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佛母山과 성주사(곰절)

천부인권 2009. 3. 28. 02:11

 

 

  성주사 전경

 

불모산佛母山과 성주사(곰절)

창원시 성주동 불모산 기슭에 위치한 성주사는 두가지 전설이 전해져온다.
그 하나는 가야시대 장유화상 창건설이고, 또 하나는 무염국사 창건설이다.

 

장유화상 창건설

가야불교의 인도직수입설(불교남방전래설)을 말한다.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오면서 함께 온 사촌오빠 장유화상(허보옥)이 머무시도록 김수로왕께서 창건한 가야시대의 고찰로서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서 난 아들중 일곱명이 모두 불모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 당시에 창건 되었으리는 것이다.

하여 불모산(佛母山)이란 명칭도 허황후를 기리기 위하여 붙쳐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장유화상의 흔적중에 지암사(장유사)가 있는데, 위치는 김해시 장유면 용지봉 기슭에 자리 하고 있다. 석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 나무가 한그루 있다.

 

무염국사 창건설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왜구가 바다을 메우듯이 병선을 이끌고 침범하자, 왕이 왜적을 격퇴할 방안을 신하들에세 물었으나 방안을 얻지 못하고 5일이 지났다.
5일째 되는 날 밤에 어떤 신인이 왕께 현몽하여 말하기를 지리산 중에 무염이란 화상이 있으니 화상을 불러 문의 하면 왜적을 격퇴하기 어렵지 아니하다 하거늘 왕이 곧 사자를 보내 무염화상을 불모산에 주거케하고 격퇴계책을 물었다.

이에 무염화상이 곧 석장을 산위에 세우고 왼손으로 배를 치니 그 소리에 천지가 진동함과 동시에 철갑을 한 병사가 즉시 출현하여 산의 주위에 둘러쌌다. 왜적이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분산 도주하였다. 왕께서 이것을 보고 크게 기쁘하며, 무염화상을 왕사로 모시고 사은을 갚는 뜻으로 밭 360결과 노비 100호을 내려서 불모산 아래 절을 창건 토록하고 성인이 상주 하는 절이라 해서 성주사(聖住寺)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후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전소 되었는데 1604년 (선조 37년)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산세와 절터를 보고 중창할 뜻을 품은뒤 불당을 짓고 석탑과 석등을 찾아낸 뒤 사찰을 중건하고 숙종 8년(1682)에 또 한차례의 중수를 거친 뒤 순조 17년(1817)에 동래 범어사에 있던 등암(藤巖)이 이 절로 옮겨 주석 하면서 중흥의 대업을 이룩했다.

 

 

불모산 정상


또한 성주사를 웅신사(熊神寺), 속칭 곰절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진경대사가 원래의 성주사 터에 가람을 중건하였을 때  본래의 자리는 지금 위에서 약400m 복쪽에 있었으나 하롯밤사이에 곰이 전 목재를 현재 자리로 옮겨 놓아 부처님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는 옛날 어느 때 볼모산에 살던 곰이 있어 배가 고파 내려 왔으나
성주사의 스님들이 좌선삼매에 들어 수행에 열중하고 있어 배고픔을 잊고 스님들의 자세를 흉내내곤 하다가 그것이 공덕이 되어 후세에 그 곰이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사람이 자라면서 인연을 따라 성주사에서 부목(負木:절에서 땔나무를 하는사람)일을 하게 되었는데 전생이 곰이였든바 밥이 타는지도 모르고 삼매에 들어 불을 때다가 마침 공양간을 지나던 주지스님이 그 광경을 보고 지팡이로 머리를 치며 깨우는 순간 깨닫는 바가있어 그의 전생인과가 곰이었는데 스님 흉내를 내다가 인간으로 태어난것을 알고 더욱 용맹정진하여 큰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단지 내 생각으로는 불모산에는 빈대가 많이 있는데 빈대를 피하여 절을 지은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모산에 108개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빈대의 습격으로 사람이 살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절이 하나 둘 사라진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성주사 절터는 빈대가 없다 이상하지만 절을 떠나 500m정도만 나가면 아직도 돌을 뒤집어보면 빈대가 우글그린다.

 

그래서 명당이 있는것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다.
또 한가지는 불모산의 주산은 웅산(시루봉)임으로 곰의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불모산 정상에서 바라본 창원시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