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진흥왕 척경비를 접수하다.

천부인권 2009. 4. 17. 22:57

 

<활짝 핀 벚꽃 아래 진흥왕 척경비가 봄을 녹이고 있다.>

 

화사한 벚꽃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어느 날 창녕 만옥정 공원에서 옛 역사의 흔적을 뒤적일 때 언덕 가장 높은 자리에 1,500년이나 된 역사의 기억을 보는 순간 만옥정 공원이 자기 것인냥 손에는 목검을 들고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만났다. 40년이 훌쩍 지난 기억 속에는 나도 아이들처럼 세상이 모두 내 것인냥 뛰어다니던 어린시절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만옥정 공원을 접수한 아이들이 신났다.>

 

내친김에 아이들의 추억이 되도록 사진을 한 장 남겨 본다. 언젠가 아이들이 커서 우연히 이 사진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많은 추억을 기억해 내겠는가? 그 추억이 힘이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 세상의 주인이 되기를 기대하고 또 빌어본다.

<누가 있어 이 재미를 알겠는가?>

 

이 아이들의 치켜든 저 목검을 피하려다 봄바람은 길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진흥왕 척경비도 봄 경치에 감겨든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국보 제33호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 공원 내)


이 비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신라 진흥왕(540~576)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北漢山 黃草嶺 摩雲嶺)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 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拓境碑)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丹陽 赤城)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1일 입(辛巳年 二月一日 立)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객석이 없고 인명(人名)과 관등(官等)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비석 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준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부분은 관련 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줄은 3자이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8m, 폭175m, 두께 약 30cm이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에 발견하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진흥왕 척경비의 측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