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현풍읍 지리 1347(지동길 3)에는 현풍의 제1문중(第一門中)이라는 현풍곽씨玄風郭氏의 12정려각(十二旌閭閣)이 위치한다. 이곳의 좌표는 해발 29m, 위도 35°40'00"N 경도 128°25'45"E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구국의 영웅이라고 일컫는 곽재우 장군의 산재한 유적을 찾아보다가 본관本貫에는 어떠한 흔적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의 묘소를 찾아볼 생각을 해오다가 새해 과제라 생각하며 홀연히 현풍을 다녀왔다.
마을 진입로 우측에 용흥지 수변공원이 있고 마을 입구에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노거수가 우뚝 섰는데 달성군의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길 건너에 솔례率禮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요약하면 우리 마을은 현풍읍의 남쪽 끝에 있으며 대니산 밑의 으뜸가는 큰 마을이다. 1467년(세조13)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원종공신 익산군수 곽안방이 이곳에 터를 잡고 스스로 예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고 그 후손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솔례率禮”라 했다고 소개하며 곽씨의 집성촌이라 한다.
안내판 뒤쪽엔 소헌공素軒公(곽원철)과 면우곽선생(俛宇郭先生)의 비가 있으며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의 뒤쪽에 12정려각(十二旌閭閣)이 위치하며 출입문의 현판엔 삼강문三綱門이라 했고 앞에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에 대한 설명을 아래처럼 했다.
『현풍곽씨 12정려는 선조 31(1598)년부터 솔례 마을의 현풍곽씨 문중에 포상된 여각 10려, 비각 2려를 한곳에 모은 정려각이다. 정려를 내릴 때마다 정려각을 세우던 것을 영조 원년(1725) 이후 현재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6·25 때 건물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 모두 보수하였다. 그 후 2008년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한 문중에서 열 두 차례나 정려을 받은 일은 매우 드물고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정려을 받은 인물은 이조판서 안음현감 충렬공 존재(存濟) 곽준(郭䞭), 호조정랑 곽이상郭履常, 공조정랑 곽이후郭履厚, 곽이상 처 거창신씨, 유문호 처 현풍곽씨, 효자사공 곽결, 곽청, 곽형, 곽호 4형제, 별검 곽의창, 곽유창 형제, 곽재기 처 광릉이씨, 곽홍원 처 빌양박씨, 곽수형 처 안동권씨, 곽내용 처 전의이씨, 처사공 곽역성 등 16명이다.
곽준과 두 아들인 곽이상, 곽이후 형제는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여 충신·효자정려를 받았으며, 곽이상의 처 거창신씨는 이때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열부정려를 받았다. 이어 곽준의 사위 유문호 마저 전사했는데 그 처인 곽준의 딸 현풍곽씨는 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열부 정려를 받았다.
곽재훈의 네 아들인 곽결, 곽청, 곽형, 곽호는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든 부친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쳐 효자 정려를 받았다.』
12정려각의 우측부터 려각 안쪽과 현판 및 기둥의 주련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일문삼강 一門三綱
忠臣 贈 吏曹判書 行安陰縣監 忠烈公 郭䞭之閭
충신 증 이조판서 행안음현감 충열공 곽준지려
本之學問 臨變有恒 학문에 근본하니 변란을 당해서도 항심이 있어 白刃其蹈 中庸之能 흰 칼날에 죽으며 중용에도 능하셨다. 父忠子孝 夫婦殉烈 아비는 충성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딸은 절개를 위해 죽으니 一門三綱 輝暎日月 한 가문의 삼강이 일월같이 빛나도다. |
孝子 贈 戶曹正郎 郭履常 郭履厚之閭
효자 증 호조정랑 곽이상 곽이후지려
臣惟有君 子惟有父 신하는 임금만 있고 자식은 아비만 있어 忠臣之子 捨孝何處 충신의 아들이 효도를 버리고 어디에 거처할까 效死勿去 彛性之同 죽을 힘을 다하여 떠나지 아니하니 떳떳한 성품이 동일했다 伯兮季兮 黃石增崇 백씨여 계씨여 두 분 때문에 황석산이 더 높아졌도다. |
賛仰詩編
我東之禮義 皆以嶺南稱之 而嶺之三綱 一玄風蔽之 曰郭氏門矣 存齋先生忠節功烈 昭載國乘 何容更贅尤 所以歆歎者 有是祖而有是孫 一門之節烈 世世相繼 路左旌表者 如彼其卓卓 壯矣哉 郭氏之門也 并與其里 而名之 以忠孝行者 孰不式閭也哉 重爲之歆歎不已
郭氏旌門一里同 三綱今世獨玄風 昭森楣刻如星列 某孝某忠某烈中
過客 江陵 金尚重
찬앙시편
우리 동국(東國)에 예의(禮義)는 모두 영남(嶺南)을 치는데 영남(嶺南)의 삼강(三綱)은 첫째가 현풍(玄風)이니 말하자면 곽씨문중(郭氏門中)이다。존재선생(存齋先生)의 충절(忠節)과 공열(功烈)은 국사(國史)에 명백(明白)하게 실렸으니 어찌 군더더기의 말이 필요(必要)가 있을까。더욱 감탄하여 찬양할 바는 그 조상(祖上)이 있으므로 그 자손(子孫)이 있는 것이니 한 문중의 절의(節義)가 대대로 연이어서 도로변에 정려각(旌閭閣)이 그처럼 높고 뛰어나니 장(壯)하시다! 곽씨(郭氏)의 문(門)이여、그 동리(洞里)는 모두 충효(忠孝)를 행한다 이름하니 누가 경례(敬禮)하지 않을까? 거듭 감탄(感嘆)해 마지않는 바이다.
곽씨(郭氏)의 정려(旌閭)한 집 마을 전체가 다 같으니
삼강(三綱)은 금세(今世)에서 현풍(玄風)이 유독(唯獨)하네.
새겨서 붙인 현판(懸板) 별처럼 나열(羅列)한데
누구의 효(孝) 누구의 충(忠)에 누구의 열(烈) 더하였네.
과객 강릉 김상중[晋州牧使]
烈婦 贈 正郎郭履常妻 恭人居昌愼氏之閭
열부 증 정랑곽이상처 공인거창신씨지려
孤城月暈 武夫失圖 외로운 성에 달무리지니 무부도 실망했지만 簪珥婉婉 視賊如無 비녀와 귀걸이의 미인은 왜적을 무시했다. 殉忠我嫜 殣孝我辟 충성을 위해 죽은 나의 시아버지여! 효도 위해 죽은 나의 남편이여! 烈惟我熊 增光竹帛 정열을 나의 웅장으로 삼으니 역사에 빛을 더했도다. |
烈婦 學生柳文虎妻 孺人苞山郭氏之閭
열부 학생유문호처 유인포산곽씨지려
父兮就義 兄弟顚連 부친께서 의리에 이루시니 형제들도 연이어 화를 당했다. 呑聲忍死 念我所天 곡소리 삼키고 죽음을 참은 것은 나의 하느님을 생각했기 떼문이다. 所天忽崩 何用薄命 하늘로 삼은 분이 문득 돌아가심에 박복한 이 운명 어디에 쓸까? 九鼎一絲 畫邑之經 위태한 상황에 목을 맬 따름이다. |
孝子幼學 郭潔 郭浩 郭淸之閭
효자유학 곽결 곽호 곽청지려
壬辰倭亂奉父母避 匿賊猝至兄弟四人 冒白刀死之賊義之 舍其父母去事 聞旌閭第四子泂 不與焉以該曹逸其名也 余嘗覽三綱錄 有郭氏四兄弟爲 父死賊不覺嗟嘆及 莅此邑始知自 朝家命旌而第四子泂 獨漏焉盖以該曹逸 其名故不揭云可勝 惜哉
崇禎紀元後 己未五月日
縣監 趙鎭泰
瑜山有巖 有刻煌煌 유가산의 바위 굴이여 새긴 글자가 빛나고 빛나구나 誰其爲孝 郭氏四郞 그 효자 누구이런가 곽씨의 네 사내라 談笑就殲 父兮無恙 담소하며 죽음에 나아가니 아버지 무사하셨다. 捐生得仁 異類知仰 삶을 버려 인(仁)을 얻으니 짐승 같은 왜적도 우러러볼 줄 알았구나 |
孝子 贈 別檢 郭宜昌 郭愉昌之閭
효자 증 별검 곽의창 곽유창지려
宜昌五歲服父喪如成人 愈昌七歲稅服 與兄叅奉公以昌 友愛彌篤 事母盡誠 人稱天孝 歲丁丑鄕人竪碣于村前 己卯事 聞俱 贈別檢旌閭
의창(宜昌)은 5세에 부친상을 당해서 상복을 성인과 같이 입었고, 유창(愈昌)은 7세에 추복(稅服)을 입으며 형 참봉공 이창(以昌)과 더불어 우애가 더욱 도탑고 어머니 일 돕기에 진심과 성의를 다하니 사람들이 하늘이 내린 효자라 칭했다. 정축년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에 비갈을 세웠다. 기묘년에 모든 사실을 물어 듣고 별검정려(別檢旌閭)가 내려졌다.
孩提便母 五歲憂爺 두 살 때 어머니를 편케 했고 다섯 살 때는 아버지를 근심했다. 甫齔追慕 止禮不過 겨우 여덟 살에 부친을 추모하였으나 예도에 그쳐 지나치게 아니했다. 愛由天發 不以幼塞 사랑은 하늘을 말미암으니 어리다고 막히지 아니했다. 元季兩難 視此書石 원방 계방이 난형난제이니 이 비석에 쓴 글을 보아라. |
節婦啓功郞 郭再祺妻 孺人廣陵李氏之閭
절부계공랑 곽재기처 유인광릉이씨지려
萬曆 壬辰倭亂 遇賊投水而死 事 聞旌閭
만력(중국 신종) 임진왜란(1592) 때 왜적을 만나 물에 투신하여 죽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
白水洋洋 金貞玉潔 흰 물결의 출렁거림이여! 금석의 정조에 옥의 순결이라 彼獷者奴 望之氣奪 난폭한 왜놈도 바라보고 혼기를 뺏겼다. 無忝母懿 貽及令侄 모친의 아름다운 행동에 욕됨이 없으니 영향이 조카에까지 미쳤다. 馨香郁郁 蕙根蘭茁 그 향기 무성하니 혜초의 뿌리에 난초의 싹이로다. |
苞山郭氏三綱行實叙
以人之微 參天地而稱才者 由其有書 所謂五典者也 人之倫有五 而綱乎人者三也 之忠也 之孝也 之烈也 所以盡於三者之綱 而充夫參天地之實者也 坦乎其大道 懿乎其至德也 自聖賢氏歿 道德湮衰 天下靡靡焉 免於蠢蝡之歸者幾希往往有三者之樹立 而或激於氣使也 或迫於運會也 純粹明章 從容卓絕 能盡其道 全其德 而惟所遇者爲難 子孫宗族 惟男及女 咸襲先故 世綿相承 以光厥家者 爲尤難 若苞山郭氏者 可謂其人 亦可謂其門矣 其風尚于物鼓焉者乎 其砥柱乎奔流 而仰焉者乎 國家昇平日久 猝値島夷之燹 其勢土崩 畿湖嶺海俱街瘡痍 宗社蒙塵 厥惟八載 自剖符祿食之人 而下及士女群姓 咸惴惴鼠竄 以自圖者相環也 天常人彝 或幾乎熄 於是忠烈公 諱䞭 以安陰縣監 抗戰于黄石城 能死於君 公之男贈正郎公兄弟 諱履常 履厚能死於父 公之女適柳氏者 及履常妻 居昌愼氏 能死於夫 忠翼公諱再祐 倡義于火旺山 以翊復王室 石窟中四子 諱潔 諱清 諱泂 諱浩 能殞身贖父命 啓功郎諱再祺妻 廣州李氏 不污於賊 投水以死 其後則洛叟公 適丁丙子之變糾合義旅 贈別檢公兄弟 諱宜昌五歲服父喪如禮 諱愈昌七歳稅服 有諱弘垣妻 密陽朴氏之遇盜翼夫 有諱壽亨妻 安東權氏之夫死自縊 有諱乃鎔妻 全義李氏之絕命詞 嗚呼凜然且悲矣 享于院者十人 事聞旌閭者十四人 鄉士立表碣者 又二人也夫人孰不欲爲人臣而忠 爲人子而孝 爲人妻而烈 然而於郭氏之門 獨如彼盛者 豈私天之所賦歟 郭氏世家戴尼之陽 夫戴尼之山 屹特與琵瑟相望 不屈博郊曼其東 餘麓屏其南 大江經其西北 中藏其地 宜其英靈之所鍾 夫人之生聚也 錫胤監玆土 幸得屢式其閭 而未嘗不感激焉
聖上二十三年己未三月 日
縣監 張錫胤撰
檀君紀元四千二百九十七年甲辰九月 日改
포산곽씨 삼강행실 서
인간이 천지에 참여(參與)해서 삼재(三才)로 되는 것은 서경(書經)에 소위 오전(五典)이 있기 때문이다。인륜(人倫)에는 다섯 가지가 있고 인강(人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것을 실행(實行)한 것은 충·효·열(忠·孝·烈)이 되는 것이다. 삼강(三綱)을 다하면 삼재(三才)에 참여하는 것이니 그의 대도(大道)는 탄연(坦然)한 것이고 그의 지덕(至德)은 의연(懿然)한 것이다. 성현(聖賢)이 가신 후로는 도덕(道德)이 인쇠(湮衰)하여 인간(人間)이 동물을 면할 자가 거의 드물게 되었다. 순수명장(純粹明章) 종용탁월(從容卓越)하여 능히 그의 도(道)를 극진(極盡)히 하고 그의 덕을 완전(完全)히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자손종족(子孫宗族)과 남녀노소(男女老少)가 다 선고(先故)를 승습(承襲)해서 가문(家門)을 빛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포산(苞山) 곽씨(郭氏)는 참으로 그러한 가문(家門)이니 그것은 가풍(家風)이 고무(鼓舞)한것인가 분류(奔流)에 지주(砥柱)된 것인가 오랫동안 태평으로 지내오다가 졸지(猝地)에 도이(島夷)가 침입하여 그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영남기호(嶺南畿湖)가 모두 전화(戰禍)를 입고 국왕(國王)까지 몽진(蒙塵)하여 이미 팔년(八年)이 되었으나 위로 국록(國祿)을 먹는 자(者)나 아래로 뭇 백성들까지 모두들 겁내고 도망해서 도생(圖生)만 하려하니 천상인이(天常人彛)가 거의 다 없어졌던 것이다.
그때에 충열공(忠烈公) 이름 준(䞭)은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서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항전(抗戰)하다가 군국을 위해서 전사하니 그의 아들 증정랑형제이공(贈正郞兄弟二公) 이상·이후(履常·履厚)는 부친을 위해서 전사하고 또 그의 딸인 류문호(柳文虎)의 처(妻와) 그의 큰 자부 거창신씨(居昌愼氏)도 그의 부군(夫君)을 위해서 순사(殉死)하였으며 충익공(忠翼公)인 이름 재우(再祐)는 화왕산(火旺山)에서 창의(倡義)를 해서 왕실(王室)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굴속에 네 아들 이름 결·청·형·호(潔·清·泂·浩)는 모두 자신을 죽여서 부친의 생명(生命)을 대속(代贖)하였으며 계공랑(啓功郎) 이름 재기(再祺)의 부인광주이씨(夫人廣州李氏)는 왜적에게 더럽히지 않으려고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그 후에 낙수공(洛叟公)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해서 의병을 모았고 증별검공 형제(贈別檢公 兄弟) 이름 의창(宜昌)은 다섯 살에 부친상을 당해서 예법대로 집상(執喪)하였고 이름 유창(愈昌)은 여덟 살에 추복(追服)을 입으려 했으며、사인(士人) 이름 홍원(弘垣)의 부인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강도를 만나 부군(夫君)을 호위하다가 대신 죽음을 당하였고 이름 수형(壽亨)의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부군(夫君)이 작고하자 목매어 죽었으며 또 이름 내용(乃鎔)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절명사(絶命詞)를 쓰고 자결하였으니 참으로 비장(悲壯)하고도 처절(悽切)한 사적들이다. 그래서 곽씨문중(郭氏門中)에는 서원에 모신 분이 열 사람이고 조정에 정려(旌閭)된 분이 14인(十四人)이며 향리에서 비석을 세우게 된 분이 두 사람이나 되었던것이다. 무릇 인간(人間)으로서 그 누가 신하(臣下)되어서는 충성(忠誠)을 하고 자식(子息)이 되어서는 효도(孝道)를 하고 부인이 되어서는 순종(順從)을 하려고 하지 않으리오 마는 곽씨문중(郭氏門中)에서는 홀로 그처럼 장한 일이 많았으니 그것이 어찌 하늘이 사사로이 준 것일까、곽씨(郭氏)는 세대(世代)로 대니산(戴尼山)의 남쪽에 살아왔는데 이 산은 특립(特立)으로 우뚝솟아 비슬산(琵瑟山)과 서로 바라보며 동으로 뻗어나와 그의줄기가 남대강(南大江)을 둘러서 서북으로 가는 중간에 그 마을이 되었으니 그의 영령(英靈)이 소종(所鍾)한 곳이다。본인(本人)이 이 고을에 현감으로와서 다행이 이 정려에 여러번 참배(參拜)하는데 감격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정조(1799년) 기미 3월 어느 날
현감 장석윤(張錫胤) 짓다.
단군기원(4297년) 갑진 9월 어느 날 고치다.
烈婦 學生 郭弘垣妻 孺人 密陽朴氏之閭
열부 학생 곽홍원처 유인 밀양박씨지려
歲在順治 甲申七月二十五日 夜半火賊 入家內害將 及夫隨刀桿蔽被創無數親族燹觀 則口中有聲曰 得濟所天吾死無賊矣 言訖而絶事 聞于朝命旌閭
事在辛亥九月 日
女子有從 我身非身 여자에게 삼종의 도리가 있으니 내 몸이 나의 소유가 아니다. 我無生死 夫存我存 나에게는 생사도 없으니 지아비의 생존이 나의 생존이다. 霜刃閃攉 我袵我裳 서릿발 같은 칼날이 섬광을 휘두르니 나의 옷깃과 치마를 베었다. 甘心瞑目 夫子在堂 마음에 달게 여겨 눈 감으니 지아비는 집에 있도다. |
烈婦 學生 郭壽亨妻 孺人 安東權氏之閭
열부 학생 곽수형처 유인 안동권씨지려
琴瑟在御 矢以百齡 금슬이 화락하여 백년해로하려 했으나 死生顚沛 惟子是程 삶과 죽음이 위급해도 그대만을 따름이라 蒼天不應 厚夜難晨 하늘이 응하지 아니하니 두터운 밤은 새벽 오기 어려워 旣不可贖 寧我無身 이미 속죄 불가하니 차라리 내 몸을 없애리라. |
郭氏旌閭閣 次板上韻 곽씨정려각 차판상운
嶽氣川靈合處並 산천(山川)의 영기( 靈氣) 합해 이곳에 모였으니
異花嘉木不孤生 기이한 꽃과 좋은 나무 외롭게 나지 않네.
青邱禮樂三千里 청구(青邱)의 예악(禮樂) 문물 전역(全域) 삼천리에
玄郭門閭十二旌 현풍(玄風)의 곽씨문중 정려(旌閭)가 열둘이네
百世重瞻新閣貌 백세(百世)의 새 정려를 또 거듭 첨앙(瞻仰)하니
九居猶護舊堂名 구거(九居)서 옛 당명(堂名)을 오히려 보호했네
至今桑梓尼山側 여태껏 니산(尼山) 측엔 조상의 유업(遺業)있어
惟聽田家夜讀聲 전가(田家)에 책 읽는 소리는 밤에도 오롯이 들리구나.
一岩 戊戌 仲冬 南尚教 謹題
烈婦 學生 郭乃鎔妻 孺人 全義李氏之閭
열부 학생 곽내용처 유인 전의이씨지려
成婚六朔夫死 不食自盡 有絶命詞 流傳于世 事 聞命旌閭
결혼 한지 6개월에 지아비가 죽으니 스스로 음식을 끊었다. 절명사가 있으니 세세로 흘러 전한다. 모든 사실을 듣고 정려를 내렸다.
孝經有譽 崩城遽哀 효경으로 기림이 있더니 지아비 죽음에 갑자기 애처로웠다. 貞忱注薄 玄門劈開 곧은 정성 지아비에 닿아 부군의 무덤이 갈라졌다. 我顔我語 夫子之悅 내 얼굴 내 목소리 지아비가 기뻐함이라. 絶命有詞 萬古凄切 절명사가 있으니 만고에 길이 처절하다. |
別檢公閭表碣文
典籍 郭瀜 撰
進仕郭在一篆
幼學郭在三書
嗚呼人固有不年之壽 不位之貴 若郭公宜昌 字德優者 其可以不年不壽之 不位不貴之哉 德優苞山門閥 惟父祖不仕 德優年五 丁父艱 哀毀比甚 三年不御腥葷 母夫人憂其羸悴 終不得紿 孺慕至死不衰 人或語及 未嘗不對之流涕也事母盡其誠 事長兄以昌 極其敬 待諸姊諸弟姪 友愛備至 同居共財無一 毫妻子計其孝友固有大過人者 德優 眉眼如畫 儀容端雅 遇事發言 徐以理析 見人過失 婉 辭規責 如醇醪醉人 人莫不傾心 悦服及其死也 聞其訃者涕之過人之 臨其喪者哭之慟 至於悍戾無知者 皆傷惜之若非有德 優人之行者 其感人烏能及此哉 而年未滿四九 而名 不入薦書 孰謂之天有知哉歟 嗚乎痛哉 民之秉彝 好是懿德 鄉之人思所以不朽者 擬漢徐孺子 皇明易直故事 各出貰買石而表其閭曰 篤行郭公宜昌之碣 不年而壽 不位而貴 嗚呼至哉 遂爲之銘曰 嗚呼德優 優於德字不虛 得質之美兮 行之篤兮 不朽孝存兮 奚待石兮
별검공 여표갈문
전적 곽융(郭瀜) 짓고
진사 곽재일 전서를 쓰고
유학 곽재삼 글씨를 쓰다.
아아! 인간에는 실로 향년(享年)이 짧은 수(壽)도 있고 관위(官位)없는 귀함도 있으니 곽의창[郭宜昌의 자(字)는 덕우(德優)] 공(公)같은 이는 바로 그런 수(壽)와 귀(貴)를 한것이다. 덕우(德優)는 포산(苞山)에 문벌(門閥)이나 부조(父祖)가 벼슬은 하지 않았다。그의 나이 5세 때에 부상(父喪)을 당해서 애훼(哀毁)가 극심(極甚)하여 3년 동안은 어육(魚肉)을 먹지 않으니 모부인(母夫人)이 그의 수척(瘦脊)해짐을 걱정해서 말해도 듣지 안하였다。애모(哀慕)함을 죽을 때까지 치안하고 사람들이 혹 그 말을 하면 언제라도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의 모친(母親)을 섬기는 데는 그 효성(孝誠)을 다하고 장형(長兄)을 섬기는데는 그 경대(敬待)를 했으며 여러 누나와 제질(弟姪)에는 우애(友愛)가 독실(篤實)해서 동거(同居)하고 공재(共財)하여 처자(妻子)에 사심(私心)은 일호(一毫)도 없었다。그의 미목(眉目)은 그림같고 용모(容貌)는 단아(端雅)하여 사위(事爲)를 당해서 발언(發言)을 하는데는 종용(從容)하게 이치(理致)로 분석(分析)하였다. 남의 과실(過失)을 보면 유순(柔順)한 말로서 지적(指摘)을 하니 그것은 호주(好酒)가 사람을 취(醉)하게 함과 같아서 남들이 모두 마음을 기울어서 복종(服從)하였다。그가 서거(逝去)하여 그 부음(訃音)을 들은 자(者)는 눈물을 흘리고 그 문상(問喪)을 하는 자는 통곡(痛哭)을 하였으니 비록 포악무지(暴惡無知)한 자라도 모두 통석(痛惜)하였으니 과인(過人)한 덕행(德行)이 안이라면 남을 감동(感動)시킴이 어찌 이렇게 될까. 그 나이가 49세도 미만(未滿)이나 그이름이 추천(推薦)에 들지 안았으니 누가 하늘이 알고 있다고 하는가 아아! 애통(哀痛)하오이다。인간이 양심(良心)은 의덕(懿德)을 좋아하는 것이니 향토(鄕土)에 인사(人)士들은 그를 불후(不朽)하도록 하였으니 한 대(漢代)에 서유(徐孺)와 명대(明代)에 이직(易直)의 고사(故事)에 비길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各其)다 의연(義捐)으로 비석(碑石)을 새겨「독행자(篤行者) 곽의창지비(郭宜昌之碑)」라고 그 마을에 표제(表題)하였으니 그는 향년(享年)안인 수(壽)를 하고 관위(官位)없는 귀(貴)를 한것이다。아아! 지극(至極)하도다。드디어 명하노니 아아! 덕우(德優)여! 덕(德)에 우(優)하단 그의 자(字)는 허언(虛言)안이다. 질(質)이 미(美)함이여 행(行)이 독(篤)함이여! 효(孝)있어서 불후(不朽)한데 어찌 비석 기다릴까.
十二旌門重建記
直苞山治南十里許 洛江之東 戴尼山下 有村日率禮 即我清白吏先祖 始奠之基而子孫世居之庄也 村前有閭閣十二 輝煌照耀 皆我先祖之後 忠孝烈之自宣廟朝 至英廟朝所嘗褒旌者也 盖我東禮義風化之教 莫盛於我鮮朝 而凡棹楔之典 比 境在在矣 然而惟我苞山氏之旌閭 最著聞焉 何其盛也 何其壯也 若忠烈公存齋先生 學問有本 臨難舍生 竹帛千秋 黄石青青 其二子殣於孝 女婦死於烈 所謂一門三綱 自上特命 若四孝子公 當壬亂奉病父 避于巖谷 賊至欲刃 四子爭翼 而竟死一劒 異類亦感 而書其父背 曰四孝子之父 而反護之 若贈別檢二公 仲則自孩提時 猶欲便母 而不肯抱置膝上 五歲能憂父病 而含淚侍側 季則父歿時 才三歲 幼未能執喪 而甫及八歲 便欲税服 伯公止之以禮 益切孺慕 終身不衰 若四烈婦 廣州李氏 則龍蛇之亂 遇賊投水而死 密陽朴氏 則家遇強盜 身蔽其夫 夫頼以全 夫人臨絕曰 救得所天 我死瞑目矣 安東權氏 則嫁未周歲 夫病危重 晝夜禱天 願以身代 而竟未獲佑 則及經襄事 勺飲不進而死 全義李氏 則幼通孝經 孝養父母 才成婚而夫不幸 奔哭之日 巳絕勺飲 有即下從之意 父在病中 泣謂之曰 吾亦病且朝暮矣 汝其少須更 以至四朔 父歿乃作絕命詞而自絕 臨葬之日 夫塚自開 人莫不異之 遂同穴矣 以上十旌閭 并別檢公碑閣 孝子處士公碑閣 凡十二間也純廟甲子 以宗議移建 于村近東山前 憲廟戊戌重修之 高廟壬辰 又移建于村前 丁卯更移于東山前 盖因歲月之滋久 而風雨之所傷也 舊址之湫隘 而爽塏之是營也 去庚燹被半壞 辛卯臨時修理 己亥四月 僉宗合議 設護旌會 盖欲爲之保護之舉也 癸卯四月 自會中決議 重建于舊址 而甲辰三月上樑閱幾箇朔 而竣之 凡制度規模之華麗雄壯 比前則大加擴張矣 聳人耳目 咸稱苞山氏之遺風餘蔭 尚振振不匱也 其所需用 僉宗之所隨力出資者 而俱獻特誠者 禮淳 鍾凉 炳顯最也 尤爲賢勞者 柄銖鍾三也 舊有十位 復戸十結 而爲守護之策 一自世變 家國盡滄桑矣 痛歎何言 嗚呼今之世果何世 禮儀崩潰矣 綱常斁絕矣 吾門今日之役 非直爲吾姓勸獎之端也 抑亦將有補於我東 風化環復之漸否 功垂成 昇燮 鍾達甫 請余 一言于楣 顧余蔑識 猥何敢當 惟尋性所在 且事係傍先 謹書此而復之
歳甲辰流火節 傍裔昌承 謹記
居昌 愼元晟 謹書
십이정문중건기
포산군(苞山郡) 남쪽 10리에 나동강(洛東江)의 동쪽 대니산(戴尼山) 아래 한 촌마을이 있는데 솔예(率禮)라고 하니 바로 우리 청백리선조(清白吏先祖)께서 처음으로 터를 잡아 자손들이 세거(世居)하는 곳이다. 마을 앞에는 15위의 려각(閭閣)이 있으니 휘황(輝煌)하고도 찬란(燦爛)한데 모두 우리 선조의 후손(後孫)으로서 충신(忠臣)、효자(孝子)、열녀(烈女)가 선조(宣祖) 때부터 영조(英祖) 때까지 포정(褒旌)된 것이다。대개 우리 동국(東國)에 예의(禮義)의 교화(敎化)는 이조(李朝) 때가 가장 성(盛)했으니 정려(旌閭)의 각(閣)은 곳곳마다 있는 것이나、그중에서도 우리 포산곽문(苞山 郭門)의 정려가 저명(著名)한 것이니 어찌도 그리 성하며 어찌도 그리 장(壯)한가. 충렬공(忠烈公) 존재선생(存齋先生) 같은 이는 학문의 근본(根本)이 있고 국난(國難)에 생명(生命)을 받치어 천추(千秋)의 역사(歷史)에 황석(黃石)은 청청(青青)하도다. 그의 두 아들은 효로서 순사(殉死)하고 그의 여부(女婦)는 열(烈)로서 순사(殉死)하였음이 「일문삼강(一門三綱)」이니 국왕으로부터서 특명(特命)이 내렸고 사효(四孝)같은 이는 임난(壬亂) 때에 병부(病父)를 모시고 암곡(岩谷)에서 피난(避難)하다가 왜적(倭賊)이 와서 치려하기에 네 아들이 그 부친(父親)을 호위(護衛)하다가 모두 살해(殺害)를 당하니 왜적(倭賊)도 가동(感動)해서 그 등에다가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고 써붙여서 도리어 보호(保護)해 주었고 별검(別檢)으로 증직(贈職)받은 형제 이공(二公)에 형은 어릴 때부터 모친(母親)을 편안(便安)케하려고 그 무릎에 안기지도 안하고 5세(五歲) 때는 부친이 병드니 울면서, 모셨으며 아우는 3세(三歲) 때 부상(父喪)을 당해서 집상(執喪)을 못했기 때문에 겨우 8세(八歳) 때 문득 추복(追服)을 하려한 즉 백형(伯兄)이 예제(禮制)로서 말리니 더욱 추모(追慕)함이 극진(極盡)해서 일생동안 쇠(衰)하지 않았으며 사열부(四烈婦)로 말하면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임진난(壬辰亂) 때 왜적을 만나자 물에 빠져서 죽고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집에 강도(強盜)가 들어오니 자신(自身)으로 남편(男便)을 덮어서 남편은 살았으나 부인(夫人)은 죽는데도 「남편을 구(救)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겠다」고 했으며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출가(出嫁)한지 1년도 안되어 남편의 병이 위중(危重)하니 주야(晝夜)로 하나님께 기도(祈禱)해서 자신으로 대사(代死)하게 해 주소서고 하였으나 마침내는 당상(當喪)해서 장사(葬事)를 지내고는 식음(食飮)을 끊고서 죽었으며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유소녀(幼少女) 때 『효경(孝經)』을 통해서 부모(父母)를 효봉(孝奉)하고 겨우 혼례(婚禮)를 치루고 나서 남편(男便)이 불행(不幸)하게 되니 분곡(奔哭)하는 날 이미 식음을 끊고서 순사(殉死)하기로 하니 병중(病中)에 있는 부친(父親)이 울면서 말하되 「나도 또한 병이 들어 조모간(朝暮間)에 죽을 것이니 너는 조금만 참으라고 하여 사개월(四個月) 뒤에 부친이 죽으니 그때 「절명사(絶命詞)」를 짓고서 자절(自絶)하여 장사(葬事)지내려 간즉 그 남편의 묘(墓)가 갈라져 열리니 모두들 기이(奇異)하게 여겨 드디어 합장(合葬하였다。
이상의 십정려(十旌閭)에 별검공(別檢公)의 비각(碑閣)과 효자처사공(孝子處士公)의 비각(碑閣)을 다 합해서 모두가 십이간(十二間)이다。순조(純祖) 갑자년(甲子年)에 종중(宗中)의 공의(公議)로서 마을 근처(近處) 동산(東山) 앞으로 이건(移建)했다가 헌종무술년(憲宗戊戌年 1838)에 중수(重修)하고 고종임진년(高宗壬辰年 1892)에 또 마을 앞으로 이건했다가 정묘년(丁卯年)에 또 동산(東山)앞으로 이거(移去)하였으니 대개 세월(歲月)이 오래되어 풍우(風雨)에 손상(損傷)되었기 때문이다. 옛터는 좁아서 상윤(爽潤)한데 지은 것이다。지난 경인사변(庚寅事變 6.25전쟁) 때 반(半)은 파괴(破壞)돼어서 신묘년(辛卯年)에 임시(臨時)로 수리(修理)하고 기해년사월(己亥年四月 1959.4.)에 여러 종족(宗族)이 합의(合議)를 해서 호정회(護旌會)를 만들었으니 보호(保護)하기 우ㅏ(爲)함이였다. 그래서 계묘년사월(癸卯年四月)에 그 회의 결의(決議)로서 옛터에다가 중건하기로 하고 갑진년삼월(甲辰年三月)에 상량(上樑)을 하고 몇 개월(個月)을 지난 뒤에 준공(竣工)을 하였으니 그 제도(制度)의 규모(規模)가 화려(華麗)하고 웅장(雄壯)함은 먼저보다 크게 확장(擴張)이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해서 모두들 포산곽씨(苞山郭氏)의 유풍(遺風)과 여음(餘蔭)이 진진(振振)함이 변하지 않았다고 칭찬(稱讚)하였다. 그에 소요(所要)된 비용(費用)은 여러 종인(宗人)이 힘대로 출자(出資)한 것이나 특(特)히 성의(誠意)를 표한 이는 예향(禮享)、종경(鍾京)、병현(炳顯)등 3인이고 더욱 노역(勞役)한 이는 병록(柄錄)、종삼(鍾三)의 2인이다. 옛적에는 10위가 계셨는데 복호(復戶)는 십결(十結)로서 수호(守護)할 방책(方策)으로 하였으나 세도(世道)가 변천(變遷)해서 국가가 번복(飜覆)되었으니 통탄(痛嘆)함을 어찌다 말할까? 아아! 지금세상(至今世上)은 어떤 세상(世上)인가. 예의(禮儀)가 붕괴(崩壞)되고 강상(綱常)이 퇴패(頹敗)되었다. 금일(今日)에 이 사역(事役)은 우리 곽문(郭門)만이 권장(勸獎)할 것이 아니라 또한 장차(將次)는 우리나라 풍화(風化)를 회복(回復)하는데 도움이 될것이 아닐까. 공사(工事)를 마치고 승섭(昇燮)、종달(鍾達)、양군(兩君)이 내게 일언(一言)을 천(請하)니 돌아보건데 나같은 천식(淺識)으로서 어찌 감(敢)히 당할까마는 오직 양심(良心)의 소재(所在)로서 또한 방선조(傍先祖)의 일임을 생각해서 삼가 이 글을 써 올리는 바이다.
갑진(甲辰 1964) 8월 방예(傍裔) 창승(昌承) 삼가 짓고
거창 신원성(愼元晟) 삼가 글씨를 쓰다.
출처 및 참고
사림지-창원대학교 사림서당/도서출판 거북골(2016.9.5.)
현풍곽씨솔예 십이정려사적-호정회/(19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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