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암(母恩庵)과 부은암(父恩庵)을 찾아보니 공통점은 자연동굴이 있다는 것이고,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진 곳으로 남근과 여근을 의미하는 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곳은 옛날부터 자식을 많이 낳고 오래도록 잘살기를 바라는 구복신앙의 기도처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자암산이 지금의 봉화산임을 기록하고 있어 자은암(子恩庵) 사지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봉화산 마애석불이 있는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산3번지 일대로 추측을 하게 한다.
<들판 저쪽에서 바라본 봉하마을 풍경>
자은암(子恩庵) 사지(寺地)를 갈려면 봉하마을을 거치게 되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로 봉하를 지나는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봉하마을과 봉화산이 다 보이는 맞은편 들녘에 차를 주차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농로를 따라 마을 입구에 당도하니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 억지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분향소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여기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에게 어느 정도 방문객이 오는지 물어보니 일주일에 10만명은 오신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고 있다.>
“꽃이 져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라는 이광재씨의 옥중 편지 현수막 앞에서 한 여성분이 끝까지 다 읽고 있었다. 분향소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두 대통령이 살아생전에 손을 잡고 계신 대형 현수막과 노무현 대통령의 영전 앞에서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시는 어르신이 계서 사진으로 남겼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는 거의 복원이 되었다. 그런데 초가3칸의 집 기둥이 둥글다. 어떤 의미로 둥근 기둥을 사용 했을까? 다음에 기회가 오면 꼭 물어 보고 싶다.
마을사람에게 자은암에 대해 물어보니 잘 모르셨고, 다만 “봉화산 마애석불”은 일제시대 때 이곳에 2명이나 큰 인물이 날것이라고 하여 “봉화산 마애석불”을 넘어트렸다고 하시며, 그 후 마을사람들은 재앙이 오지 않게 하는 비책으로 마을 주위에 대나무를 심어 50년을 기다리니 노무현 대통령이 나왔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직 오시지 않은 한 분을 마을 사람들은 오실 것으로 믿고 있으며 큰 인물이 봉하마을을 새롭게 발전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꽃이 져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분향소>
<생즉고>
<생가 복원>
<버려진 창고에 붙어 있는 문구>
<봉하마을의 비책인 대나무>
노무현 대통령님의 묘역으로 발길을 돌려 가니「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님 묘역안내」라는 입간판이 있다. 그리고 이처럼 무더운 땡볕도 아랑 곳 없이 많은 사람들이 묘역에 참배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많아 한 분에게 물어 보니 “아이들에게 역사가 무엇이며, 보이는 것 외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힘을 길러 주고 싶다.”고 하신다. 지나는 길바닥 돌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자연과 묘역을 분리한다는 철판에는『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고 적어두고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많은 분들의 가슴에 민주주의를 심어줄 것으로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한다.>
<묘역으로 가는 길위에 쓰여진 글들>
<무엇이 이들을 이곳에 오게 하는가?>
부엉이 바위에 가니 거대한 여근이 만들어져 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와파편들이 이곳에 기와집이 있었음 증명하고 있어 자은암 사지임을 믿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도 자연동굴이 있어 여성의 자궁에 흐르는 신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엎드려 들어가니 동굴 속에서 수행생활을 하시는 분이 계셨다.
동굴의 입구에 있는 우측 바위는 어떻게 보면 두꺼비 같고 어찌보면 만어사의 ‘어산불영’을 닮았다. 수행을 하시던 스님이 이곳이 자은암(子恩庵)이 있었던 곳이라 설명을 해주시며, 기와파편들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부엉이 바위에 자은암의 산신각 터가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산신각 터의 바위모양이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용선”을 닮았다.
<부엉이 바위에 선명하게 만들어진 여근>
<동굴입구>
<동굴 안에는 공부를 하시는 스님이 계셨다.>
<스님이 보여 주신 기와 파편들>
<자은암 산신각 자리>
봉화산 마애불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전설에 의하면 이 마애석불은 당나라 황후의 꿈에 한 청년이 나타나 자꾸만 자기를 괴롭히므로 신승(神僧)의 힘을 빌려 그 청년을 바위틈에 넣어 김해 땅 봉화산의 석불이 되게 함으로써 생긴 것이라 한다.
<옆으로 누워 있는 마애불>
<돌아 오는 길은 석양이 같이 한다.>
휘돌아가는 청령포에서 차마 못다외운 왕방연의 싯구가 생각이나 적어 본다.
천만리 머나 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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