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정사의 모습>
<창원시 용지공원의 새영남포정사>
포정사는 진주의 상징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에 지위를 물려주고 지금은 창원에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 창원 용지 공원에 만들어진 모습과 진주에 있는 모습은 많은 부분에 있어 다르다. 만약 진주에 포정사가 사라진다면 창원의 것이 똑같이 복사를 했다고 말할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사람들을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명심해라 그리고 생각해 보라!
<포정사의 또다른 모습>
영남 포정사(嶺南 布政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소재시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73의 11
영남포정사는 조선조말 경상남도관찰사(慶尙南道觀察府)의 선화당 관문(宣化堂 關門)으로서 일명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렀다. 처음 창건은 조선조 광해군 10년(光海君, 1618)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집무청 인 관덕당 내동문(觀德堂 內東門)으로 건립한 이래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의 관문(關門)으로도 활용되었다.
고종 32년(高宗, 1895)에 8도제를 폐지(廢止)하고 전국을 28부제(府制)로 시행함에 따라 이곳에는 진주부가 설영(設營)되어 진주관찰부(慶尙南道府)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다음해인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0)에 다시 전국을 13도로개편(改編)함에 따라 경상남도가 설영되어 경상도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이 된 이래 1925년 도청(道廳)이 부산부(釜山府)로 옮겨 갈 때까지 그 문루(門樓)로서 영남포정사라 이름 하였다. 이 건물을 본따 영남포정사(嶺南 布政司)가 창원시 용지공원에 세워져 있다.
<포정사 입구에 서있는 하마비>
하마비(下馬碑)
수령이하(守令以下皆下馬) 모두 말에서 내려 들어가라는 표석(標石)이다. 조선조 宣祖37년(1604) 이래로는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 고종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晋州觀察府)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 이래로는 경상남도관찰부(慶尙南道觀察府)가 있던 곳으로 우병영(右兵營)의 정문인 망미루(望美樓), 관찰부의 정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병사(兵使) 및 관찰사 이외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가라는 뜻이다.
<진주성 비석군>
진주성 비석군
조선조 선조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을 비롯, 효종10년(1656) 목사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 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이다.
<진주성 비석군을 다른 각도에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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