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산도(望山島)와 유주암(維舟岩)
진해시 용원리(龍院里) 앞바다에 잡목으로 뒤덮인 작은 섬이 하나 있으니 이 섬을 望山島라 부른다.
<망산도 옆에 세워진 유주정>
<유주정에서 유주암이 바라보인다.>
<유주암의 모습>
또 이 섬의 동남 방향 70m 지점에 약 10m 길이의 바위섬이 솟아 있어, 이를 維舟岩라 부르니 이 모두는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태후(허황옥)의 유적과 관련되는 이름들이다.
<망산도로 들어가는 길>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의 꿈속에 옥황상제가 나타나 "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은 하늘이 내려 보낸 사람인즉 아직 배필을 얻지 못하였으니 공주가 가서 짝을 지어라"하였다. 이에 허태후(許太后)는 즉시 돌배(石舟)를 타고 수만리 뱃길을 달려 왔으니 처음으로 배에서 내린 곳이 望山島였다고 하며, 許太后가 타고 온 石舟가 바다 속에 뒤집혀서 維舟岩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망산도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
<망산도표지석은 가덕도 저 멀리 진해만을 바라보고 있다.>
또 한편 허태후가 돌배를 타고 올때 首露王은 미리알고 이 섬에서 해상을 바라보며 기다렸다고 하여 望山島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망산도 중앙의 모습>
<망산도 중앙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대략 이러하다.
후한의 건무24년(AD48년)7월27일 가락국의 구간(九干)들이 왕에게 나아가 청하기를 "대왕께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바라건대 신들이 천거하는 처녀 가운데 왕비를 정하게 하옵소서" 이에 "짐(朕)이 이곳에 내린 것은 하늘이 시킨 바이니 왕비 또한 하늘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경들은 과히 염려 말라."하였다.
<유주정에서 바라 본 망산도>
왕은 유천간에게 명하여 준마(俊馬)한필과 경편한 배 한척을 끌고 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귀신간에게는 승점(乘岾)에 나가서 망을 보도록 하였다.
서남쪽 해상에 붉은 빚깔의 돛을 달고 붉은색의 깃발을 휘날리며 배 한척이 당도 했다. 유천간이 햇불을 쳐들고 배를 인도하니 마침내 망산도에 닿았고 허태후 일행이 상륙했다.
승점에 나가있던 귀신간의 보고를 받은 왕은 친히 대궐에 나와서 만전(慢殿)을 치고 허 태후를 맞아 들였다.
그날 밤 침전에서 태후는 왕에게 조용히 이르기를 "소첩은 阿踰陀國의 공주이며 성(姓)은 허(許)씨요 이름은 황옥(黃玉),나이는 열여섯 이옵니다.
어느 날 꿈속에 황천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 보낸 사람이나 불행히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가서 짝을 지어라 하기에 소첩이 이렇게 달려와 용안을 뵙게 되었사오니 거두어 주옵소서." 하였다. 이 말에 수로왕은 "짐은 본시 비범하거늘 태후가 이렇게 올줄을 미리 알았기에 신하들이 왕비책봉을 권하는 것을 지금까지 미루어 왔어나, 오늘 이렇게 태후를 만나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하였다.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태후(許太后)는 다 같이 장수하여 허태후는 157살,수로왕은 158살을 살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평생에 아들 10형제를 두었으니 큰아들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가락국의 2대 거등왕(居登王)이 되고 둘째, 셋째 아들은 태후의 뒤를 잇게 하여 허씨(許氏)로 하였으니 오늘날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서로 혼인을 못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7명의 아들들은 불모산자락에 절을 지어 불제자가 되었다하니 어찌 김해 김씨가 흥하지 않았겠는가? 참고로 불모산 자락에 절의 수가 108개나 있었다고 전하여지나, 지금은 7개 정도가 남아있다.
'역사의 기록 > 문화재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전리 마애불상군 [道田里磨崖佛像群] (0) | 2008.03.10 |
---|---|
청룡대와 최치원선생 (0) | 2008.02.21 |
봉림동 옛 지명과 봉림산 지도 (0) | 2008.02.20 |
광제암문 (0) | 2008.02.04 |
고인돌과 회화나무 (0) | 2008.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