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달마산의 미황사(보물 제9457호, 보물 제1183호)

천부인권 2009. 4. 20. 16:48

 

 <미황사의 전경>

 

미황사 창건설화(美黃寺 創建說話)

신라 경덕왕 8년(749)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러 갔지만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이 말을 들은 의조화상이 정갈하게 목욕하고 향도와 마을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아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랐는데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衆),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와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나는 본래 우전국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의조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한번 땅 바닥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아니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痛敎寺)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美)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黃)은 금인의 황홀한 색에서 따온 것이다.

 <미황사 입구 엄청난 인파가 몰려 왔다.>

 

미황사 대웅전(美黃寺 大雄殿)

보물 제 9457호

전라남도 해남군 송진면 서정리 247


미황사(美黃寺)는 신라 경덕왕 8년(749)에 건립되었다. 사적비()에 따르면 서역 우전국왕의 인도로 경전과 불상이 가득한 배가 땅 끝에 도착하였는데, 의조화상과 향도 100여 명이 그 배를 맞이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웠다.

창건 이후 미황사(美黃寺)는 조선 중기까지 12암자를 거느린 대사찰의 모습을 갖추고 번성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災亂, 597)을 겪으며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1601년에 중창하고 2008년에 삼창하였다.


대웅보전은 미황사의 중심 전각이다. 한 가운데는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모셔져있다. 1589년에 중창하였고, 1660년, 1754년, 1982년, 2007년에 거듭 중수 하였다.

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산스크리트어 문자와 천불도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인도의 아잔타석국벽화, 중국 둔황막고굴의 천불벽화에 비견되어 지기도 한다.

 <대웅전의 모습 안을 보지 못했다.>

  <응진당 뒤편으로 달마산이 둘러쌓여 있다.>

 

미황사 응진당(美黃寺 應眞堂)

보물 제1183호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247


미황사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선 달마산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남도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선을 전하고, 해동의 달마산에 늘 머물러 있다고 하여 달마산이라 이름 지어졌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찾아와 달마산을 찬탄하고 예경하였다고 전해진다.


응진당(應眞堂)은 석가모니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뛰어난 16분의 아라한들을 모신 전각이다. 응진(應眞)은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환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이들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라한’의 한자어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대웅전과 함께 여러 차례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 벽면에는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가 있는데 선(禪)의 경지를 보여주는 유려한 선(線)맛으로 이름이 높다.

 <응진당>

<응진당의 16나한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