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자원봉사/봉사단과 마을 이야기

하동군 청암면 상이리 시목부락

천부인권 2008. 6. 9. 08:28

 

마창기술봉사단의 6월 봉사활동


6월 8일 중동성당에는 일본조팝나무의 꽃이 화단을 붉게 물들이고 마창기술봉사단은 오늘의 목적지인 하동군 청암면 상이리 시목부락을 향해 남해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하동 톨게이트에서 잠시 떨어진 일행 차량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생소한 곳으로 인식되어 길을 찾아가는 것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장에 도착을 했다.

 <중동 성당의 일본조팝나무>

 

  <터럭에 짐을 싣고 떠나기 직전>

 

  <하동 톨게이트에서 휴식>

 

  <횡천 삼거리에서 하동호 가기 전 길가의 작은 공원에서 기다리던 일행을 만난 곳에는 솟대와 장승이 있었다.>

 

  <시목부락 회관에 봉사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기술봉사와 농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청암이란 이일대 계곡에 푸른 바위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아득한 옛날부터 촌락이 형성된 유서 깊은 고을이다. 그리고 산자수명한 대자연속에서 한때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던 아름다운 고장에 청암팔경이 있었다고 전하나 안타깝게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숱한 전설과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태고의 신비가 머물고 숨쉬는 곳 청암을 소개한다.

 

청암은 지리산을 등지고 삼신봉(三神峰)에서 시작되고, 면적은 103.19㎢, 102.3㎢(산악87.0㎢)으로 面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면의 중심에서 東으로는 玉宗, 西로는 악양, 화개, 南으로는 횡천 적량, 북으로는 산청군, 시천면과 접경하고 8개리 19개행정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난 1966년에는 10,179명이 살았으나 7,896명(77%)의 인구가 감소한 2,283명(2001년말)이 거주하고 있고 하동에서도 가장 큰 댐인 하동호, 신비의 이상향 靑學洞, 배달 민족의 聖殿 三聖宮을 背景으로 지리산 특유의 주민 소득원을 개발하고 있다.

 

하동에서 진주 방면으로 오다보면 횡천 삼거리에서 청암으로 이르는 약 7㎞ 지방도로는 1930년 개통, 1920년 7월에 지서가 살치 되었으며, 우체국은 1962년 5월 16일에 별정우체국(민간자본)으로 설립되었다. 농협은 1972년 9월에 설립되었고, 학교는 청암초등과 중학교가 편촌리에 위치하고 있고, 여기서 2㎞정도 오르면 하동호(1985~1992년 완공, 담수량 3,155만톤, 공사비 207억원)가 맑고 깨끗한 물을 한배 머금은 채 은은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하천에는 청암과 범돌이 함께 어우러져 지리산의 전설을 말해주는 것 같다.>

 

시목(枾:감나무 시, 木:나무 목)부락은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옛날에는 순 우리말인 감나무 골로 불려지다가 일제시대 이후부터 시목으로 명명된 것으로 보여 진다. 50여 년 전에는 곳곳에 아름드리 감나무가 즐비 했으나 책상, 장롱 등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사가는 바람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팔아버려 거목의 감나무는 현재 구경할 수 없는 상태이다.


400여 년 전에 김중여(강산김씨)라는 분이 사냥을 하러 이곳에 왔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처자에게 반하여 3년을 살고 난 후 결혼을 하여 고향으로 새색시를 데리고 가고자 하자 장인, 장모가 자식과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자 정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산 것이 시목부락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씨와 김씨가 집촌 하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회관이 있는 시목마을 전경>

 

시목마을은 국도를 따라 2km에 걸쳐 늘어져 있으며 모시고개, 수리바위, 백운사 절터, 중소 등에 마을의 유래와 전설이 남아 있다. 절터에는 넙적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중이 도술을 부려 칡덩굴로 댐빵(질빵의 토속어)을 만들어 짊어지고 옮겨놓았다는 전설도 있고, 마을사람들이 절을 짓지 못하게 방해를 하자 중이 이 마을의 풍수를 말하면서 “시목마을의 모시고개(경상도에서는 병아리에게 주는 먹이를 모시라고 표현하고 있음.)는 병아리가 먹이를 먹는 모습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면 수리방구(독수리형상의 바위)의 공격을 받아 모두 망할 것이다.” 라고 하였던 바 이를 그대로 믿고 마을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곳에서만 살았다고 전한다.<시목마을 이장 김한수씨의 증언(65세)>


백운사 절이 망할 징조로 빈대가 우글우글하자 빈대의 공격을 이기지 못한 중이 하천에 뛰어들어 죽어버렸다는 전설을 간직한 “중소”도 있는데, 대부분의 절들이 사라진 이유 중 하나가 빈대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무서운 빈대가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은 연탄가스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리산은 민족상잔의 비극이 가장 극명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김한수 이장의 목격담으로는 여순반란 사건 때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들이 카빈총을 매고 마을에 들어온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빨갱이들이 마을에서 기르는 소, 벌꿀, 등은 무력으로 빼앗아 가고 경찰가족은 잡아 소시랑으로 죽이기도 하였으나 개와 아녀자의 겁탈은 절대 없었다고 하였다. 당시에 경찰과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자치방위대와 밤이 되면 피아간에 전투를 하였는데 총알이 날아다니는 광경을 총알을 맞으면 죽는 줄도 모르고 구경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시며, 탄피를 가지고 친구들과 놀기도 했다고 하신다. <시목마을 이장 김한수씨의 증언(65세)>

그 당시 청암지서를 보호하기 위하여 평촌마을 전체를 대나무로 진을 쳐 놓았는데 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 반란군들이 패하여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하시며, 경찰을 “검은개놈”, 군인을 “푸른개놈”으로 반란군들이 불렀다고 하셨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단원 중에 가장 연세가 많으신 이택화님께서는 “봉사를 한다는 것은 봉사를 하는 내 자신이 즐거워야 하다.”고하시며, “내가 즐겁지 아니하면 상대인들 즐거울 수 있겠는가?” 항상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시목마을 경계비석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우산나물>

 

  <좀가지풀>

 

  <털중나리>

 

  <큰까치수영>

 

  <매실을 수확하기 위하여 2km이상을 걸어서 가고 있다.>

 

  <매실을 수확하는 모습>

 

  <매실을 수확하는 모습>

 

  <매실을 수확하는 모습>

 

  <매실을 수확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