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의암과 의암사적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3호 )

천부인권 2009. 4. 12. 18:05

 

<의암 내려가는 길> 

촉석루 아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의암(義巖)과 의암 사적비(義巖 事蹟碑)가 있다. 나라가 망하면 여인의 정조는 지킬 도리가 없고, 자기 여자를 빼앗긴 남자는 눈물만 흘릴 뿐이다.

 <의암 사적비각(義巖 事蹟碑閣)>

 

의암 사적비(義巖 事蹟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3호

진주시 본성동 500-8(진주성 내)


의암 사적비는 선조26년(宣祖, 1593) 순국한 의기 논개(論介)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의해 논개의 순국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진주 사민(士民)들은 정식(鄭栻, 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비를 세웠고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 1688~1742)가 비각을 세워『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논개(義妓論介)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하게 하고 있으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암 사적비(義巖 事蹟碑)>

<의암>

 

의암(義巖)


의암(義巖)은 논개(論介)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殉國)한 바위이다. 조선 선조26년(宣祖, 1593) 6월29일 임진왜란(壬辰倭亂)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 관. 군이 순절하자 논개(論介)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왜장을 안고 남강에 함께 투신(投身)하여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7년(仁祖, 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 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는 전서체(篆書體)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에는 한몽삼(韓夢參, 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楷書體)로 된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의암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