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 성산구 대방동 347-1(대암로171번길 49)에는 수원백씨水原白氏 중시조 별좌공파別坐公派 옥계공계玉溪公系의 백창직白昌稷을 1세로 하여 그 후손들이 선조의 영령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재실齋室인 벽양재碧陽齋가 위치한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83m, 좌표는 35°12'52"N 128°42'38"E를 가리킨다.
창원의 역사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창원의 누정樓亭을 찾아보게 됐는데 정작 내가 살았던 지역은 천지개벽을 하여 원주민들의 재실은 없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나마 창원 주택지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재실을 발견하였고 지금에서야 창원의 본래 주인들을 찾아본다.
지금 수원백씨 재실을 관리하는 백성웅 친구의 도움으로 벽양재를 둘러보게 돼 고맙게 생각한다. 능력이 부족하여 더 많은 정보와 자료들을 제공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벽양재의 마당에 열지어 선 비문 중 입향조의 비문은 여기에 추가할 예정이다.
수원백씨水原白氏 창원 입향조는 19세 둔재공遯齋公 백홍우白弘宇(?~1640.8.6)로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할아버지 옥계공玉溪公과 큰아버지 진민공振民公, 아버지 백흥민白興民, 작은아버지 수민공壽民公이 옥사를 하자 고향 양주楊州를 떠나 이곳 창원 대방동으로 내려와 숨어 버렸다. 그리고 400여년이 흘러 가문이 드러나고 벽양재의 존재가 굳건하게 존재하고 후손이 번창했으니 수원백씨의 제례는 끝이없을 것이다.
벽양재碧陽齋 가계의 시조는 백우경白宇經으로 호는 송계松溪이며 당나라 정당문학이부상서고, 신라 선덕왕 때 대상으로 동방 백씨성의 시조이며 백락천[白居易]과 종형제 간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을 1세로 하여 2세 정남장군征南將軍 길吉, 3세 한림학사翰林學士 사유思柔, 4세 평장사平章事 휘揮, 5세 대장군大將軍 간선簡善, 6세 상장군上將軍 경신景臣, 7세 상장군上將軍 진식眞植, 8세 상장군上將軍 원정元貞, 9세 정당문학政堂文學 천장天藏, 10세 추밀원樞密院 련璉, 11세 밀직부사密直副使 인경仁景, 12세 보성현감甫城縣監 회繪, 13세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효참效參, 14세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사수思粹, 15세 왕자사전王子師傳 익견益堅, 16세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 인호仁豪, 17세 옥계공玉溪公 유양惟讓, 18세 성균생원成均生員 흥민興民, 19세 둔재공遯齋公 홍우弘宇, 20세 이발以發, 21세 시민時敏, 22세 상철尙哲, 23세 사의師義, 24세 동룡東龍, 25세 규진圭鎭, 26세 지수志洙로 이어진다.
碧陽齋刱建落成韻 幷小序
嶠南之昌原治東十里許 飛音山趾 有一齋 完矣美矣 輪焉奐焉 卽故水原白公 諱弘宇 號遯齋公墳庵也 功告訖 扁以碧陽 盖取地名之義也。考諸史乘 遯齋公之王考 別坐公諱仁豪 休庵文敬公 諱仁傑之伯氏公也 公之王考公 諱惟讓 號玉溪公 官以弘文館副提學 吏曹參議 當宣廟己丑 汝立獄逮鞫 卒于獄中 公之先考公諱興民 與伯氏公諱振民公 季氏壽民公 同被獄殞 於是 公自楊州 遯跡於昌原大方里 距今四百餘禩 而累經兵燹 杞宋無徵 然公之後裔蕃衍 世有聞人 可知其公之積德累仁矣 公之十世孫小文甫 繼述遺志 雲仍合謀鳩財 往在甲戌春 卜於此而建是齋 以伸追遠之誠 則松楸密邇之地 余惟 木之根固而枝葉茂 水之源深 而派流長 人之德厚而子孫昌 此固理之一也 且子孫之於祖先 一氣相連 聚於斯講於斯 念祖德而思無忝 貽孫謨而戒勿墜 承承繼繼 則非徒是齋 今日之作爲能事 嗣而善守則其永有光於無窮矣 繼以詩曰
碧陽扁額告功成 棟宇玲瓏瑞彩生 冀仰英靈頻陟降 願孚賢裔備經營
山川改色翬飛桷 雲物增觀鳥革甍 百世奉供香火地 勸興諸族慕先誠
西紀一九九五年乙亥春分節
傍裔孫 淡庵文簡公二十世孫 淳焯 謹撰
벽양재창건낙성운 병소서
영남嶺南의 창원시 동쪽 10여리 비음산 가장자리에 재실 한 채가 완성됐으니. “아름답구나, 높고 크며, 훌륭하기도 하구나.¹⁾” 이러하여 수원백공水原白公의 이름은 홍우弘宇요, 호는 둔재遯齋이며 공公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공사를 마치고 편액을 벽양재碧陽齋라고 한 뜻은 대개 지명의 뜻을 취함이다.
역사와 족보를 상고하여 보니 둔재공遯齋公의 증조부인 별좌공의 이름은 인호仁豪다. 휴암문경공 이름 인걸仁傑의 맏형이 된다. 공의 조부는 이름이 유양惟讓이요 호는 옥계공玉溪公인데 벼슬이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선조 기축년(1589)에 정여립鄭汝立²⁾ 모반 사건에 연류되어 옥중에서 돌아가시고 공의 선친先親 이름 흥민공興民公이 맏형인 이름이 진민공振民公과 아우인 수민공壽民公 삼형제 분이 옥중에서 참화를 당하자 이에 둔재공께서 고향 양주楊州를 떠나 창원 대방리大方里에 은거한지 400여년이라 누차 병화를 입어 유적은 고증할 수 없으나 공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대대로 성문이 있으니 공이 어진 덕을 쌓고, 어진 일을 많이 했음을 알겠다. 공의 10세손 소문小文씨가 선조의 유지를 이어 자손들과 합의하여 갑술년(1994) 봄에 이곳에 위치를 선정하여 재실을 창건하여 조상을 사모한 즉 유택과 가까운 곳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나무 뿌리가 견고하면 지엽이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깊으면 파류가 장원하고 사람이 후덕하면 자손이 창성한 것은 불변의 이치 중 하나이다.
자손과 선조에는 기운이 서로 연하여 이 재실에 모이고 이 재실에서 강하여 조상의 덕을 누되게 하지 말고 자손에게 모범을 전하여 자자손손 계속 이어간 즉 이 재실을 금일에 짓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조상의 유지를 잘지켜 이어간다면 영원무궁 빛나리라. 이어서 축시를 붙인다.
碧陽扁額告功成 벽양재를 준공하고 편액을 알리니
棟宇玲瓏瑞彩生 재실이 영롱하여 상스로운 빛이 난다.
冀仰英靈頻陟降 영령이 자주 오르내리시길 우러러 바라며
願孚賢裔備經營 현손들은 계승 경영하기 원함이라
山川改色翬飛桷 산천의 빛이 변해 서까래 훨훨 날듯하고
雲物增觀鳥革甍 풍경은 경관을 더하여 용마루는 새가 날개를 편듯하다.
百世奉供香火地 백세를 이어서 이 땅에 향화香火³⁾를 받들어 모시고
勸興諸族慕先誠 모든 자손을 가르쳐 일으켜서 선조를 사모함이라.
서기 1995년 을해 춘분절
방후손(淡庵忠簡公二十世孫) 순작 삼가 찬양하다.
【주석】
아름답구나~하구나¹⁾ : 륜환[輪奐] 진(晉) 나라 문자(文子)의 집이 완공되었을 때, 대부인 장로(張老)가 그 으리으리한 규모를 보고는 “아름답다. 높고 크며, 훌륭하기도 하구나.[美哉輪焉 美哉奐焉]”라고 노래하였다. <禮記 檀弓下>
정여립鄭汝立²⁾ : 정여립(鄭汝立, 1546년 ~ 158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다.
서인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고, 동인과 그 후신인 남인에서는 그가 모반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팽팽히 맞섰으며, 이후 사건은 기축옥사로 확대되어 천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향화香火³⁾ : 향을 피운다는 뜻으로, ‘제사(祭祀)’를 이르는 말.
벽양재 주련 碧陽齋 柱聯
羅嶽蒼霞灑若欄軒 늘어선 높은 산 푸른 노을은 재실 난간에 뿌린 것 같고
碧天雁列和哨甍過 파란 하늘엔 기러기 줄지어 화목을 살피며 용마루를 지난다.
是烝是享洋洋如在 이에 올리고 이에 제사를 받드니, 양양히 계신 듯하고
肯構肯堂承承勿皆 선조가 시작하고 후손이 업을 잇고 이으니 다함이 없다.
古家遺俗猶存令範 옛 가문의 물려준 풍속 오히려 본보기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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