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至愚堂 姜來運 孝子門 지우당 강래운 효자문

천부인권 2023. 5. 1. 09:03

2020.12.6. 효자처사지우당진양강공래운지려 효자문

진주시 대곡면 광석리 42-1(진의로 1252)에는 진주강씨晉州姜氏 강래운姜來運의 효자정려각孝子旌閭閣이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39m로 표시하고 「위도35°16'40"N 경도128°10'01"E」라 표시한다. 
지우당至愚堂 강래운姜來運 효자정려각孝子旌閭閣은 대곡면사무소에서 설매리로 가는 진의로의 우측에 위치하는데 정려각에서 114m를 가면 설매삼거리가 나온다. 
정려각旌閭閣은 붉은 벽돌로 나지막한 담장을 하고 작은 철문을 달았으며, 각閣의 정면에 『효자문孝子門』이라는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1909-2001)가 쓴 현판이 걸려있다. 각閣의 내부에는 『효자처사지우당진양강공래운지려孝子處士至愚堂晉陽姜公來運之閭』라 쓴 편액에 기문記文을 적었다. 또한 7대손 강병포姜炳炰가 『지우당공정려복원사실기至愚堂公旌閭復元事實記』를 기록하고 썼다.

 

해설문
진양인 강래운姜來運의 자는 위거渭擧이고 지우당至愚堂은 스스로의 호號이다. 공은 어려서 남다른데가 있었으며 5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소년시절 이미 효행이 뛰어나 어머니를 모시면서 기쁘게 해드리고 한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힘과 정성을 다해 온갖 음식을 올렸으며, 가축을 기르고 고기를 잡고 사냥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흉년이 들어 변변치 않은 음식마저도 올리지 못하게 되면 몸소 힘든 노동을 해서 조촐한 음식을 올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가난 불구 홀어머니에 효성, 이웃 감동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는 여러 해 동안 의약을 알맞게 조절해 여러 번 효과를 보았으며, 병이 심할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 속에 넣어드려 소생시키기도 했다. 
상을 당해서는 재물과 힘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치르기도 했다. 3년 동안 시묘侍墓 살이를 하면서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 사람들이 다 효성에 탄복하기도 했다.
조정朝廷에서 효열을 표창하는 기회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천거하고자 하면 이를 만류하고 관청에서 음식을 내려도 이를 사양하니 천성이 그러한 것이다.

 

2020.12.6. 효자처사지우당진양강공래운지려

孝子處士至愚堂晉陽姜公來運之閭
晉陽紺岳山下 雪梅村姜氏居焉 姜晉山名家 世以忠孝聞有姜公 諱來運 字渭舉 至愚堂其自號也 殷烈公民瞻顯麗代其遠世也 國朝贈參議深德行稱縣監德龍我昭敬王世勳業著其五世六世 公幼有異質生五歲 而孤哀慕如成人甫成童己有偉人行孝養母氏朝夕懽侍不離側及有室家素寠竭力殫誠 以供甘旨毳畜鷄豚事魚獵 凡可資以養親者 雖老母憚也 世或儉菽水不繼嗣股肱牽車牛致洗腆 以盡懽未嘗求於人母 病沉痼積歲迎合醫藥累見神效其病革劈指再度得回甦其丁憂 喪葬不顧賞期必校焉 廬墓三年每朔望旬日 必自力於寢於墓以祭之 人咸嘆服 自朝家有孝烈彰著里丁牒報之擧志公必聞而取其牒焚之官家以羊酒轒輒辭不受其謙 抑不居其名蓋天性然矣 氣邁往每以早孤失學不得立揚顯親爲恨 終日靜坐看書 不輟尤喜 易三傳春秋伊洛等徐至 忠臣義士 激仰感慨繼之以淚 夜靜日明月 輒誦出師表楚辭 朱子封事聲韻瀏亮聳動左右當宁壬辰州人上其事以孝學蒙旌典夫孝者百行之源也 爲人子能盡其職者鮮矣 公能克殫其誠 生葬祭皆以禮式遵前訓無憾 又旁推學問歿後輿論稱誦 不己之下聖王之表闡 前世照後來吁其媺矣 昔我從先世都事公行以敬差官到 公家題溪亭一絕 至今留在間想其當日隱居行義 為一時遠近耶 欽養慕如此 余又與公之諸孫會 講好相往來如一室也 今於堅閭之日不腆文字所囑誼不能辭敢泚筆而始終為之頌為之記異日過此者 聞公之風讀  公之蹟式 公之間其必有 以感發興起矣 夫上之三十一年閼逢敦牂 秋九月寒 露節前獻
商山 金麟燮 記 
六代孫 桓 盥手 謹書

2020.12.6.지우당공 정려 복원사실 기록

至愚堂公旌閭復元事實記
至愚堂公諱來運은 우리 雪梅谷에 처음 遷從하신 臨溪公諱深의 五世孫이시고 壬乱 때 倡義로 功을 세워 兵曹參判의 品階까지 오르신 梅村公諱德龍의 六世孫이 되시는 분이다. 幼時에 天性이 非凡하여 度量이 넓으시고 文學이 純粹하여 士林과 朋友의 尊仰이 되시었다. 다섯 살에 父親을 여의고 偏母膝下에서 가난한 집안 살림에도 孝心이 至極하여 어머님능 至誠으로 奉養하셨고 오랜 母親患候에 斷指하여 여러번 回生케 하시니 남들이 其孝誠에 歎服하였다. 또한 公은 일찍이 學文을 닦아 立身揚名을 하지 못함을 恒常 恨歎 하면서도 忠臣義士等의 良書를 읽고 激揚感慨하여 눈물을 흘린적이 많았다. 母親喪을 當하여 廬墓三年 무덤을 지키시니 洞民들과 儒林이 公의 孝道와 學文을 들어 請願狀을 朝庭에 올리려고 하면 아사와서 불 사르기도 하였으니 天性이 謙遜하셨다. 마침내 朝庭에서 旌閭를 물러받고 獻納 金麟燮이 記文을 蠹窩 崔興壁이 墓碣銘을 俛宇 郭鍾錫이 至愚堂記文을 各各 지으니 晉州邑誌 및 大東三剛錄에 記錄되어 있다.
追尊컨대 훌륭하신 至愚堂公이 계셨음으로 해서 오늘에 사는 우리 杏亭門中子孫들이 餘慶을 누리게 되니 다만 感泣할 따름이다. 그러나 公의 所重한 遺蹟의 하나인 孝子門이 九十餘年 동안 歲久年深하여 毁損崩潰 되었으니 子孫된 者 罪스러운 마음 禁할길 없던 次에 多幸히도 族兄炳浩氏의 誠力과 直系孫正鎭等該子孫들이 數年前부터 旌閭復元을 計畫하고 議論한 結果 모두 贊同하고 힘을 合쳐 誠金을 모아 그 자리에 當時貌形대로 旌閭을 復元 하였으니 晩時之歎이 있으나마 子孫된 者로서 千萬多幸으로 여기는 바이다. 同時에 公의 遺德이 旌閭와 더불어 子孫萬代에 길이 이어져가기를 祈願하는 바이다. 不肖子孫의 한 사람으로 復元經緯를 쓰도록 數次勸誘를 받고 辭讓 끝에 삼가 事實을 記述함이라.
檀紀四千三百二十三年 庚午三月日
傍七代孫 炳炰 謹記書

지우당공 정려 복원사실 기록
지우당의 이름은 래운來運으로 우리 설매골짝에 처음 옮겨오신 임계공臨溪公 이름 심深의 5세손이시고 임진난 때 의병으로 공功을 세워 병조참판의 품계品階까지 오르신 매촌공梅村公 이름 덕룡德龍의 6세손이 되시는 분이다. 어릴 때 천성이 비범하고 도량이 넓으시고 문학이 순수하여 사림과 친구들이 존경하었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가난한 집안 살림에도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님능 지성으로 봉양하셨고 오랜 어머니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여러번 회생케 하시니 남들이 그 효성에 탄복하였다. 또한 일찍이 학문을 닦아 입신양명을 하지 못함을 항상 한탄하면서도 충신의사 등의 양서를 읽고 격양감개激揚感慨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무덤을 3년이나 지키시니 동민들과 유림이 그분의 효도와 학문을 들어 청원장을 조정에 올리려고 하면 가져와서 불 사르기도 하였으니 천성이 겸손하셨다. 마침내 조정에서 정려를 물러받고 헌납獻納 김인섭金麟燮이 기문을 두와蠹窩 최흥벽崔興壁이 묘갈명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지우당 기문을 각각 지으니 진주읍지 및 대동삼강록에 기록되어 있다.
추존컨대 훌륭하신 지우당이 계셨음으로 해서 오늘에 사는 우리 행정문중 자손들이 여경餘慶을 누리게 되니 다만 감읍할 따름이다. 그러나 공의 소중한 유적의 하나인 효자문이 90여년 동안 세월이 오래되어 훼손붕궤 되었으니 자손된 자 죄스러운 마음 금할길 없던 차에 다행히도 족형 병호炳浩씨의 성력과 직계손 정진正鎭 등 자손들이 수년전부터 정려복원을 계화하고 의론한 결과 모두 찬동하고 힘을 합쳐 성금을 모아 그 자리에 그때의 모형대로 정려을 복원 하였으니 때가 지났음의 탄식은 있으나마 자손된 자로서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 동시에 공의 유덕이 정려와 더불어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길이 이어져가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불초자손不肖子孫의 한 사람으로 복원 경위를 쓰도록 여러차례 권유를 받고 사양 끝에 삼가 사실을 기술함이라.
1990년 경오 3월 
방7대손 병포炳炰 삼가 기록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