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루岳陽樓는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산 122에 위치하며 중국 후난성 웨양시의 동정호洞庭湖가 보이는 곳에 건설한 악양루岳陽樓의 경치와 비교하며 함안군 서촌리 남강南江과 함안천咸安川이 합수하는 곳의 함안천 절벽 위에 1857년 안효순安孝淳(1790~1846)이 지은 정자에 그의 손자 안정호安廷鎬(1884~1938)가 기문을 의뢰해 걸었다. 이후 6.25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1963년에 그 손자 안판수安判洙(1914년 9월 22일생)가 고쳐 지었고, 2003년 문화재청의 중수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판수의 적명籍名은 안상수安祥洙이다.
1857년 악은처사안공岳隱處士安公이 창건했을 때 의두헌倚斗軒이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전해지고 지금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1908~1991)의 글씨인 악양루岳陽樓라는 현판이 정면에 걸려있다.
2009년 방문 당시에 이곳 안내판에 의두헌倚斗軒의 이름만 전해진다고 해서 없어진 것으로 알았지만 혹시 버리지 않았다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란 의문을 가지고 살폈으나 보지 못했다. 그런데 2022년 7월에 다시 찾아가 우연히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의두헌倚斗軒 현판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게 있다. 다시 찾아확인 했더니 의두헌倚斗軒 현판이 걸려있다.
악양루岳陽樓의 기둥에는 10개의 주련이 걸려있고 내부 대들보와 도리에 2003년 제작해 걸어 둔 현판과 시편들이 있다. 조학래趙學來가 지은 악양루중건상량문, 성환덕成煥德이 지은 악양루건사실기, 작자 미상의 악양루중수기 등이 있고 악은처사가 지은 악양루 원운과 후손 안판수安判洙가 지은 악양루중수운을 비롯해 차운 시판 13개가 걸려있어 총15개의 시판이 걸려있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31m, 좌표는 35°20'06"N 128°23'54"E를 가리킨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알고 난 후는 이전의 생각을 버리게 된다는 평범한 이야기를 여행과 공부를 통해서 알아가는 재미와 배우는 것이 사람을 흥미롭게 한다. 나이가 들어서 얄팍한 지식만 믿고 공부하지 않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은 물어서라도 아는 것은 중요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해 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나이만 먹고 자기가 다 안다는 듯 뽐내며 공부하지 않는 늙은이가 아니라 오늘도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자 노력하며 늙고자 한다.
岳陽樓重建上樑文
述夫勝狀洞庭之湖 因人而乃興乃廢 名構岳陽之榭 與時而曰崇曰頹 仍舊而新 仰德而作 恭惟 岳隱處士安公 儒林之望 邱壑之姿 管領一區 林泉遙屬 滕子古事 迎送三南 車馬滿引 北海清樽 兼葭汀洲之蒼蒼 朝夕焉望美之思 煙雲魚鳥之澹澹 寤寐其忘世之懷 揣染文成家學 淵源之正 承襲竹老詩禮 人文之徽 世去人亡跡存 物換况歷 庚寅之變 被砲幾傾 那堪震兌之過 停鞭發歎 孰無宗族 烏能協謀蒐榖而圖之 何幸官民均 是傾喜捐金而矣 安氏諸彥濟濟 寒走暑奔 京鄉之人 戀戀心投 物擲倫材 於十里百里之外 輸石兮一尺二尺之強 事若有待 而成工如不日 而趣柱立層巖壁 甍浮中流半空 爲室爲堂 可以居 可以處 有軒有楹于 其倚于其徙 景槩則涵天水光 混混晝夜 清興則穿月棹曲 泛泛東西 如此江山 那易軒冕 天慳地秘 有主而輝 龜食筮從 增往而起
前人之遺澤 永爲不休 來者之間風 奮然共邁 轉睫不下馬 遷之壯觀 韜跡有類習 池之佳園 詞客騷人往來 吟哦令辰佳節 飲仙琴叟嘯遨 遊衍暖日和風 棟宇煥然翬飛 天時會於亥月 竊聞古績 文化亦云 當時保存 六兒齊歌 雙虹高舉
兒郎偉拋樑東 飽德山高茅谷東 喬木陰陰詩禮古 百年人去思無窮
兒郎偉拋樑西 碧霞山色屹乎西 湛湛魑魅難前路 寥寂悲懷雨欲迷
兒郎偉拋樑南 一帶長江來自南 逝者如斯流不舍 從知至理箇中含
兒郎偉拋樑北 囘首遙瞻天斗北 日暮天寒問幾時 可憐人淚垂胷臆
兒郎偉拋樑上 陟隆精靈應在上 信筆輝輝盡發候 悠然清韻使人爽
兒郎偉拋樑下 香稻離離野上下 爲此春酒介爾祺 峨峨冠珮魚而雅
伏願 上樑之後 風範彌著 文明再昌 龍虎相扶 有山水增彩之氣 鷰雀來賀 得風雨不動之安 既有遊息 藏修盡相 不愆交勉
咸安后人 趙學來 謹撰
악양루 중건 상량문
서술叙述하여 보노라면, 아름다운 동정호洞庭湖는 사람을 인연因緣하여 이에 하기도 흥興하고 폐廢하기도 하며, 이름난 악양루岳陽樓를 지은 것도 때를 따라 높다랗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네.
옛터로 인하여 중건을 새롭게 하였고 덕을 우러러 짓게 되었네 공손恭遜히 생각하여 보건대, 악은처사안공岳隱處士安公¹⁾께서는 유림儒林의 인망人望으로 구학邱壑같은 자태姿態였으니, 한 지역을 관장管掌하고 거느리며 임천林泉에서 소요逍遙하시며 등자경滕子景의 고사古事와 같았고, 삼남三南이 영송迎送하니 차마車馬가 길에 가득하여 북해北海가 청준清樽하더라. 정주汀洲에 창창蒼蒼한 갈대는 아침저녁으로 미인美人(임금)을 바라보는 생각이었고, 어조魚鳥에 담담澹澹한 연운煙雲은 자나 깨나 그 세상을 잊을 감회感懷가 일더라. 문성공文成公 가문家門의 학문學文에 물드셨으니 연원淵源이 정확正確하였고 죽노공竹老公의 시예詩禮를 승습承襲하였으니 인문人文이 아름답더라.
세대世代가 가면 사람도 죽지만 자취는 남으며 만물萬物도 바꾸어 진다.
하물며 경인(庚寅 1950.6.25)의 변란變亂을 거치며 포격砲擊을 맞아 거의 기울어져 가는데 있어서랴! 진震(☳)과 태兌(☱)가 지나감을 견디었으니 말채찍을 멈추고 감탄感歎을 발發하였네 누군들 종족宗族이 없겠느냐마는 어찌 능히 협력하고 도모圖謀하여 곡식穀食을 수집收集하였더니 어찌나 다행하게도 관민官民들이 균등均等하게 의연금義捐金을 기울려서 도우셨네.
안씨安氏의 여러 선비님들은 제제濟濟(늠늠한)하게 추워도 달려오고 더워도 분주奔走하였으며 경향京鄕의 사람들도 연연戀戀하게 마음을 던지고 물자物資도 던져주었네.
재목材木은 10리와 100리의 바깥에서 실어 나르고, 돌을 1척과 2척, 강強한 것도 수송輸送하였네. 일이란 기다림을 따라 성사成事됨이 있는 것이며, 공사는 하루가 아니 되어 이룩하게 되었네. 기둥은 층암절벽層巖絶壁위에 서있고, 용마루는 중류中流의 반공중半空中에 떠있네.
실室도 짓고 당堂도 지었으니 가可히 거居할 수도 있고 가히 처處할 수도 있으며, 난간도 있고 기둥도 있으니 그 거룩하기도 하고 그 사치奢侈롭기도 하였네.
경개景槩는 하늘과 수광水光에 젖어 혼혼混混(쉬지 않고)하게 주야晝夜로 흐르고, 맑은 흥취興趣는 달빛과 뱃노래의 곡조曲調를 뚫고 범범泛泛(두둥실 떠 있는 모습)히 동서東西로 떠다니네.
이와 같은 강산江山을 어찌 벼슬과 바꾸랴, 하늘이 아끼고 땅이 秘藏하다가 주인을 만나 빛나게 되었네. 거북을 먹여 점쾌를 따라 왕년往年보다 증축增築하여 재기再起하였네.
전인前人의 남기신 은택恩澤은 영원토록 아름답지 아니하랴, 찾아오는 사람들도 풍문風聞을 듣고 분연奮然히 함께 나아갔네. 눈썹을 굴리니 말에서 내리지 않고 옮겨갈 장관壯觀이였고, 위대한 행적行蹟은 류類를 익히는 못이 있는 가원佳園이었다.
사詞客과 시인詩人들이 왕래往來하며 영신令辰(좋은 때)과 가절佳節을 읊조리었고, 취객醉客과 거문고를 켜는 늙은이 소오嘯遨하며 난일暖日과 화풍和風을 노닐더라. 동우棟宇가 찬란燦爛하게 꿩이 날아 갈듯하니 천시天時가 해월亥月에서 만났고, 가만히 듣건대 고적古績과 역시 당시當時도 보존保存되었다 하더라.
육아六兒를 나란히 노래하여, 쌍무지개를 높히 들어 올리노라.
어야디야 대들보를 들어서 동東으로 바라보니, 포덕산飽德山은 높고 모곡茅谷의 東쪽에, 교목喬木은 음음陰陰하고 시례詩禮가 옛 모습인데, 백년의 사람은 갔지만 생각은 무궁無窮하구나.
어야디야 대들보를 들어서 서西쪽을 바라보니, 푸른 노을빛의 산색山色은 서西쪽에 높다랗고, 담담湛湛한 허수아비는 전로前路를 어렵게 하는데, 요적寥寂한 슬픈 회포懷抱는 빗속에 아롱하여 지는구나.
어야디야 대들보를 들어서 남南으로 바라보니, 한줄기 둘러친 장강長江은 남南으로 부터 흘러오고, 가는 자들도 이와 같이 흐름을 쉬지 않는데, 지지至知의 이치理致를 따라 개중箇中에 포함包含되었더라.
어야디야 대들보를 들어서 북北으로 바라보니, 머리를 돌려 멀리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첨앙瞻仰하니, 날이 저물고 하늘이 차가웠던 것이 묻노니 몇 번이나 되었던가, 참으로 가련하구나 사람들의 눈물이 가슴에 흘러내리네,
어야디야 대들보를 들어서 위로 바라보니, 오르내리시는 정밀精密하신 영혼靈魂은 응당 위에 계시니, 붓에 맡겨 빛나게 모두 발휘發揮하니, 유연悠然히 맑은 운율韻律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쾌爽快하게 하는구나.
어야디야 대들보를 들어서 아래로 바라보니, 향기香氣로운 벼들은 무성하게 아래위 들녘에 늘려있고, 이것으로 춘주春酒를 담아 너의 조상님께 제사祭祀드리니, 높다란 의관衣冠과 패옥佩玉은 고기처럼 우아하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한 뒤에 풍속風俗과 범절範節이 더욱 저명著名하여지고 문명은 다시금 창성昌盛하여지며, 용호龍虎가 서로 부조扶助하여 산수山水가 채색彩色을 증가增加하는 기운氣運이 있고, 연작鷰雀이 와서 하례賀禮하여 비바람에도 움직임 없는 편안함을 얻게 하옵고, 이미 유식遊息하고 장수藏修함이 있었으니, 어찌 서로가 허물하지 않고서 사귀어 힘쓰지 아니할소냐.
함안후인 조학래趙學來 삼가 지음
【주석】
악은처사안공岳隱處士安公¹⁾ : 안효순安孝淳(1790~1846)의 자字는 백원百源, 호號는 악은岳隱이다. 1857년 함안군 대산면 악양 마을 북쪽 절벽에 악양루를 지었다. 매옥梅屋 박치회朴致晦가 행장을 짖고 유고遺稿에 악양루 창수록唱酬錄이 있다.
岳陽樓重修事實記
咸州爲嶠南山水之鄕也 紫陽山自餘杭連聳十二峰 洛東江自太白長流七百里 與中州巫山洞庭湖相爲伯仲 故舊稱巴陵 在昔哲宗八年丙辰 文成公晦軒先生 后孫岳隱處士諱孝淳 始得官許 創建小樓 於紫陽山下 洛東江邊 層岩之上 扁之曰 岳陽非特取譬 於中州之巴陵 又爲東國名勝 晋陽之矗石 密城之嶺南三樓之一也 其後丁卯處士胄孫延鎬氏 重修斯樓 與藤子京之古事相同 後孫均烈 翁作記文 光復後庚寅動亂 被砲彈破壤安氏 與士林戮力再建 咸安趙學來氏 作上樑文 伊後星霜累易風 兩侵蝕棟宇毁撤 而無力復元郡之人士共 爲嗟嘆矣 郡守黃喆坤 孔昌錫 趙性暉 陳碩圭 四公努力 上告幸得 本道指定文化財 第一百九十號 得郡道費復元重修于 舊基之上簡 日告成友人 安判洙兄 與其族弟洙香君 訪余寒舍請事實記 余累辭不獲按狀記之如右其他 沙鳩之翔集 錦鱗之遊泳 芝蘭之郁 靑烟月之照明 與夫朝輝夕陰 萬千氣像 前人之述備矣 故不復道焉
東紀四千三百三十六年 癸未 陽復月中浣 昌山後人 成煥德 謹記
악양루 중수 사실기
함주가 영남의 경관이 뛰어난 마을이라 한다. 자양산이 여항으로부터 연속해 십이봉이 솟고 낙동강이 태백으로부터 길이 칠백리로 흘러서 중국의 무산과 동정호로 더불어 서로 백중伯仲¹⁾이 되는고로 예전에 철종哲宗 팔년 병진丙辰에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생晦軒先生의 후손 악은처사岳隱處士 효순孝淳께서 관청官廳허가를 얻어서 자양산紫陽山 아래 낙동강 머리 바위 위에 작은 누樓를 창건하고 이름을 악양루岳陽樓라 하니 특히 중국의 파릉巴陵만 비유한 것이 아니리요. 또 동국의 명승 진양 촉석과 밀성 영남의 셋 누로 더불어 하나로다. 그 뒤 정묘년에 처사 주손 정호廷鎬씨가 또 중수하니 등자경騰子京의 고사古事로 더불어 서로 동일하니 방후손傍後孫 균렬均烈옹이 기문記文을 짓고 광복후 경인년 동안에 포탄을 맞아서 파괴되어 안씨가 사림士林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재건再建하니 함안 조학래趙學來씨가 상량문을 지였드니 그 뒤에 성상이 여러번 바뀌고 풍우가 침식하여 동우가 훼철되었으나 복원할 힘이 없어 고을 사람들과 선비들이 같이 차탄하드니 군수 황철곤 공창석 조성휘 진석규 네공(四公)이 힘써 상고하여 다행히 본도本道의 지정문화재 제일백구십호를 얻어서 군 도비를 얻어서 복원하여 예전터 위에 중건하여 날을 가려 고유하고 우인友人 안판수安判洙 형이 그족제族弟 수향洙香군과 더불어 나의 집을 찾아와서 사실기문事實記文을 청구 하거늘 내가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장문狀文을 안찰按察하여 우右와같이 기록하고 모래, 갈매기 날아 모임과 비단고기 놀고 지초와 난초의 빛나고 푸름과 연기煙氣와 달이 비치고 밝음과 대개 아침의 햇빛과 저녁 그늘에 만천萬千의 기상氣像은 전인前人의 저술著述이 구비具備한고로 다 말시하지아니 함
서기 2003년 계미 양복월 중완에 성환덕成煥德이 삼가 기록함
【주석】
백중伯仲¹⁾ : 실력이나 기술 따위가 서로 엇비슷하여 더 낫고 더 못함이 없음.
岳陽樓重修記
歲丁卯 岳隱翁之胄孫延鎬 重修岳陽樓 屬余記之樓 翁所作也 盖翁之宇 量不局於東方嘐嘐 然墓古人上棟之書 不用當時 正朔書慶暦 四年後某甲樓 在巴陵勝壯 與中華之巴陵 無異何也 二水交注樓下浩浩洋洋 點天無碧 則可與洞庭爭 伯仲諸峰 羅列湖外 亭亭矗矗 滿地龍蟠 則不啻巫峽之十二峰翔鴊也 游鱗也 芝蘭也 煙月也 万千氣像長 爲斯樓之大觀領 人之誌樓臺也 以斯樓稱 巴陵之首者 豈有一毫浮誇哉 不但巴陵 雖謂之東國絶勝可也 不但東國 雖謂之之天下絶勝 亦無愧焉 翁之晩年 倦于管領 托鄕中士 高朴晩醒致復曰 天下勝狀當付 天下巨擘 俾子作斯樓主人 晩醒謝曰 以樓與人難 與人而得人尤難固辭 然則二公者 樓中之堯舜也 此事亦不可使登斯樓者 不知也 其爲制僅 一棟三間 斲石爲基檻外 不有一步地登臨者 皆戰兢自持迄令幾乎 百年無一人失容者 亦地靈之有異也 延鎬方落之後 刻今古詩賦 於其上髣乎 藤子京之故事 但愧記之者 非希文手 而出於翁之昆弟之孫 暗昧如均烈者也 是爲之記
악양루중수기
정묘년에 악양옹의 큰손자 정호가 악양루를 중수하고 나한테 중수기문을 부탁하는지라 이 루樓는 원래 이 어른이 지은 것이니 대개 옹의 기량이 동방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원시원한 기질로 고인을 존모하여 상량글에 당시 년월일을 쓰지 않고 경력사년후慶曆四年後 모갑某甲이라 썼다 이 루樓가 파릉巴陵에 있어서 승장勝狀이 중국의 파릉과 더불어 다름이 없음은 무엇인가? 두 물이 루樓 아래 서로 모이어 멀고 아득하게 넘실거리며 하늘 한구석도 맑지 않은 곳이 없은즉 가히 동정호洞庭湖로 더불어 백중伯仲을 다툴 것이요. 여러 봉우리가 호수 밖에 나열하여 정정亭亭하고 쭈뼛쭈뼛하여 온 땅이 용이 꿈틀거린 듯한즉 무협巫峽의 이봉十二峰같을 뿐 아니라 나는 백압白鴨 노니는 고기 꽃다운 난초 운에 어린 달빛 등 만천기상萬千氣像이 길이 이루어 큰 장관이 되며 영남인의 루대지樓臺誌에 이 루樓로써 파릉의 첫째로 한 것은 어찌 추호도 가장됨이 있으리요. 비단 파릉을 비록 우리나라의 절승絶勝이라 해도 가할 것이요. 비단 우리나라를 천하의 절승이라 해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 공公이 만년晩年에 관리管理하기가 피로疲勞할 때 향중고사鄕中高士인 박만성朴晩醒 치복致復에게 부탁해 말하기를 천하天下 명승名勝을 마땅히 천하의 가장 큰 선비에게 부쳐줄 것일세. 자네로 하여금 이루어 주인을 삼는다하니 만성晩醒이 사례하며 말하길 루樓를 사람에게 주는 것이 어려우나 줄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것임으로 굳이 사양한다니 그런즉 두 분은 천하를 사양한 루중樓中의 요순堯舜이니, 일이 또한 이 루樓에 오르는 자 가히 알지 아니하지 않을 것이다. 집의 제도가 겨우 삼간일동三間一棟이며 돌을 쪼아 터를 하여 난간欄干 밖이 일보一步의 여지餘地도 없으나 올라가 노는 자다.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몸가짐을 조심하여 거의 백년이 된 지금까지 한 사람도 실수한 자가 없으니 역시 지령地靈의 특이함이 있음이라' 정호廷鎬가 낙성落成 후에 옛날과 지금의 시문詩文 멋을 그 위에 달아 등차경蔡子京의 고사를 방불케 하나 단지 부끄러운 것은 기문을 짓는 범희문范希文이 아니고 옹의 형제와 후손인 균열均烈같이 암매暗昧한 자에게 나옴이라 이로 기문記文을 하노라
柱聯
①飽德山高茅谷東 포덕산飽德山은 높고 모곡茅谷 마을의 東쪽에 있어
②喬木陰陰時禮古 교목喬木은 어둡고 쓸쓸해 시절의 예도가 예스럽다.
③百年人去思無窮 백년의 사람은 갔지만 생각은 무궁無窮하고
④一帶長江來自南 한줄기 둘러친 긴 강江은 남南으로 부터 흘러오네.
⑤可憐人漏垂胸臆 참으로 가련하구나 사람들의 눈물이 가슴에 흘러내리고
⑥陟降精靈應在上 오르내리시는 정밀精密하신 영혼靈魂은 응당 위에 계신다.
⑦信筆輝輝盡發後 사실을 기술하여 빛나고 빛나게 모두 동원해 후대에 전하니
⑧悠然淸韻使人爽 여유있는 맑은 운율韻律은 사람들을 상쾌하게 하는구나.
⑨爲此春酒介甭祺 이것으로 춘주春酒를 담아 너의 조상님께 제사祭祀드리니,
⑩香稻離離野上下 향기香氣로운 벼들은 또렷하게 들녘 아래위에 늘려있다.
岳陽樓 原韻 악양루 원운
中夏巴陵又我先 중국 파릉의 악양루가 또한 우리보다 먼저이니
樓名以岳豈徒然 누정 이름을 어찌 악양루로 따라 짓지 않으리오
東南坼濶餘無地 동과 남으로 넓게 펼쳐진 끝도 없는 땅은
上下浮空別有天 위 아래 허공에 떠 있는 다른 세상이더라
政徯如滕來且暮 좌천된 滕子京¹⁾이 늘그막에 와서 수리했더니
文希屬范志宜宣 范希文²⁾이 그 뜻을 기리었더라
衰年任作江湖客 늙고 쇠약해 세상 나그네 되어 멋대로 떠도니
謾使時人號我仙 사람들은 부질없이 나더러 신선이라 부르더라
岳隱 安孝淳 自著 악은 안효순 스스로 적다.
【주석】
滕子京¹⁾ : 등자경은 송나라 중앙무대에서 1044년 좌천되어 악양태수로 와서 악양루를 중수했다.
范希文²⁾ : 범중엄(989년 - 1052년)은 자는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岳陽樓重修韻 악양루 중수운
古築重修水上頭 물머리에 오랜 축대 중수를 하니
巍然依舊壓江流 우뚝한 옛 모습대로 강물을 압도하네
最憐文化增新彩 더욱 새 광채 나는 문화가 가장 좋으니
更覺風光散積愁 풍광이 쌓인 수심 풀어줌을 다시 느끼네
曾是先賢薖軸地 일찍이 옛날 선현들이 은거하던 곳이요
伊今後學詠歸樓 지금은 후학들이 읊조리며 돌아가는 누대라네
巴山不讓巴陵勝 巴山은 巴陵의 승경보다 못지않으니
願得范公與共遊 원컨대 范公과 함께 노닐고 싶네
宗後孫 判洙 謹稿 종후손 판수 삼가 짓다.
*薖軸 : 현인이 은거하는 곳을 말한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고반이 언덕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고반이 높은 언덕에 있으니, 석인이 한가로이 서성이도다.[考槃在阿, 碩人之薖.……考槃在陸, 碩人之軸.]”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詠歸 : 공자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준다면 각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해 보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論語 先進》
*巴山 : 咸安의 古號.
*范公 : : 范希文. 1044년에 등자경(滕子京)이 파릉군(巴陵郡)으로 좌천되어, 이듬해에 악양루를 중수하고 범희문에게 기문을 짓게 하자,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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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借仙區洛水頭 하늘이 선구仙區¹⁾를 낙동강 머리에 빌려주니
翼然輪奐助風流 날 듯이 거룩하니 풍류를 도우도다.
長吟感興應增趣 길이 읊는 감흥에 취미가 응하고 더해지니
暢叙幽情却散愁 유정을 밝게 펴니 근심을 흩트리고 물리친다.
玉宇嵐光留故址 옥우에 아지랑이 빛은 옛터에 머물고
淸江霽月滿高樓 맑은 강 밝은 달은 높은 누에 가득하다.
殫誠重建承先業 정성을 다해 중건하니 선대 업적 계승하고
遠近儒林頌共遊 멀고 가까운 곳 유림들이 송축하며 함께 논다.
宗后孫 安洙香 謹稿 종후손 안수향 삼가 짓다.
【주석】
선구仙區¹⁾ : 신선이 살법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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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然亭子碧江頭 나는 듯한 정자는 푸른 강 머리에 있고
隱老遺風與歲流 악은공의 유풍은 세월과 같이 흐르도다.
浩浩洞庭傳四絶 넓고 넓은 동정호는 사계절을 전했고
湯湯洛水洗千愁 탕탕한 낙동강 물은 일천 근심 씻어주네.
暢舒感興曾携軸 창서에 감흥하니 일찍이 시축詩軸을 이끌고
欲述幽懷幾椅樓 깊숙한 회포를 풀고자 몇 번이나 이루에 의지했던가.
祖德孫誠成畵棟 조상 덕과 손자 정성이 아름답게 칠한 용마루를 이루었으니
騷人濟濟頌而遊 글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면서 칭송하구나.
晋州 姜秉壹 謹稿 진주 강병일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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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築斯亭洛水頭 이 누를 낙동강 머리에 중수하니
岳陽皓月自天流 악양 호월이 하늘로부터 흐르도다.
巍巍翠嶂含靈氣 높고 높은 푸른봉우리 영기를 머금고
淡淡淸江滌世愁 담담한 맑은 강물은 세상 근심을 씻도다.
聯座良朋譁把酒 어진 벗들이 좌리를 연해 앉아서 좋은 술을 잡고
扶笻騷客詠登樓 작지를 붙잡고 소객들은 시를 읊으면 이 우에 오르도다.
臨筵雅士和酬裡 자리에 다다른 선비들 화수和酬¹⁾하는 속에서
高閣朱欄不厭遊 높은 정자 붉은 난간에 염증 없이 놀구나.
外孫 載寧 李正均 謹稿 외손자 재령 이정균 삼가 짓다.
【주석】
화수和酬¹⁾ : 남이 보낸 시나 노래에 화답和答하여 갚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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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修勝迹洛江頭 훌륭한 경관의 낙동강 머리에 악양루 중수하니
天借靈區瑞彩流 하늘이 신령스런 지역 빌려주어 상서로운 빛 흐르도다.
滿眼風光尤可興 눈에 찬 풍광은 더욱 흥을 더하고
傾樽氣爽足消愁 술통을 기울여 기상은 근심을 없애는데 족하도다.
應知詠月無雙處 당연히 알 것이라 달을 읊으니 두 곳이 없고
最是騷筵第一樓 여기가 가장 좋은 떠들석한 자리로 제일 누이로다.
祖建孫揚多士頌 조상이 세우고 손자가 들 내니 많은 선비들 송축하고
古今詩客作仙遊 고금을 통해 시인 손님들 신선같이 놀고 있다.
廣州 安明洙 근고 광주 안명수 삼가 짓다.
次
重建名亭洛水頭 낙동강 머리 위에 악양루 중수하니
夕陽浮帆共東流 노을진 물 위에 뜬 배는 물과 함께 흐른다.
碧霞谷靜藏文樂 벽하 골짝 고요하여 문인들 즐거움 감추고
飽德山高散古愁 포덕산 높이 솟아 옛 시름 다 흩도다.
隣郡儒林都會地 이웃 고을 유림이 다 모이는 곳이요
咸安君子競詩樓 함안 고을 군자들이 시詩를 겨루는 악양루로다.
官民一是捐金助 관과 민이 한결같이 중수 기금 마련했고
墨客登臨賞景遊 시인묵객 등림하여 좋은 경치 상주하며 놀구나.
淸州 宋台復 謹稿 청주 송태복 삼가 짓다.
次
岳淵危榭曲江頭 악양루는 유연히 위태로운 굽은 강 머리있어
洛水悠悠續檻流 낙동강 물 유유히 이어서 난간을 들러 흐른다.
遠眺奇峰增一景 멀리 기이한 봉우리 보이니 한 경치가 더하고
近望沃野散千愁 가까이 옥야를 바라보니 일천 근심이 흩어지네
重修輪奐添山色 중수한 크고 넓은 집에는 산빛이 더하고
更捲煙霞聳古樓 다시 안개와 놀이 걷히니 옛스런 누가 솟았더라.
德祖誠孫咸頌裡 조상 덕과 손자 정성에 모두 칭송하는 속에
隱翁遺苾永天遊 악은공의 끼친 향기 영원히 하늘에 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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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補蘭亭洛水頭 낙동강 물 머리에 정자 난간을 보수하니
斗星天末照光流 북두칠성은 하늘 끝까지 비추고 빛나게 흐르도다.
先賢往迹離塵累 선현들의 간 흔적에 세속의 번거로움과 이별하고
後輩升堂忘世愁 후배들이 당에 올라 세상 근심을 잊도다.
雁陣遠山飛碧落 기러기 줄지어 먼 산 위 푸른 하늘을 날고
書聲永夜出高樓 글 읽는 소리가 긴 밤에 높은 누각에 들리구나.
岳陽勝賞罔專美 악양루 경치의 아름다움을 어찌 전하리요
多士登臨樂賦遊 많은 선비 누에 올라 즐거이 놀도다.
咸安 李繼煥 謹稿 함안 이계환 삼가 짓다.
岳陽樓 次韻
危巖絶璧下江頭 위태로운 바위는 강 머리로 내려오고
洛水蒼波自古流 낙동강 푸른 물은 예부터 흘렀도다.
出師丁男無鵲喜 군에간 오라버님 소식이 없고
沙工處女使人愁 처녀 뱃사공 노래 소리 가슴에 메이도다.
先賢已去還迷路 선현은 이미 가서 돌아올 길 아득하고
此地空餘待主樓 이곳 공허한 누에서 주인을 기다리도다.
文化財成修築訖 문화재가 되어 중수를 마치니
岳翁必應陟降遊 악은 옹이 반드시 이곳을 오르내리시며 놀겠구나.
咸安 趙性道 謹稿 함안 조성도 삼가 짓다.
次
天慳地秘曠原頭 하늘이 아끼는 비밀스러운 땅 큰 들머리에
肯構斯亭壓碧流 즐거이 누를 중수하니 푸른 물결을 누르도다.
簷外霞山衍往事 처마 밖에 안개 낀 산은 지나간 일을 느끼고
檻前洛水洗千愁 난간 앞 낙동강 물 일천 근심을 씻도다.
層巖絶壁芙蓉慔 층암 절벽은 부용모와 같고
畵棟朱欄翡翠樓 단청 곱게 한 집은 비취 같은 누로다.
何處風光如此麗 어느 곳의 풍광이 이같이 아름다우며
臨筵多士作閒遊 누 자리에 오른 많은 선비 시를 짓고 한가히 놀구나.
載寧 李燮 謹稿 재령 이섭 삼가 짓다.
次
謹修亭子洛江頭 조심스럽게 악양루를 낙동강 머리에 수축하니
高躅遺芬永世流 거룩한 유분이 영세토록 흐르도다.
半幅詩題登眺興 반폭 시를 조흥에 올라가 쓰고
三杯酒洗滿腔愁 삼배주가 가슴에 찬 근심을 씻도다.
林泉遯逸忘機叟 임천에 은일하니 늙을 기미를 잊고
經傳眈深養性樓 경전을 깊이 깊이 양성하는 이 누로다.
後裔詵詵瞻慕處 후예들이 서로 전하면서 우러러 그리워하는 곳이요
鄕邦多士作仙遊 지역 마을의 많은 선비가 신선 놀이를 이루도다.
驪陽 陳鍾三 謹稿 여양 진종삼 삼가 짓다.
次
修葺巍然洛水頭 높이 낙동강 머리에 이 루를 수축하니
翬飛鳥革彩華流 아름답고 웅장한 누각 색채가 화려하게 흐르도다.
吟來唯好登高樂 시를 읊는 것이 오직 높은 누에 오르는 즐거움을 좋아하고
醉臥那嫌落帽愁 취해서 누웠건들 어찌 모자 떨어지는 근심이 험이 되리오
爲忘塵寰頻酒酌 진환을 잊고서 자주 술자리를 찾고
喜聞絃誦每書樓 거문고 타고 글 읽는 소리 듣기 좋으며 매양 루에서 글 짓도다.
萬千遺裔同瞻慕 천만의 후배들이 함께 우러러 그리워하니
吾祖曾年咏賦遊 우리 할아버지 왕년에 시를 읊고 놀았도다.
六代孫 安炯模 謹稿 6대손 안형모 삼가 짓다.
次
重修輪奐曉原頭 거룩하게 악양루를 수축하니 들머리가 밝아오고
岳老彛儀永世流 악은공의 아름다운 거동 영세토록 흐르도다.
詩律唱酬興百趣 시와 율로 창수하니 백가지 취미가 일어나고
林泉感賞散千愁 임천에서 감상하니 일천 근심이 흩어지도다.
洛江水淨呑豊野 낙동강 물 정정하고 큰들 먹음었으니
飽德山高衛古樓 포덕산 높이높이 옛 누를 두루도다.
肯構肯堂能繼述 즐거이 누를 지어 조상의 업적 잘 이어가고
鄕隣儒士頌而遊 고을 유사들이 송축하면서 놀도다.
載寧 李芳浩 謹稿 재령 이방호 삼가 짓다.
次
岳陽皓月滿江頭 악양의 밝은 달은 강물 머리에 가득하고
洛水連天萬古流 낙동강 물 하늘과 맞닿아 만고로 흐르도다.
郁郁芝蘭增景色 성하고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는 경치를 더하였고
蒼蒼草樹散人愁 푸르고 푸른 풀과 나무는 사람의 근심을 흩는구나.
巴山勝狀誰粧地 파산의 뛰어난 형상은 누군가 꾸민 땅이요
吾祖曾年創建樓 우리 할아버지 옛날에 이 누를 창건했네.
上下浮光成別界 아래 위가 빛에 뜬 듯 별세계를 이루었으니
東南多士會同遊 동남의 많은 선비들 회동會同¹⁾하여 놀구나.
宗後孫 昌洙 謹稿 종후손 창수 삼가 짓다.
【주석】
회동會同¹⁾ :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여럿이 한곳에 모임
아래에는 옛 기문과 상량문 악은처사 묘갈명 등을 찾아서 옮겨 두었다.
重修岳陽樓記/巖棲集卷二十二
兢燮幼時已聞咸州有岳陽樓者形勝特奇及長則知其爲故岳隱處士安公之別墅而顧未之一觀也壬戌之秋七月從諸士友自鼎江之虎灘買舟乘流將至合江亭約數十里而舟過絶壁千仞之下則樓之所在也相與仰首點指嗟歎其名不虛擅顧以榜人之促棹不能暫泊而登眺爲可恨然亦頗惜其楹瓦年久多朽壞難於支持也今年夏公之玄孫廷鎬以樓之故實來曰樓今重修而一新矣願以范希文之事辱吾子余蹙然不敢當然心以爲斯樓雖勝終有遜於中州之巴陵者則余雖不足望范公之塵而泚筆亦若無大慙者抑范公之記固若宏麗雄肆盡騷人之風致而於樓之勝則但以數語了之而曰前人之述備矣其下數百言雖極意鋪叙而其歸則要形覽物者悲喜之情以引發己之所平生自誦先憂後樂之語以告天下之登斯樓者盖欲以此語配此樓與之終古而不朽也今余之記斯樓也欲求一語以配之以與之不朽而顧未之有得也然余聞岳隱公之起斯樓也不惜千金架岩鑿壁以成之旣成則與心交道友漁釣嘯嗷琴酒暢和以適其適及其衰也自知年數之不足召鄕後生朴公致馥而屬之曰江山公物也必其人可以有之吾欲以斯樓予汝汝必毋辭時朴公年尙少才名擅一時故公以是處之及朴公力辭不受然後乃止然公之讓也初不知朴公之必不受則非虛讓也朴公旣不受則環顧一鄕無可予者此其所以遂止也夫發天地之慳秘以爲有此勝不可無此構不惜重貲以成之爲江山增重者智也成之在我而守之在人得其人則可傳不得其人則可止其傳其止惟其所宜而無容私焉者仁也智以始之仁以終之君子之道備於是矣噫微斯人吾誰與歸請以此語繼范公以告世之登斯樓者可乎若其配之而不朽則吾何敢
중수악양루기
긍섭兢燮은 어릴 때 이미 함주(咸州)에 있는 악양루(岳陽樓)가 형승(形勝)이 특별하고 기이하다고 들었다. 자라서는 그것이 고(故) 악은처사(岳隱處士) 안공(安公)의 별장인줄 알았지만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하였다.
임술년(1922) 가을 7월에 여러 사우(士友)들을 따라 정강(鼎江)의 호탄(虎灘)에서 배를 구하여 타고 내려갈 때 장차 합강정(合江亭)에 이르려면 대략 수십 리가 되는데 배가 천 길 절벽 아래를 지나가게 되었으니, 바로 그곳이 악양루가 있는 곳이었다. 함께 머리를 쳐들고 지점을 가리키며 감탄하였는데,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사공이 노를 빨리 저었기 때문에 배를 잠시 대어 올라가 볼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나 그 기둥과 기와가 해가 오래되어 많이 썩고 부서져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 또 매우 애석하였다.
올해 여름에 공의 현손 정호(廷鎬)가 누대의 옛 사실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누대를 지금 중수하여 한번 새롭게 하였는데, 범희문(范希文)의 일로 그대에게 수고를 끼치려 합니다.”라고 하니, 나는 움츠리며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으로 이 누대가 비록 빼어나지만 끝내 중국의 파릉(巴陵)만 못한 점이 있을 것이니, 내가 비록 범공을 뒤따르기를 바랄 수 없겠지만, 붓을 적셔 기문을 짓는 것 또한 크게 부끄러움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또 범공의 기문은 실로 광대하고 아름다우며 웅장하고 분방하여 소인(騷人)의 풍치(風致)를 다한 것 같다. 그러나 누대의 승경에 대해서는 단지 몇 마디로 끝내 버린 채 “앞사람의 글에 갖추어져 있다.”라고만 하였고, 그 아래의 많은 말들은 비록 뜻을 다하여 펼쳤지만, 그 귀결은 요컨대 사물을 보는 사람의 슬프고 기쁜 정을 형상하여 자신이 평소 외우던 ‘선우후락(先憂後樂)’이라는 말을 끌어내어 이 누대에 오르는 천하 사람들에게 고하였으니, 대개 이 말을 가지고 이 누대와 짝하여 영원히 전하려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내가 이 누대에 기문을 지으면서 한마디 말로 짝하여 누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하려 해도 도리어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들으니, 악은공(岳隱公)이 이 누대를 지을 때 천금을 아끼지 않고 바위 사이에 나무를 걸치고 절벽을 깎아 이루었다고 한다. 이미 완성하고는 마음으로 사귀고 도의로 벗하는 사람들과 물고기 잡고 시를 읊조리며, 거문고와 술로 창화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지냈다고 한다. 노쇠함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여생이 부족한 줄 알고 고향 후배였던 박치복(朴致馥) 공을 불러 부탁하기를, “강산은 공공의 것이니, 반드시 걸맞는 사람이라야 소유할 수 있다. 내가 이 누대를 그대에게 주려 하니, 그대는 반드시 사양치 말게.”라고 하였다. 당시에 박공은 나이가 아직 젊었고, 재명(才名)을 한때에 떨쳤기 때문에 악은공이 이렇게 처리했던 것이다. 박공이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은 뒤에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악은공이 이 누대를 물려주려 할 때 애초에 박공이 굳이 받지 않을 줄 몰랐으니 빈말로 물려 주려한 것이 아니었고, 박공이 이미 받지 않게 되어서는 한 고을을 둘러보아도 물려줄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결국 그만두게 되었던 까닭이었다.
천지가 아끼고 숨겨 두었던 것을 발견하여 “이런 승경에는 이런 누대를 짓지 않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많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완성하여 강산을 더욱 값지게 한 것은 지(智)이다. 완성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고 지키는 것은 남에게 달렸으니, 알맞은 사람을 얻으면 전해줄 수 있고 알맞은 사람을 얻지 못하면 그만두어야 한다. 전해주고 그만두는 것을 오직 마땅한 대로 하여 사정(私情)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은 인(仁)이다. 지로 시작하여 인으로 마쳤으니 군자의 도가 여기에 갖추어졌다. 아, 이 사람이 아니면 내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 청컨대, 이 말로 범공의 뒤를 이어, 이 누대에 오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고하는 것이 괜찮겠는가. 누대와 짝하여 영원히 전하게 되는 것 같은 것은 내가 어찌 감히 바라겠는가.
조긍섭曺兢燮 짓다.
岳陽樓重建上樑文/晦山先生文集卷之七
巴陵古有勝狀是造物者無盡藏岳樓肇錫嘉名仍舊貫而不改作一區林壑百世菟裘竊惟岳隱安公雲夢胸衿壁立氣像依巖竇而奠礎殆若鬼造神輸俯鑑流而開牕可察鳶飛魚躍我自偶愛固無慙於動靜仁智之心世與相忘深有契於完養性情之趣桂棹蘭槳望美人兮西方樽酒座賓想豪士於北海於焉鳧鶴古渚悵然猿鳥長吟曾日月之幾何江山不可復識彼牖戶之綢繆風雨奄見飄搖太守今無子京誰能擔重修之責胄孫幸有廷鎬誓勿墜累世之謨肆値赤兔新涼之噓爰得玄龜叶從之吉事經始而勿亟幾築心上靈臺工殫巧而獻奇再起空中樓閣陽處爲堂奧處爲室謹遵三間舊規東牕迎月北牕迎風只是一般淸味於是山河動色雲物增光岸芝汀蘭鱗泳鶴翔唐人之詩賦如畫陰風濁浪猿啼虎嘯商旅之舟楫利行進亦憂而退亦憂宜有希文天下之志今之樂猶古之樂如聽軒轅洞庭之張欲識箇中奇絶須聽樑上偉頌兒郞偉抛樑東白露橫江月出空灑落胸衿無一累惺惺喚起主人翁抛樑南杜陵古院草㲯毿傳家心法於斯見竹下溪流碧勝藍抛樑西日落楓亭野樹低義士餘風今宛在龍蛇往劫鳥空啼抛樑北檻外長江流不息萬折千回那得然請君試看初來脈抛樑上倬彼中天河漢漲安得挽回注下都盪然一洗腥塵曠抛樑下禾黍連雲 萬井野惟願吾邦經界均黃童白叟無飢者伏願上樑之後岳色長崎江流有聲肯構肯堂法家之佳孫克世而風而詠聖門之高弟可親庶斯樓之不朽與長江而無窮
重修岳陽樓記/一山先生文集卷之五
我東之山川樓閣多倣中華巴陵之岳陽樓卽其一也樓之勝有古岳之所有者有古岳之所無者所有者不必重述所無者不可闕書也噫巴陵山水郡也岳陽又是第一名勝也餘航巴山雄鎭而東匡廬紫陽之幹至此而窮楓灘岳湖合流于北濂洛兩江之水襟前帶後居是而慕古慕華者不但名號形勝而已必以古人之德行風節爲慕必以中華之禮樂文物爲慕則名不負實而眞有實之名也樓古處士安公之所築也余雖未及公之世而風流雅致與孔北海陳元龍相上下云登斯樓而想像之有壁立千仞之象有胸呑雲夢之量蓋後人之不可跂及者也豈不是慕古慕華之實也耶樓久而圮公之孫壽燮氏不以力綿而誠懈仍舊爲新肯構之志可尙也已
岳隱安公墓碣銘 幷序
公諱孝淳字百源自少倜儻不羈不屑細務喜劇飮 諧笑若不可繩以法度然其居於家事親孝奉先誠 昆弟親戚之愛御物之弘制事之義卓乎其寡儔也 惟其不媚于時不見用自放於江湖巴陵之有岳陽 樓自公始樓在江上絶壁形勝甲南州賢士大夫樂 遊觀者多登臨焉公或賦詠或鼓琴至其得意酣適 遨遊萬物之表凡世閒一切榮辱得喪擧無足以嬰其心者嘗自號岳隱又號不不庵取不識不知之意 旣老益戰兢自持又改以繼懼蓋因先子多懼之扁 而思繼之也公之先出自興州晦軒安先生之後晦 軒從祀孔子廟中世有竹溪先生諱憙文科大邱府 使曾祖諱應瓚號茅窩與伯兄松竹軒諱應珍以禮 學孝行名當世祖曰宅修考曰弘翊妣碧珍李氏曾 臣之女公以乾隆庚戌生卒於憲宗丙午享年五 十九葬富村乾坐原夫人載寧李氏父潤宇公以卓 犖之資濟之仁孝之行在父母側恒愉如也友四弟 莊産均焉竹溪公餟院在順興儀節多不便跋履五 百里親奉位牌來以士論創院奉之有詩文若干篇 藏于家平淡簡確子男三人命植用植邦植命植三 子壽燮聖燮鳳燮玄孫廷鎬以公於余爲曾姑夫也 屬余銘之銘曰
巴之山兮岳之野玄壁嶄嶄兮江水汪汪猗公之磊磊而淵弘兮風流餘韻與之共長歸視其家仁孝孔 彰有揭斧堂兮刻示茫茫
출처 및 참고
한국고전종합DB-巖棲先生文集卷之二十二 / 記
咸安樓亭錄-함안문화원/대보사(201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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