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암(母恩庵), 부은암(父恩庵), 자은암(子恩庵)을 찾아보니 공통점은 하나같이 자연동굴이 있다는 것이고 암수바위가 있든지 아니면 여근이 있어 신석기 시대부터 전해오는 성(性)과 관련된 사상이 이어져 온다는 것이다.
<분산성의 모습>
이제 마지막 남은 해은암(海恩庵)을 찾아서 김해 분산성으로 간다. 네비게이션이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하여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겨우 찾아갔지만 만약 이글을 보고 가고자 하시는 분이 있다면 김해천문대를 찾아가는 것이 고생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다.
<해은암 가는 길가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해은암(海恩庵)는 허황옥과 장유화상(허보옥)이 바다를 무사히 건너 ‘망산도’에 도착하게 해준 용왕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세워 기도했던 곳이라 한다. 현재 망산도는 부산시 강서구로 주소가 되어 있지만 몇 년 전에는 경남 진해시 였고, 그 전에는 창원군에 속한 곳이었다.
지금도 바다는 인간이 이동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교통로 이지만 옛날에는 위험하지만 육로를 이용하기보다 바다를 이용하는 것이 쉽게 이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언제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기에 먼 길을 떠나는 배에는 무게의 중심을 배의 아래쪽에 두어 배가 풍랑에 뒤집혀 지지 않게 하기 위해 돌을 싣고 다녔다. 아마도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탑은 그런 용도로 가져온 돌이지 싶다.
해은사에는 영산전(靈山展)이 가장 큰 법당이고, 그 옆에 이 절에만 있는 대왕각(大王閣)이 있는데, 이곳에는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왕후(虛王后)의 영정이 나란히 걸려 있다. 이 영정을 표준으로 다른 영정들이 제작되었다한다. 수로왕의 영정 아래에는 인도의 망산도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 있는데,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으로 받들고 있고, 영험설화가 전해 온다고 한다.
영산전 뒤편 타고봉(打鼓峰)에는 파사석탑 모양을 본 땄다고 하는 적멸보탑(寂滅寶塔)이라는 부도가 있는데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 타고봉에 북을 매달아두고 비상시에 북을 쳐서 주민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산신각이 있는데, 입구에 서있는 암석이 남근을 상징한다고 한다.
해은암(海恩庵)에도 자연동굴과 남근석이 있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져있고 자손의 번창과 나약한 인간을 혹하게 하는 구복신앙이 그대로 남아있다.
<요사체에서 바라 본 모습>
<대왕전>
<수로왕과 허왕후>
<인도에서 왔다는 봉돌>
<영산전>
<영산전의 불상들은 예쁜 옷을 입고있다.>
<타고봉 위에 있는 진신사리 부도탑>
<산신각 입구에 있는 남근석>
<산신각>
<산신각 내부>
사적 제66호인 분산성(盆山城)은 김해시 어방동 산9번지에 위치하며, 해발 330m로 봉수대, 만장대, 충의각, 해은암을 품고 산정상부에 돌로 띠를 두른듯 쌓은 퇴뫼식산성으로 김해의 진산이다. 현재는 무너진 산성을 복원하여 먼 곳에서도 산성이 잘 보인다. 그런데 복원을 하였다는 산성이 역사적 고증을 하고 했는지 의심이 간다. 산성은 침입자의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것인데, 만들어진 산성의 바깥쪽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침입하기 쉬운 구조로 보인다.
<새롭게 축성한 분산성곽>
<거북머리를 한 돌>
이곳에 1999년에 복원된 봉수대가 있는데, 그 입구 암벽에『만장대 기념목 천생만장대 아식천년수 임진맹춘 정기만 “하늘이 만든 만장대에 나는 천년을 갈 나무를 심었다. 임진년 꽃샘추위가 한창인 봄날에”』이라는 글귀가 있다.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과히 절경이라 할만하다. 김해시와 김해평야를 한눈에 바라보고 저 멀리 낙동강의 끝자락이 보인다.
<봉수대 암벽의 글>
만장대기념목(萬丈臺記念木) 만장대 기념식수
천생만장대(天生萬丈臺) 하늘이 만든 만장대에
아식천년수(我植千年樹) 나는 천년수를 심었다.
임진맹춘(壬辰孟春) 임진년 꽃샘추위가 한창인 봄날에
정기만(鄭琪萬) 정기만이 쓰다.
<봉수대>
<만장대 뒤쪽에 있는 자연동굴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았다.>
분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만장대(萬丈臺)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 남아 있는 곳으로 왜적을 물리친 전진기지로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명명 되었다. 기이한 바위가 대문처럼 놓여 있기도 하고 바위 사이에 동굴이 있어 해은암(海恩庵)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를 알게 한다.
<흥성대원군이 쓴 만장대 친필>
충의각에 있는 4개의 비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분산성의 내력이 적혀 있는데, 고려말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박위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한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築城事蹟碑)”는 조선시대 김해부사로 부임한 정현석이 고종8년(1871년)에 다시 산성을 고쳐 쌓으면서 세운 비석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 2기는 김해부사 정형석이 분산성을 쌓은 후 이를 허가해준 흥선대원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석에는 고려말 정몽주가 쓴 분산성관련 글도 새겨져있다. 또한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府使通政大夫鄭顯奭永世不忘碑)”는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정현석 부사의 공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고종11년(1874년)에 건립한 것이다.
<충의각>
<바위를 깨고 비목나무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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