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옥천사 청련암에서 마신 차 한잔이 그립다.

천부인권 2009. 9. 24. 22:39

우연히 만난 마산에 계신분의 가족과 함께 청련암으로 가자고 합의하고 서로의 차에 올라 좁다란 길을 따라 올라가니 주차를 할 만큼 충분한 공간이 나와 쉽게 주차를 하고 청련암의 두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본다. 절 입구에 5층석탑과 석가여래좌상이 나란히 손님들을 맞이한다. 그 위쪽에는 비석과 불(佛)자가 붉은 글씨로 새긴 비석이 서있다. 연화산 청련암(蓮花山 靑蓮庵)이라는 편액이 붙은 입구를 지나면 청련암 경내에 들어선다.


 

 
이 청련암에는 전설을 간직한 서봉 인오스님 이야기가 전하니 『입적이 가까웠을 무렵에는 중풍이 와서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고 대소변을 받아내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되자 방에서 아무데나 대소변을 누어 방안에 구린내가 진동하여 옥천사에서 공양을 들고 간 행자들이 냄새 때문에 서로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싸우는 형편이었다. 스님이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다가 열반하여 다비를 할 때 옥천사 근방 하늘이 대낮같이 훤하게 방광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새겨놓은 각자가 옥천사 입구 버스주차장근처 암벽에 “서봉인오 방광탑(瑞鳳印悟放光塔)”이라는 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 한다.


 

 

 

 

 
옥천사는 정조 말기에 "어람지 진상사찰"로 지정되어 철종14년(1863) 해제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 닥종이 제조 부역에 시달렸다. 스님들은 공양만 먹으면 닥나무 껍질을 벗겨 끓인 후 이를 찧어 계곡물에 일렁거려 종이를 뜨는 노역에 시달렸다. 노역에 질린 스님들은 하나 둘 떠나기 시작,  정조말기에 340명을 헤아리던 스님 숫자가 철종 15년 해제될 때는 10여명이 남았다 한다. 옥천계곡에서 자라는 닥나무는 품질이 좋은데다 색색으로 물을 들여 진상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옥천사 닥종이를 최고로 쳐주었다. 이때에 쓰던 유물로서 유일 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지금 청련암에 무쇠솥이 남아 있다.


청련암이 운영하는 청소년 육아원 “보리수 동산”이 있다. “보리수 동산”은 옥천사 입구에서 배둔 쪽으로 약 1Km 떨어진 개천면 좌연리 옛 좌연분교 자리에 있다. “산수가든”을 지나 도로변에 “보리수 동산” 입구 표시가 있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서 동네를 지나 안쪽에 있다. 현재  대학생 1명, 고등학생 5명, 중학생 9명, 초등학생 40명 등 총 원생 64명이 살고 있다. 지금까지 100명의 아동들을 배출하였으며 그 중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도 있다. 원장 승욱스님을 비롯 총 10명의 직원이 있고 고성군으로부터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받았다.


 

 

청련암에 들어서면 황소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황소가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황소바위라 불리 운다. 오른 쪽 윗부분을 두드리면 소 엉덩이를 두드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난다. 어느 때 통행에 지장이 있다하여 석수를 시켜 목 부분을 잘라내려 하자 바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날 밤 감원 스님의 꿈에 황소가 나타나 슬피 울더라고 한다. 그리하여 바위를 그대로 두게 되었는데 손상된 부분에는 지금도 피가 흐른 흔적이 있다. <출처 : 옥천사>


 

 

 

 

 함께 간 마산에 계시는 분이 자원봉사를 “보리수동산”에 왔어 차 대접을 하시는 스님을 뵈었다고 하신다. 법명을 묻지 않았지만 승욱스님으로 생각 된다. 스님의 이야기 중에 “걸식을 하며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옳은지, 일을 하여 소득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서 무릇 중이란 가난해야 한다.”며 물질적 부의 허망함을 알려주신다.


 

 

 
옥천사 청련암을 뒤로하고 집으로 와서도 그분의 깨끗한 미소와 좋은 말씀이 생각이 나서 청련암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차 한잔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