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책과 기록

괴창유고(槐蒼遺稿)

천부인권 2026. 5. 27. 05:50

 

괴창유고(槐蒼遺稿)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학자이자 문인인 괴창(槐蒼) 김교국(金敎國)의 한시와 산문 등을 1968년 그의 손자 김범경(金範經)이 모아 엮은 문집이다. 석판본으로 한지 겹장에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으로 엮었으며, 순 한문 세로글씨이다.

권두에 1968년 김진효(金鎭孝)가 쓴 괴창유고서(槐蒼遺稿序)가 있으며 목록을 기록한 후, 권말에 손자 김범경(金範經)의 소식(小識)을 붙여 발행했다. 이 책은 헌책방 세이북(북코아)에서 2026522일에 만오천원에 구입했고, 책의 크기는 가로 19.5cm, 세로 28.3cm이며, 74쪽이다.

괴창(槐蒼) 김교국(金敎國)에 대해서는 아래 붙여 놓은 행장(行狀)을 참고 하면 된다.

 

 

槐蒼遺稿序

族從范經甫 以其先大父槐蒼公詩集 與行狀示余泣 而言曰 吾祖一生著 作不爲不多而寫藏于 從兄家矣 不幸失火盡入 於灰燼後孫軰痛恨容 有其極乎 範經雖瞀瞀徧搜 於親戚和舊家得逸詩若干 首謄此一局願宗丈特惠弁首 以光幽明 余固辭不獲 而復以曰 噫自古尚志 自好之士 不得於時則捲懷利器浩 然沒齒於窮山樵牧之伍 終無憫焉 固其志也 詩文之傳 不傳何與於公哉 然百世之後 但見其山高水長 而無片言 以考其風韻 則豈非後人之憾 根歟是宜君輩之痛恨服不已 而遍搜知舊家汲汲圖是役 而不容已者也 嘗聞公以篤厚之姿 早年力學見許博洽文思汪洋出遊場屋一時儕類莫之與京 然不得於有司歸修初服家 雖貧窶事親色養生死葬祭一遵家禮見者 以善居喪稱之日 與英才俯讀仰思不啻 若芻豢之悅口 足跡不出於山外姓名不市於鄕曲窮 且益堅老 而不倦盖其所樂在 此而不在彼也 其非所謂樂天知命之君子人歟是故見於尋常嘃咏之間者 唫以秀句吐 以婉辭直從性情中出來 故無憂愁湮鬱底意眞 有德者之言也 古以南豐之無詩爲恨矣 今以槐蒼之無文爲恨矣 然觀其交遊 率永陽之碩德名流也 矧又富豪之悶勸 俾裕揮手謝絕暴客之自首 納金終不受焉 等等非厚德之君子 能然乎哉 彛性攸激 志其拙 陋書之如此

戊申立春日 慶州金鎭孝書

 

 

괴창유고서(槐蒼遺稿序)

족종(族從, 일가 사촌동생) 범경(范經)의 자는 경보(經甫)이고, 그의 선대부(先大父, 할아버지) 괴창공(槐蒼公)의 시집과 행장(行狀)을 나에게 보여주며 울면서 말하였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일생 동안 저술하신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종형(從兄)의 집에 베껴서 비축해 두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화재를 만나 모두 재더미로 변해버렸으니, 후손들의 통한과 슬픔이 어찌 극도에 달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비록 눈이 어둡고 식견이 좁으나 친척과 옛 친구의 집을 두루 수소문하여 찾아낸 일시(逸詩, 빠진 시) 약간 수를 이 한 권의 책으로 베껴 묶었습니다. 원컨대 종장(宗丈, 가문의 어른)께서 특별히 서문(弁首)을 은혜롭게 지어주셔서 저승과 이승을 빛내주십시오."

내가 완강히 사양하였으나 끝내 면하지 못하고, 이에 다시 말하였다.

슬프다! 예로부터 뜻을 숭상하고 스스로를 아끼는 선비가 때(시대)를 만나지 못하면, 예리한 재능을 거두어 품고서 궁벽한 산중에서 나무 베고 소 먹이는 무리 속에서 호연히 나이가 들도록 마치되 마침내 아무런 민망함(후회)이 없었으니, 진실로 그것이 그들의 뜻이었다. 시와 문이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는 것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백 세(百世)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다만 그 산이 높고 물이 길게 흐르는 듯한 고결한 풍모(山高水長)만 바라볼 뿐,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어서 그 풍운(風韻)을 고찰할 수 없다면, 이 어찌 후인들의 한스러운 뿌리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그대들이 통한해 마지않으며 지인과 옛 친구들의 집을 두루 수소문하여 다급하게 이 일(간행)을 도모하여 마지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듣기로 공은 도터운 자질을 지니고 젊은 나이에 학문에 힘써 박학다식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문장과 생각이 넓고 깊어(汪洋) 한때 과거 시험장에 나아갔을 때 동배(同輩)들 중에 그와 어깨를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담당 관원(시관)에게 선택받지 못하자 돌아와 본래의 선비 옷(初服)을 고쳐 입었다. 집이 비록 가난하고 구차하였으나 부모를 섬김에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봉양(色養)하였고, 살아서 모시고 돌아가셔서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것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으니, 보는 이들이 상례(喪禮)를 잘 치렀다고 칭찬하였다. 날마다 영재들과 더불어 고개를 숙여 읽고 고개를 들어 생각하기를, 마치 맛있는 고기(芻豢)가 입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더하게 여겼다. 발자취는 산 밖을 나가지 않았고 이름은 향곡(鄕曲, 시골 마을)에 저자거리처럼 알려지지 않았으나, 궁할수록 더욱 굳세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니 대개 그 즐거움이 여기에 있고 저기(부귀영화)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어찌 이른바 '하늘을 즐기고 천명을 아는(樂天知命)'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에 평상시 읊조리는 사이에 나타난 것들은 빼어난 구절로 읊고 완곡한 말로 토해내어 곧장 성정(性情) 가운데서 우러나왔다.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나 꽉 막혀 답답한 뜻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다. 옛날에는 증남풍(曾南豐)에게 시가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는데, 지금은 괴창공에게 문장(산문)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가 사귄 이들을 살펴보면 대개 영양(永陽, 영천)의 덕이 높은 선비와 명류(名流)들이었다. 하물며 또 부호(富豪)의 간곡한 권유와 넉넉하게 도와주겠다는 것도 손을 저으며 사절하였고, 포악한 도적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며 바친 돈을 끝내 받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일들이 두터운 덕을 지닌 군자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타고난 본성(彛性)에서 격동된 바가 있어, 나의 졸렬하고 거친 생각을 이와 같이 기록하노라.

무신년(戊申年, 1968) 입춘 날에 경주(慶州) 김진효(金鎭孝)가 쓰다.

 

 

槐蒼遺稿卷之二

附錄

行狀

公諱教國字文瑞號槐蒼姓金氏系出新羅敬順王之後也 其後有諱因渭爲麗朝平章事入鮮朝 有諱稇以開國勳封雞林君 諡齊肅 有諱自幹號于隱縣監 有諱鎔進士 有諱善立號獨醒堂 遊寒岡鄭先生門 有諱瑗號漁隱以上顯祖也 曾祖曰益觀 祖曰海鎰 考曰永時 有德行 妣月城李氏 守一女 有淑德閨範 頗有閨門之稱 以己酉二月十二日生 公于慶州光明里 第眼彩瀅澈 骨格俊秀王考公嘗稱之曰 昌吾家者 必此兒也 後七歲學于王考 不煩敎督而勤勉常不離長者側 南成童通四子及諸經旁涉諸家書 公天禀豪爽風儀俊整言辭慎重 孝悌行於家而信義及於人嘗 以親命作公車行 一屈而不復入場 遂移居于永川原谷 靜養林泉樂付敎育 與鄭侻窩來源 徐貞齋廷玉曺蒼來秉 韶諸名碩 或討文評詩講禮談經 又與傍近宿儒金遯菴斗玟 成鶴樵憙鎭 柳聽泉應淳 孫老石錫禹 志氣相許 詩酒相酬於春花秋月之辰 龍山道川之間 杖屨翩聯風味散來學者甚衆 而春夏則敎以詩 秋冬則敎以經 以養生才德爲一生樂事 乙酉丁外艱時 年踰不毁而口不近草木之滋 身不脫衰麻之具 祭奠儀節 考禮無違 不拘寒暑日必省墓 見者以善居喪稱戊子丁內艱 一如前喪 遠通之人 咸稱其孝敬之心 老而不衰 貧屢到骨而色笑常裕 風潮剝床而脚跟益牢 嘗曰 顔子陋巷之仁 子路縕袍之勇 非敢望焉 而孫明復之安貧 郭林宗之樂道 可勉以致也 實自期而自道也 有饒富近親者 悶其貧來勸其一處雇主者 曰有農庄又有別料也 公謝之曰 貧者士之常也 素貧行貧 無乃吾儒本分耶 終不聽 公嘗營一蔘圃 夜有盜竊取去 後數朔盜來納金 自首曰 小人盜蔘數十介 而埋之土蔘皆腐 自知其罪 願受蔘價 公笑曰 蔘雖不腐 吾其忍于懷久矣 況其腐而取直 終不受 盜者曰 君子之心 實非小子之腹所能料也 謝拜而退 遂爲良民 癸丑秋寢疾 數月呻吟 常誦古人格訓 臨革猶喜聞讀書之聲 正席而卧 悠然而終 實甲寅正月初七日亥時也 葬于郡南原谷龍塘村後峨嵋谷庚坐原 其門人等 以禮治葬加麻者 十數人 配平海黃氏鐘勳女 都巡問使叔卿後 己酉七月十六日生 乙卯三月二十五日卒 墓祔左育三男二女 男長正喆 次正錫 次正道 女長適柳成淳 次適李晟榮 正喆男元經載經 正錫男範經 正道男武經孝經 柳戊淳男寅錫寅德寅友 李晟榮男相龍 範經男知洪知漢 武經男知鳳知根知烈 餘不盡錄 嗚乎 公之所著有疑禮放正庸學問答詩文雜著 公之胤正道氏 與及門諸彦 搜輯五冊 未及刊布 藏在元經家 不幸厄于火盡入灰燼 遺昆之恨 曷有其極 其孫範經 遍求親戚知舊之篋 僅得逸詩若干首 謄寫一冊 訪余于江村寓舍 飮泣而告曰 王考咳嗽之遺 只此詩文數局 而第念當日諸公 惟執事在 詳王考事實者 亦無如執事 幸無惜一言 使王考遺光潛德 不泯於後也 不倭老廢昏眛 不能記憶 而範經君之託 自有深意 則吾豈負之哉 略言行之大槩 以遺之世之秉笔君子 庶以此採擇而權輿則幸矣

戊申三月上瀚 文化柳克烈謹撰

 

 

행장

선생의 휘(, 이름)는 교국(敎國)이고, ()는 문서(文瑞)이며, ()는 괴창(槐蒼)이다.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 후손 중에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인위(因渭)가 있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개국공신으로 계림군(雞林君)에 봉해지고 제숙(齊肅)’이라는 시호를 받은 휘 곤()이 있었다. 또한 현감을 지내고 호가 우은(于隱)인 휘 자간(自幹), 진사(進士) 휘 용(),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호가 독성당(獨醒堂)인 휘 선립(善立), 호가 어은(漁隱)인 휘 원()이 있으니, 이분들이 모두 선생의 저명한 선조들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익관(益觀)이고, 할아버지는 해일(海鎰)이며, 아버지는 영시(永時)로 덕행이 있었다. 어머니 월성 이씨(月城李氏)는 수일(守一)의 딸로, 맑은 덕과 규수로서의 모범을 갖추어 문중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선생은 기유년(1849년으로 추정) 212일 경주(慶州) 광명리(光明里)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눈빛이 맑고 형형했으며 골격이 준수하여, 할아버지(王考)께서 매번 칭찬하며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을 창성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뒤 일곱 살에 할아버지에게 배움을 배웠는데, 번거롭게 가르치거나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지런히 힘썼으며 항상 어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인(成童, 15세 전후)이 되기도 전에 사서(四子)와 여러 경전을 통달하였고, 제자백가의 서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품성이 호방하고 시원스러웠으며, 풍채와 거동이 준수하고 단정했다. 말과 언사가 신중하고 무거웠으며, 효성과 우애를 집안에서 실천하고 신의를 타인에게 베풀었다.

일찍이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과거 시험(公車行)에 응시했으나, 한 번 낙방하자 다시는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침내 영천(永川)의 원곡(原谷)으로 거처를 옮겨, 수풀과 샘물(林泉) 속에서 조용히 심신을 기르며 후학을 교육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퇴와(侻窩) 정래원(鄭來源), 정재(貞齋) 서정옥(徐廷玉), 창래(蒼來) 조병소(曺秉韶) 등 여러 이름난 석학들과 교유하며 글을 토론하고 시를 평했으며, 예법을 강론하고 경전을 담론하였다. 또한 인근의 이름난 유학자인 둔암(遯菴) 김두민(金斗玟), 학초(鶴樵) 성희진(成憙鎭), 청천(聽泉) 유응순(柳應淳), 노석(老石) 손석우(孫錫禹) 등과 뜻과 기개를 서로 인정하며, 봄꽃이 피고 가을달이 밝은 때나 용산(龍山)과 도천(道川) 사이에서 시와 술로 서로 화답하였다. 나막신과 지팡이를 끌며 왕래하는 모습은 풍류가 넘치고 소탈하여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다.

봄과 여름에는 시()를 가르치고 가을과 겨울에는 경전()을 가르치며, 인재의 재능과 덕을 길러내는 것을 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을유년에 아버님 상(丁外艱)을 당했을 때, 선생은 나이가 중년을 넘었음에도 몸을 돌보지 않고 슬퍼하였으며, 입에는 거친 채소 외에 맛있는 음식을 대지 않았고, 몸에서는 상복을 벗지 않았다. 제사와 상례의 모든 의문(儀節)을 예법에 맞추어 어김이 없었으며,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날마다 반드시 묘소를 살피니, 보는 이들이 모두 상례를 잘 치른다고 칭찬하였다. 무자년에 어머니 상(丁內艱)을 당했을 때도 앞서 치른 상례와 똑같이 하니, 멀리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모두 그 효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이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여러 번 뼈에 사무칠 정도였으나 안색과 웃음은 항상 여유가 있었고, 세상의 풍조가 침상까지 깎아 먹듯 험악해져도 발걸음은 더욱 견고했다. 선생은 평소 말씀하시기를,

안자(顏子)의 누항(陋巷)에서의 어진 마음이나 자로(子路)의 궂은 옷을 입는 용기는 내 감히 바라지 못하겠지만, 손명복(孫明復)이 가난을 편안히 여긴 것과 곽임종(郭林宗)이 도를 즐긴 것은 힘써 도달할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실로 스스로 기대하고 스스로 도를 실천하신 것이다.

근친(近親) 중에 꽤 넉넉하게 사는 이가 선생의 가난을 안타깝게 여겨, 한 일자리를 권하며 말하기를 농장도 있고 별도의 보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사양하며 이르기를, “가난이란 선비의 상례(常事)일세. 본래 가난한 대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어찌 우리 유학자의 본분이 아니겠는가?”라며 끝내 듣지 않았다.

선생이 일찍이 산삼 밭(蔘圃)을 가꾸었는데, 밤에 도둑이 들어 삼을 훔쳐 갔다. 몇 달 뒤, 그 도둑이 와서 돈을 바치고 스스로 고백하기를, “소인이 산삼 수십 뿌리를 훔쳐 땅에 묻어두었으나 산삼이 모두 썩어버렸습니다. 스스로 그 죄를 알기에 삼 값을 받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삼이 비록 썩지 않았더라도 내가 어찌 그것을 마음에 두고 오래 아까워했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썩었는데 그 값을 받겠는가?”

하며 끝내 받지 않으셨다. 도둑이 말하기를, “군자의 마음은 실로 소인의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하며 감사히 절하고 물러갔으며, 마침내 착한 백성(良民)이 되었다.

계축년 가을에 병석에 누워 몇 달 동안 신음하면서도 항상 옛 성현의 격언과 훈계를 외웠으며,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글 읽는 소리 듣기를 좋아했다. 자리를 바르게 하고 누워 유연하게 삶을 마쳤으니, 실로 갑인년(1914년으로 추정) 정월 초일곱 일 해시(亥時, 9~11)였다. 고을 남쪽 원곡의 용당촌(龍塘村) 뒤편 아미곡(峨嵋谷) 경좌(庚坐, 동남동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의 문인들이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렀는데, 상복(加麻)을 입은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부인은 평해 황씨(平海黃氏) 종훈(鐘勳)의 딸로, 도순문사(都巡問使) 숙경(叔卿)의 후손이다. 기유년 716일에 태어나 을묘년 325일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선생의 묘 왼쪽에 합장(祔左)하였다.

자녀는 32녀를 두었다. 아들은 첫째가 정철(正喆), 둘째가 정석(正錫), 셋째가 정도(正道)이다. 딸은 첫째가 유성순(柳成淳)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이성영(李晟榮)에게 시집갔다.

정철의 아들은 원경(元経), 재경(載経)이다.

정석의 아들은 범경(範経)이다.

정도의 아들은 무경(武経), 효경(孝経)이다.

사위 유무순(柳戊淳, 성순의 오기로 보임)의 아들은 인석(寅錫), 인덕(寅德), 인우(寅友)이다.

사위 이성영의 아들은 상룡(相龍)이다.

범경의 아들은 지홍(知洪), 지한(知漢)이다.

무경의 아들은 지봉(知鳳), 지근(知根), 지열(知烈)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슬프도다! 선생이 저술한 책으로 의례방정(疑禮放正), 용학문답(庸學問答), 그리고 시문과 잡저들이 있었다. 선생의 아들 정도(正道) 씨가 문하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이를 수집하여 5책으로 묶었으나, 미처 간행하여 널리 펴내지 못한 채 큰아들 원경(元経)의 집에 비장(秘藏)해 두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화재(厄于火)를 만나 모두 재 한 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으니, 후손들의 한스러움이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그 손자 범경(範経)이 친척과 오랜 벗들의 상자를 두루 찾아 헤맨 끝에 겨우 흩어진 시 몇 십 편을 얻어 한 책으로 베껴 쓰고는, 내가 강촌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집(寓舍)으로 나를 찾아왔다. 범경은 눈물을 흘리며 고하기를, “할아버님께서 남기신 자취(咳嗽之遺)가 겨우 이 시문 몇 편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당시의 여러 어른 중 오직 어르신(執事)만이 살아 계시니, 할아버님의 사실(事實)을 상세히 아는 분 또한 어르신만 한 분이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아끼지 마시어, 할아버님의 끼친 광채와 숨은 덕이 후세에 인멸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못나고 늙어 정신이 어둡고 기억을 잘하지 못하지만, 범경 군의 부탁에 깊은 뜻이 있으니 내가 어찌 그 뜻을 저버리겠는가? 이에 언행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서술하여 세상의 붓을 잡은 군자(秉笔君子)들에게 남기노니, 모쪼록 이 내용을 바탕으로 채택하고 다듬어 문집이나 묘비명의 시초(權輿)로 삼는다면 다행이겠다.

무신년(1968) 3월 상순(上瀚)

문화 유극렬(文化 柳克烈)은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