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진주성을 찾아서1(경상남도 문화재자료 7호, 8호)(사적 제118호)

천부인권 2009. 4. 11. 20:54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부터~3호가 있는 진주성으로 가는 시간은 1시간 13분이 걸렸다. 촉석문을 지나 촉석루를 구경하고, 쌍충사적비도 구경을 하고 나오는데, 부산에서 온 초등학생들에게 해설을 해주시는 분이 있어 나도 따라 다녔다. 그리고 알지 못하고 갈 뻔한 아픈 옛 역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곳이 진주성인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일본과의 끊임없는 전쟁의 기록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진주성을 둘러보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촉석루와 촉석문의 모습>

 

옛 진주성의 흙이나 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모습이 현재의 진주성이다. 일제가 지배할 당시 진주시내의 늪지에 진주성의 흙과 돌을 모조리 매립용으로 사용하여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패배를 당한 것에 대하여 처절한 복수를 해버렸다.

현재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노여워하지 말자!

 “싸움에 승리한 자는 역사를 남기고, 패배자는 신화를 남긴다!”


<촉석문 1972년 복원>

 

진주성(晋州城)

사적 제118호

진주시 본성동 일대


진주성은 왜적(倭賊)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 5년(禑王, 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원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宣祖,1592) 10월 왜군(倭軍) 2만이 침략(侵略)해 오자 김시민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의 관군. 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정예병력 10만이 다시 침략해 옴에 7만 민. 관. 군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남강의 물은 여전히 흐르고 의암은 지금도 남아있다.>

 

촉석루는 민족의 역사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유물이다. 촉석루가 불타 없어지는 것이 역사 이래로 3번이나 있었다. 첫번째가 고려의 멸망 때이며, 두번째가 임진왜란 때이다. 그리고 민족상잔의 피 눈물이 남은 6.25사변 때에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한다. 또 다시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이 모습 마져도 사라질 수도 있다.

  <촉석루 1960년에 복원>

 

진주 촉석루(矗石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8호

소재시: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


촉석루는 진주시의 상징으로 영남제일(嶺南第一)의 명승(名勝)이다.

전쟁 때는 주장이 병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고려조 고종 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 1190~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7차에 걸쳐 중건 중수를 하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돌이 쭝긋쭝긋 솟아 있어 그 이름이 유래(由來) 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褸)라 부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 ? ~ 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18년 국보로 지정 되었으나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晋州古蹟保存會)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하였으며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1칸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있다.

예부터 북은 평양 부벽루(浮碧褸) 남은 진주 촉석루(矗石褸)라 할 만큼 경치가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시.서화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1347~1416년)의 “촉석루기”를 비롯한 많은 기문(記文)과 현관(懸板) 시판(詩板)이 걸려있다.

 

논개 그녀의 사상과 눈물이 만든 "의기사"는 우리들에게 무언의 이야기를 한없이 들려 준다. 다만 듣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일 뿐이다. 촉석루의 정문이 활짝 열리는 날은 논개(論介)의 제사가 있는 4월2일과 5월2일 이틀 뿐이다. 보통은 좌우의 문만 개방되어 있다. 삼절문을 들어 갈 때에는 우측으로 들어가 우측으로 나오는 것이 예의 이다.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소재시: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의 8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1593년) 왜장(倭將)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서당이다.

논개(論介)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英祖, 1740) 16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3칸, 측면2칸, 맛배지붕의 기와집이다.

 <논개의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