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진주성의 경남 유형문화재(제1호, 2호, 3호)

천부인권 2009. 4. 11. 21:32

 

 

  <김시민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가 나란히 있다.>

 

 

오늘 내가 여기 온 목적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3호까지를 먼저 구경하고자 한다. 누구나 진주성을 한번쯤은 둘러 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둘러보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경험이 아닐 것으로 보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또한 재미일 것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와 2호는 나란히 같이 있다. 역사의 시간은 다르지만 그 충절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조선은 망했지만 그 땅을 의지하고 살아남고자 하는 민초는 지금도 진행형으로 눈물겨운 삶을 이어오고 있다. 반복되는 역사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잊지 말아야한다.

 

 

  <좌측의 김시민 장군 전공비>

 

 

 

  <비석의 모습>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 將軍 戰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진주시 본성동 500-1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 대첩(大捷)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主將)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당시 김시민장군은 진주목사(晋州牧使)로서 판관(判官) 성수경(盛守慶),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천명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銳氣)를 꺽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병의 호남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에 불리한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 11년(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우측의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비석의 모습>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진주시 본성동 500-1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宣祖,1593) 6월 19일~29일 사이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壯士)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및 군관. 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旌忠壇)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쳐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이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조선군의 몇 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일차 진주성 싸움(1592년 10월5일)이다. 왜적은 이에 대한 보복을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특명에 의해 기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最精銳)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 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2년(肅宗, 1686)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의 뒷편은 의기사 이다.>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의 모습.>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소재시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


이 비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諸沫)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錄)의 공을 새겼다.

제말장군은 징비록(懲毖錄)에 경상도 고성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웅천(熊川). 김해. 의령(宜寧)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워 곽재우(郭再祐)장군과 함께 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싸움에서 전사했다. 조카 제홍록은 숙부를 따라 공을 세운 후 이순신장군(李蕣臣將軍) 휘하에서 있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사하였다.

정조 16년(1792) 왕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어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에 명하여 비문을 지어 쌍충각(雙忠閣)을 촉석루 옆에 세웠다.

일제 때 일본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다.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의 접근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