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수로왕비릉을 가다.

천부인권 2009. 8. 29. 19:34

 분산성(盆山城)을 내려와 수로왕비릉에 있다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보러 갔다.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에 있는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은 사적 제74호로 분산에서 구지봉(龜旨峯)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구산터널’ 위로 걸어가면 구지봉으로 간다. 구지봉 아래에 있는 큰 건물은 국립김해박물관이다. 이 모두는 걸어서 20분 이내에 있다.

잘 정비되어 있는 주차장에서 수로왕비릉으로 가니 홍살문이 있고, 외삼문인 구남문(龜南門)을 지나니 확 트인 공간의 저 끝에 수로왕비릉이 나타난다. 우측에는 숭보재로가는 길이고 저 멀리 분산성이 보인다. 수로왕비릉 앞 우측에 파사각이 있고 그 안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인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 다고 한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으나 1873년 절이 폐쇄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릉 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이 자리로 옮기고 파사각을 세웠다고 한다.


 

 

 <홍살문>

 

<숭보재 가는 길 저 멀리 분산성이 보인다.>

 

<쌍어의 조각이 있는 음수대에서 쌍어가 신임을 알린다.>

 <파사각>

 

 

 <파사석탑>

 

안내표지에는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고, 능비와 상석은 1647년 설치된 것이다. 원형봉분의 규묘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능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에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 새겨져 있다.” 16세의 나이에 가락국의 왕비가 되었고, 1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의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 경남 김해시에 있던 사찰)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일대가 금관국(金官國)이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후한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 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배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님의 명에 따라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출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파신(波神)의 노여움을 사 떠나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께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별 탈 없이 바다를 건너 (금관국) 남쪽 언덕에 닿아 배를 댔다.

 

이때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잔뜩 싣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또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른다.

 

수로왕이 황후를 맞아 150여 년 동안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해동(海東)에는 사찰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받들지는 않았다. 상교(像敎, 불교의 다른 이름)가 아직 전해지지 않아 이 지방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보면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은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사찰을 두었다.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기에 해당한다.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까지도 복을 빌고 있다. 또 아울러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탑은 네모난 4면이 5층으로 되어 있고, 조각이 아주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하지만 붉은 무늬가 있는데, 품질이 매우 좋지만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은 아니다. <본초(本草, <신농본초(神農本草)>)>에서 닭 벼슬의 피를 찍어 시험하였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달리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가락국본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 험한 물결 누르며 헤치고 왔구나.

어찌 황옥(黃玉)만 도와 이 언덕에 왔겠는가,

천년 세월 왜놈의 노경(怒鯨, 화가 난 고래)을 막아 왔다네.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初公主承二親之命 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 不克而還 白父王 父王命載玆塔 乃獲利涉 來泊南涯 有緋帆茜旗珠玉之美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祇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 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 本草所云點鷄冠血爲驗者是也 金官國亦名駕洛國 具載本記 讚曰 載厭緋帆茜旆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古南倭遏怒鯨


 

 

<수로왕비릉>

 

<구지봉으로 가는 구산터널 위에서>

 

김병모교수는 허왕후가 중국 사천성 가릉강 유역 보주지역에 살던 소수민족인 파족 출신일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파족은 서기47년 허성이라는 사람을 우두머리로 한나라에 봉기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보주에서 양자강을 따라 오늘날의 상해에 도착하였다가 바닷길을 따라 서기48년 가락국에 이르렀다는 주장을 한다.


‘보주태후’라는 비문에 의해 삼국유사의 주장이 다르고, 김병모교수의 주장이 다르다. 가락국의 실질적 주인인 김해 김씨나 김해 허씨는 자신들의 조상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지 못해 온갖 억척이 난무하게 한 것에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집안이나 족보라는 것이 있는데, 감히 나라를 이끌던 집안의 족보에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기록을 해두지 못한 것은 미래의 자손들에게 자긍심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김해 허.김씨들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하나로 불교인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자 스스로 불교와 관련된 문구를 지워버리고 벼슬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락국의 많은 역사가 사라져 버려 오늘날 추리소설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구지봉 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