)에 대구부사大丘副使,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를 역임하고 초간일기草澗日記 등 문집을 남긴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49세 때인 1582년에 창건하고 도승지 박승임朴承任이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 현판을 써서 걸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26년에 아들 죽소공竹所公이 초가집 몇 간으로 다시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붕괴 되었다. 그후 1739년 세 번째로 세운 것이 현재의 모습을 한 초간정이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174m, 좌표는 36°42'05"N 128°22'55"E를 가리킨다.
초간정草澗亭은 금곡천金谷川이 바위를 만나 휘돌아 가는 계곡의 상부에 위치하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개천으로 바로 떨어지도록 설계를 했다. 초간정草澗亭을 받치고 있는 바위에는 자라가 새끼를 엎고 가는 모양의 야생상태 돌이 있으며 바위 벽면에는 홈을 파고 음각한 초간정草澗亭이란 글귀가 있다.
초간정草澗亭의 대문을 들어서면 처마밑에 초간정사草澗精舍란 편액이 걸려 있고 동쪽인 우측 처마밑에도 석조헌夕釣軒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맞은편에 초간정草澗亭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 동쪽 벽면에 박손경朴孫慶이 기록한 초간정사중수기草澗精舍重修記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초간정술회草澗亭述懷가 걸려있다.
초간정草澗亭은 주변의 자연을 잘 가꾼 정원처럼 이용했고 거목의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버드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가 금곡천의 물과 함께 어울려 사람들의 심신을 풀어주는 요소를 담고 있다. 조선의 문화 백미인 정자는 개인의 이상향과 닮아 있어 작고 소박하다. 결국 이런 요소가 대단위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소규모의 여행객만 품을 수밖에 없음이 않타까운 점이다. 아래에는 기문과 시운을 옮겨뒀다.
草澗亭述懷 초간정 술회
淸臺 權相一 청대 권상일
澗草靑靑不染塵 시냇가 풀잎 푸르디 푸르러 세속에 물들지 않았네
昔賢遺馥更薰人 옛 성현들 남긴 향기 다시 사람을 가르치네
遐心欲謝千鍾祿 속세 떠난 마음 천종의 녹봉을 사양하였고
小屋初成萬曆春 작은 집 막 완성되어 길이길이 봄이로구나
筆下陽秋根義理 성현의 춘추는 의리를 근본에 두었고
案頭經傳著精神 책상머리에 경전은 밝은 정신 지어 내누나
我來盥手披遺卷 공손히 손 씻고 선조의 남긴 책을 넘기니
盈溢巾箱政不貧 의기로운 마음은 정년 시들지 않으리라
草澗精舍重修記
顯皇帝萬曆壬午 草澗先生權公 解公山符歸 則就竹所西北五里所 發異地焉 其地 在脩原廣陸之隈 略不以光潁自露 獨以南北兩岸挾水而遇 爲材具 出奇逞異 無不如法 其峭嚴邃壑 嗚瀨玄潭 苔磯蘿壁之勝 皆曲有意熊 可喜可笑 公欣然爲菟裘計 置亭宇南岸上 牓曰 草澗精舍 蓋以其地舊號爲草院 故名云 公歿之踰年壬辰 爲島夷所燔劫 子竹所公 以天啓丙寅 結茅屋數架 未幾 又燬於火 仍廢不修 且數世矣 而樵客過者 猶能說草澗舊墟 至我先王五年己未 玄孫處士公鳳儀 屬諸孫 謀所以重建 謂居守 當賴僧道 就南岸盡頭 先置僧療一區 稍空其前以待亭 越明年 始建亭 病舊址 莫直其地 謂均是一區 苟選勝而得其宜 斯可矣 乃於稍空之西畔 俯潭列楹 以爲亭 僧寮之東 得廢沼 塹土斲石以新之 他如林園物色之不暇修治者 亦皆煥然改觀 俛仰興廢 可喜而悲也 嗟乎 南州之爲士大夫淵藪 固已久矣 人之智竅眼力之所同好 亦不相遠矣 地又非幽遐越絶之域 而擧皆遺之於輪蹄杖履之側 公乃一朝而獲焉 自非公令德高標 默契於玆地者 造物者 必不以千百載慳祕之物 擧而餉之 斯已難矣 自公歿以來 經變異 歷人代 積百有餘年 而責成於所不知何人 若持契而索物焉 視衛公之平泉木石 又不已多乎 水石不改 舊觀旣復 凡當日魚鳥四時之趣 名勝往還之樂 圖書涔寂之娛 皆可以慨然想慕 而獨於公名亭之義 終不可以與聞微旨 斯固未易言也 韋應物澗邊幽草一詩 警絶千古 說者謂蘇州此句 實以喩君子不得於朝 而幽獨自守 當公之世 去叔祖睡軒先生未久也 閱歷史禍 家難甫平 而時則若朝議潰裂之憂 從涓至漫 無復彌綸補綴之勢 以公之雅意林泉 倦遊名塗 其所躕躇太息 自講於潦霽行藏之間者 必非一日 竊意公於吾亭適成之日 正喜韋詩爲傍應 可以默寓己志 故遂取以爲號 非獨以舊號爲草而已也 夷考公後來宦跡 終自遠引於下邑朱墨之間 及其一日立乎其位 則雖未嘗不正笏立陛 扶植公議 以盡吾未忍便訣之誠 而其遂初之思 歸之願 溢發於銀臺夙夜之日 觀乎寂寥短篇 而公之素定 亦可知已 後之君子立世路者 登公亭而賞其名 不可以不深省之 非但爲公後者然也 嗚呼微矣 處士公之孫應鐸 謬屬余爲記 余謂斯亭之復而可書者多 遂不辭而點綴爲文 尤敢致意於卒章 以自附於闡公之旨云爾 牓題 卽朴嘯皐先生筆也 出自壬辰煨燼 復入於火 久而得諸沙礫間 當時舊蹟 獨此耳 烈火再鑠 終不能爲災 異哉 幷書之以告亭中來遊者
上之二年戊戌長至日 後學咸陽 朴孫慶 謹識
초간정사중수기(草澗精舍重修記)
황제皇帝 만력萬曆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임오壬午(1582, 선조宣祖 15)년에 초간草澗 초간선생草澗先生 권공權公께서 공주公州의 수령을 사임하시고 귀향하여, 죽소竹所에서 서북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나아가 특이한 땅을 발견하섰다. 그 땅은 긴 벌판, 넓은 언덕의 한 모퉁이에 있어서 조금도 스스로 광채를 드러내지 못했었는데, 유독 남북南北으로 양쪽 언덕이 물을 끼고 만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기이함을 드러낸 것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그 깎아지른 암석, 깊은 골짜기, 울어대는 여울, 검푸른 못, 이끼 낀 돌 더미, 넝굴진 암벽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곡진히 의태意態가 있어서, 보면서 기뻐하고 웃을만하였다. 공은 이에 흔쾌히 그곳에서 은거할 생각을 하고,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지어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 편액扁額을 달았다. 대개 그 지역의 옛 이름이 '초원草院'이었으므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공이 돌아가신 다음 해 임진년壬辰年(1592)에 섬나라 오랑캐들에 의해 불타버리게 되었는데, 아들 죽소공竹所公이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1626)에 새로 초가집 몇 칸으로 지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불에 타 버렸다. 그리하여 그대로 버려두고 수리하지 않은 것이 또 여러 세대였다. 그러나 지나가는 나무꾼이나 나그네조차도 여전히 초간정사의 옛 유허지遺墟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선왕先王(영조英祖) 15년 기미년己未年(1739)에 현손玄孫인 처사공處士公 봉의鳳儀가 여러 자손들을 모아놓고 중건하기를 도모하였는데, 머무르면서 지키는 일은 마땅히 승도僧道(승러나 도사道士)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라고 여겨, 남쪽 언덕 끝머리에 먼저 승료僧寮(승려들이 머물 집) 한 구역을 마련하고, 그 앞을 약간 비워 두어 정자를 세울 때를 기다렸다. 다음 해에 정자를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옛날 터가 적당하지 못한 것을 병통으로 여겨 말하기를, “어차피 같은 구역이니, 진실로 좋은 곳을 가려서 마땅함을 얻으면 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조금 비워 두었던 공간의 서쪽 물가에다 못을 굽어보도록 기둥을 죽 세워서 정자를 지었다. 승료의 동쪽에는 무너진 늪을 발견하여, 흙을 파고 돌을 깎아서 새롭게 만들었다. 나머지 미처 정비하지 못했던 임원林園의 물색物色도 또한 모두 환하게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 흥하고 폐한 것을 돌아보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이 든다.
아아! 남쪽 고을은 사대부士大夫들의 연수淵駭(성대하게 모인 곳)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사람의 지혜와 안목이 공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또한 서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법이며, 그 터도 깊숙하거나 높다란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모두들 그 터를 수레가 다니고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옆에 버려두었었는데, 공은 마침내 하루아침에 그것을 차지하였다. 공의 영덕令德(훌륭한 덕)과 고표高標(높은 조예)가 은연중에 이 땅과 계합契合된 경우가 아니었다. 필시 조물자造物者가 천백년 동안 아껴두었던 물건을 들어서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만 해도 이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공께서 돌아가신 뒤로 변이變異를 겪고 세대가 바뀌어 백여 년이 되었는데,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기를 미치 증표證票를 내밀고 물건을 요구하는 것처럼 한다면 위 공衛公의 평천목석平泉木石¹⁾에 비해 또 지나치지 않겠는가?
이제 수석水石은 옛날처럼 변함이 없고 정사精舍의 옛 경관도 이미 복구가 되었으니, 무릇 당시에 사계절 어조魚鳥를 바라보실 때의 아취雅趣와, 명승名勝을 오고 가실 때의 즐거움과 조용히 서사書史에 침잠沈潛할 때의 즐거움에 대해서 모두 개연히 떠올려 사모思慕할 수 있거니와, 유독 공께서 정자 이름을 지으신 뜻에 대해서는 끝내 은미한 취지를 들어볼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응물韋應物의 “간변유초澗邊幽草” 시 한 수는 천고千古를 놀라게 할 만한 절창絶唱이다. 논자論者들은 소주蘇州의 이 시구詩句가 실은 군자君子가 조정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그윽한 곳에서 홀로 자신의 지조志操를 지키는 것을 비유하였다고 한다. 공의 세대는 숙조叔祖인 수헌선생睡軒先生으로부터 아직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사화史禍를 겪고 나서 집안의 어려움은 겨우 진정이 되었으나, 당시는 조정의 의론이 갈라지는 근심이 있었다. 작은 물줄기가 큰물로 변한 것처럼, 더 이상 미봉彌封하거나 보철補綴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다. 임천林泉(자연)에 고상하게 뜻을 두고 명도名塗(벼슬길)에 노니는 것을 싫어하셨던 공으로서는 주저하고 탄식하며 스스로 요제행장潦霽行藏²⁾을 어떻게 하실 지에 대해 강구하신 것이 필시 하루 이틀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공께서는 이 정자가 마침 완성이 되던 날에 참으로 위응물韋應物의 시가 방증傍證이 되어 자신의 뜻을 담을 수 있음을 기쁘게 여기셨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취하여 호로 삼았을 것이니, 지명地名의 옛 이름이 초원草院이었기 때문이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천천히 공의 훗날의 벼슬 자취를 살펴보면, 결국 스스로 멀리 작은 고을의 주묵朱墨(공문서) 사이에서 벗어나셨다. 어느 날 걸맞은 자리에 서게 되면서부터는, 비록 항상 홀勿을 단정히 잡고 조정에 서서 공의公議(공정한 의론)를 부식扶植 하면서 자신의 ‘차마 떠나지 못하는[未忍便訣]³⁾’ 정성을 다하셨으나, 그 수초遂初의 생각⁴⁾과 귀향歸鄕하려는 바람은 은대銀臺(승정원承政院의 다른 이름)에서 밤낮으로 봉직하던 시기에 넘쳐흘렀다. 많지 않은 시문詩文들을 읽어보면 공께서 평소에 먹은 마음을 또한 알 수 있을 따름이다. 훗날 세로世路(세상, 흔히 벼슬)에 설 군자君子라면 공의 정자에 올라 그 이름을 음미할 적에 그런 것을 깊이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비단 공의 후손 된 자만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아! 은미하도다.
처사공의 손자인 응탁應鐸이 나를 잘못 보고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 정자亭子가 복원되어 기문을 쓸 사람이 많음을 말했으나, 마침내 거절하지 못하고 꾸미고 얽어서 문장을 만들었다. 특히 감히 마지막 부분에다 온 마음을 쏟아, 스스로 공의 뜻을 밝히는 역할을 자임해 보았다.
방제牓題(편액의 rmarhrcjsrhk글씨)는 소고嘯皐 박선생⁵⁾의 친필親筆인데, 임진년의 잿더미 속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불 속으로 들어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모래·자갈 사이에서 발견이 되었으니, 당시의 옛 자취는 오직 이것뿐이다. 뜨거운 불길이 두 번이나 덮쳤는데도 끝내 없어지게 만들지 못하였으니 기이하도다. 이런 사실도 함께 써서 정자에 와서 노니는 자들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정조正祖 무술년戊戌年(1778) 장지일長至日(하지夏至) 후학 함양咸陽 박손경朴孫慶(1713~1782)⁶⁾은 삼가 기록하다.
초간선생 14세손 고전번역원 경렬敬烈 번역
【주석】
위 공衛公의 평천목석平泉木石¹⁾ : 위공은 당唐나라의 이덕유李德裕를 가리키는데, 자손들에게 자신이 아끼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을 팔지 말라는 글을 내리면서, “평천장을 팔아버리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 평천의 나무
한그루, 돌 한 개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 하였던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자손들에게 정사를 잘 관리하도록 무리하게 요구를 하는 것을 뜻한다. 《唐書李德裕傳》
요제행장潦霽行藏²⁾ : 비가 오느냐 개느냐에 따라 길을 떠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시국의 상황에 따라 벼슬하느냐 은거하느냐를 결정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未忍便訣]³⁾ : 신하의 도리상 임금을 버려둔 채 은거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永懷>라는 시에, “살아서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났기에, 차마 영원히 하직할 수 없다.[生逢堯舜君 不忍便永訣]”한 데서 온말이다. 《杜詩集 卷4)
수초遂初의 생각⁴⁾ : 벼슬을 그만두고 원래 뜻했던 은거 생활로 되돌아가려는 생각을 말한다. 진(晉)나라 손작孫綽이 천태산天台山 자락인 적성산赤城山에 푯말을 세우고 은거 생활을 즐기면서 수초부遂初賦'를 지었는데, 뒤에 벼슬하다가 환온恒溫의 뜻을 거슬려 반대 상소를 올리자, 환온이 불쾌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수초부대로 살려 하지 않고 남의 국가에 대한 일을 간섭하는가.[何不尋君遂初賦知人家國事邪]" 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56 孫楚列傳 孫綽》
소고嘯皐 박선생⁵⁾ :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박승임朴承任(1517~1586)을 가리킨다. 자字는 중포重圃,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저서로 《성리유선性理類選》 등과 문집이 있다. 초간선생의 종조부인 졸재拙齋 권오기權五紀의 사위이다.
박손경朴孫慶(1713~1782)⁶⁾ :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자는 효우孝友, 호는 남야南野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여 영조英祖가 세한송백歲寒松栢이라는 교지敎旨를 내렸다고 한다. 도신道臣과 어사御史의 추천으로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문집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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