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의 향기를 따라
2009년 2월 25일 아라가야의 흔적을 찾아 함안으로 여행을 해보기로 마음먹고 차를 몰아 함안군청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점심때라 군청에 차를 주차하고 인근에 있는 식당에 둘러 고분군을 물어보니 함안을 잘 모르신다고 하여 식사를 마치고 군청으로 와서 지나는 군청직원에게 함안여행 지도를 구한다고 하니 선뜻 「테마가 있는 함안여행」이란 지도를 주신다.
고분군을 물으니 군청에서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을 알려주어 올라가니 “1967년 12월에 함안읍 장날과 군북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여 21명이 순국, 18명이 부상당하고, 수십 명이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우뚝 서서 함안군을 내려보고 있었다.
바로 뒤에 사적 제84. 85호『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제4호 능이 우뚝 솟아 있다. 고분안내판에는 『함안군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이며,북과 서는 낙동강과 남강으로 남과 동은 600m가 넘는 산으로 둘려 있다. 이 고분군은 아라가야(안라국)의 서울이었던 가야읍에 위치하며, 찬란한 가야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분의 대부분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60m의 주능선과 서쪽으로 뻗은 여덟 갈래의 능선에 분포하고 있다.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100여기의 대형고분들은 높은 곳에 열을 지어 위치하고 그 아래로 백여기나 되는 소형들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고분들은 일제시대에 처음으로 조사되었는데 당시 제34호분(현 4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39.3m, 높이 9.7m나 되는 최대규모의 왕릉이다. 최근에는 북쪽 끝자락에 있는 마갑총에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것과 같은 말 갑옷이 출토되었고, 다섯 사람의 순장 인골이 확인된 제8호분의 조사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로 알게 된 사실은 첫째 공자모양(工字形)의 굽다리접시와 불꽃모양의 창을 낸 굽다리접시는 여러 가야 중에 서도 아라가야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진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둘째, 각종의 큰칼, 갑옷, 말갑옷, 새가 달린 비늘쇠 같은 철제품과 금, 은, 유리, 옥으로 만든 장신구들은 아라가야 왕의 위상을 보여 주었다. 셋째, 기원전 후부터 6세기 중반까지 만들어진 이 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성립, 발전, 멸망의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넷째, 이 고분군의 출토품과 같은 유물은 동래, 경주, 일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라가야의 산물인 다른 가야와 신라, 일본열도까지 수출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고분군의 규모와 화려한 유물들은 6세기경의 아라가야가 남부 가야의 중심으로 주변국들과 교섭하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해주었다. 현재 고분군이 위치한 곳을 끝 말자의 “말산: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말산“은 말이산으로 불렸었다. 말이사=마리산은 머리산이었다. 원래는 아라가야의 시조가 등장하고 역대 왕들이 묻혔던 우두머리 산이었을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8호 능에서 함안군을 촬영하고 있는데 4호 고분에 사람들이 올라와 빨리 내려 가보았다. 함안군에 사는 초등학생들과 부모님 그리고 해설사 분들이 이 곳을 설명하고 계셨다. 나도 잠시 동안 아라가야의 고분군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안내를 받게 되었다. 제 4호 고분은 일본 사람들이 일본과 연관된 유물이 발굴되기를 바라며 발굴하였고 유물은 일본으로 반출하지는 않았다고 하셨다.
다음에 다시 와서 박물관도 구경하기로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무진정」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무진정」은 함안에서 여항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길가에 연못과 함께 있어 찾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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