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모임이 있는 날 한 시간 빨리 출발하여 합포성지를 둘러봤다. 보통의 성지(城址)는 기념물이나 문화재자료 등으로 분류가 되어 있는데, 마산시 합성동 73-4번지 일대에 있는 합포성지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등록되어 있다. 안내표지의 기록은 이러했다.
<반대쪽에서 본 합포성지>
『기록에 의하면 이 성은 1378년(고려 우왕4)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곳에 부임한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이 병사와 주민을 동원하여 쌓은 다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慶常右道 兵馬節度使영)으로 사용하였다.
성(石城)의 둘레는 1.3km이고 높이는 4m이며, 성위에는 60cm간격으로 요철(凹凸)의 성가퀴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성에는 4대문이 있었고 성 안에는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懷盈庫) 등의 건물과 함께 5개의 우물이 있었다. 당시 창검과 기치를 세우고 감시병이 밤낮으로 감시하면서 위용을 과시하였기 때문에 왜적이 감히 넘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성은 1593년(선조26)에 병영을 진주로 옮기면서 합포진(合浦鎭)의 진성(鎭城)으로만 남게 되었다.
성의 외벽은 아랫부분에 큰 받침돌을 두고 견고하게 쌓아올렸는데, 이런 방식은 조선 전기 남해안의 읍성축조(邑城築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성벽은 바탕 돌 위에 다듬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는데, 상단부로 오를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현재 성벽은 일직선상으로 80m 정도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 산천조(昌原都護府 山川條)에는 고려 말 원나라의 일본 정벌 전진기지가 합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책의 고적조(古蹟條)를 보면 그 기지가 이곳에서 서쪽으로 1km 더 떨어진 자산동(玆山洞) 지역에 있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이 성이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기지와 관련이 있는 지는 불명확하다.』고 써놓았다.
<성지의 입구에는 헌옷수거함이 놓여 있었다.>
<합포성지>
<또 다른 합포성지 풍경>
<입구쪽에서 바라본 마산 합포성지>
<과거에 사람이 목을 매었다는 커다란 은행나무>
도심에 위치한 합포성지가 이곳 주민들에게 어떻게 비취지고 있는지 몇 분과 대화를 해 봤다. 집을 증축하거나 개축을 할 때 불편하다는 것과 합포성지 앞에 주차장을 하는 곳에 개들을 키우고 있는데,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고 있어 아이들이 다칠까봐 불안하다는 분도 계셨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자기 집에 커다란 대추나무가 있었는데 잘라 없앴다고 하시며 성지 안에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는 예전에 사람이 목을 매어 자살을 한 곳으로 마을 안에 큰 나무가 있어 음침한 기운이 돈다며 합포성지가 마을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성지 주변의 땅을 마산시가 사들여 공원으로 꾸며서 밝은 모습으로 바꾸어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면 쓸데없는 소문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도심의 문화재가 그곳 주민들에게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데 주민들의 말씀대로 마산시는 버려둔 음침한 땅이 아니라 인근의 땅을 사들여 성지가 있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든다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떠돌이 개처럼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개는 민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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