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청룡대와 최치원선생

천부인권 2008. 2. 21. 09:45

10월30일 용원가주동 최치원선생 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지 청룡대(靑龍臺)


우리들 곁에 위대한 학자가 살다간 흔적이 있음은 분명 큰 자랑이다. 25호국도를 따라 부산방면으로 달려가다가 진해시 웅동면 가동리란 한적한 바닷가에 당도 하면 큼직한 암반 하나를 만난다.


이 바위에 靑龍臺란 글씨 석자가 남겨있으니, 천년의 풍우를 거쳐서 오늘 날까지 날아갈듯 한 반초서체(半草書體)가 더욱 뚜렷하다.


전설에 따르면 최치원 선생이 만년의 한때를 속진(俗塵)을 모두 벗고, 이곳에서 낚시로 소일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靑龍臺란 글은 선생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신라 헌안왕 1년(857)에 사량부, 즉 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의 희종 1년(875)에 과거에 급제 했다.

877년 이른바 황소(黃巢)의 난이 중원을 어지럽힐 때 격문을 썼던바, 이 격문은 오늘 날까지 명문장으로 전해 온다.


선생의 나이28세(885)에 신라로 돌아와 보성군 태수의 벼슬을 거쳐, 벼슬이 아찬에 까지 이른다. 선생은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어나 채택이 되지 않고, 간신배가 세상을 어지럽히자 894년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주유천하의 길로 나섰다.


선생의 발길이 어떤 경로를 거쳐 웅동면 가동리에 왔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그러나 마산의 월영대나 서원곡에 많은 흔적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그 뒤로 마산을 떠나 해인사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천년전 흔적 하나가 우리들 곁에 있음은 자랑 할만 한 유적이리라. 자녀와 함께 이러한 흔적을 따라간다면 분명 좋은 공부를 해주는 아빠란 칭찬을 듣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오로지 신라만이 여왕을 배출한다. 이러한 풍습은 한반도에서 유일무이 하다. 그러면 왜 신라는 그러한 일이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이 의문은 다음에 한번 이바구 하기로 하고, 지금은 웅동면과 그 일대의 유적지를 탐방하고자 한다.

  <청룡대의 모습>

  <청룡대에 새긴 글>

 <청룡대에 새겨진 글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