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백운산 상연대와 석장승(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9호)

천부인권 2009. 10. 1. 08:34



함양 상연대 목조관음보상좌상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상련대와 석장승이 있는 백전면 백운리를 향했다. 가는 길은 벚꽃나무가 길가에 나란히 심어져있어 벚꽃이 필 무렵에 온다면 장관이겠다 싶었다. 선비의 고장답게 길에는 비각과 정자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런 것을 다 챙겨보려고 한다면 해 안에는 못갈 것이다.



벗꽃거리

 

길가에 ‘상연대’라는 표지석이 있다. 네비게이션은 백운교를 건너라고 가리키고 있어 앞으로 곧장 가니 예감이 분명 아니다. 한참을 돌아 다시 내려와 가을 수확을 하시는 마을 할머님께 물었다. 석장승은 모르시고 상연대는 백운교 입구에서 산으로 올라가란다. 아까 보았던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와 상연대를 먼저가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산으로 오르는 곳에 이 마을의 마지막 집인 듯 보이는 곳에 주민이 있어 다시 물었다. 상연대와 석장승의 위치를 알려 주신다. 그리고 한마디 하신다. “이 동네는 네비게이션이 찾지를 못하는 곳이요!”
우리가 만든 문명의 이기 중 최첨단이라는 네비게이션이 무용지물인 백운리 산골 마을은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멈춰서 숨을 고르는 신선(神仙)이나 사는 곳인가 보다.


 


좌측은 상연대로가고 우측은 석장승이 있는 곳이다.

 
오늘 일정의 차례를 바꾸어 상연대(上蓮臺)부터 가기로 마음먹고 차 한 대 겨우 가는 산길을 따라 무작정 달렸다. 제법 산을 오르니 길옆에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벌써 다 왔나 하고 생각 했다.’ 그런데 묵계암이다. 내려오는 길에 들려보기로 하고 무작정 산길로 차를 몰았다. 상연대라는 표지석에 0.6km라고 적어 두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의 끝에 상연대가 있다.


 


묵계암 입구

 


묵계암 주차장

 


상연대가 0.6km라는 표지석

 

 


돌계단을 오르다 돌아보니 노란 개나리차가 보인다.

 
『상연대(上蓮臺)는 백두대간 백운산(1279m) 자락에 자리한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경애왕 1년(924)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이라는 이름을 주어 상연대(上蓮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을 여기에 옮겨와 선문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이 고승, 대덕스님들의 수도도량이었으나 1950년 6.25전란으로 불타, 1953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상연대 원통보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78-1번지에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6호인 함양 상연대 목조관음보살좌상(咸陽 上蓮臺 木造觀音菩薩坐像)이 모셔져 있는 곳은 대웅전이 아니라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는 편액이 붙어져 있다. 그리고 유리통 안에 들어 있어 사진으로 남기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크기는 높이가 60~70cm 정도로 작았고, 화려한 관모를 쓰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있으며, 오른손에는 약병을 들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지 않고 두터운 법의를 걸쳤으며 입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있어 신비감을 주고 있다. 


 


상연대의 이런저런 모습
 


측면에서 본 모습

 

상연대에 계시는 스님의 법명을 들었는데 적어두지 않아 잊어 버려 지금 그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상연대에서 바라본 풍경 저 끝은 지리산이다.

 

 


상연대 앞은 절벽이다.

 

내려오는 길에 묵계암에 당도하여 차를 세우고 들어가니 비구니스님이 계셨다. 대웅전과 그 옆의 생활공간이 전부인 단촐한 암자이다. 암자의 주위는 많은 야생화가 심어져 있어 마치 꽃밭을 연상케 했다. 비구니스님의 양해를 얻어 대웅전을 촬영하고 가려고 하니 잠시 앉아 보라고 권하시며, 복분자와 머루의 즙으로 만든 꿀맛 같은 차한잔을 주신다. 그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지금에서야 마음을 전하는 참 미련한 사람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까 올라올 때 묵계암 입구에서 보았던 싯구를 옮겨 본다.

 


 


묵계암 대웅전

 

 

백운산 푸른 하늘
물소리 고요하고
흰구름 한가롭네.
태고의 신비로움
가득히 머금은
맑은바람 향기로운
산사의 풍경소리
달은 밝고 밝아
푸른산 비추이네.


 


용담이 피었다.

 

영은사지 석장승(靈隱寺址 石長承)을 찾았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영은사지 석장승(靈隱寺址 石長承)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9호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1158

 

 


민속자료 제19호 석장승

 

『신라시대 영은조사(靈隱祖師)가 개창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석장승은 영은사(靈隱寺) 옛 절터 입구에 서있다. 장승은 만든 재료에 따라 석장승, 목장승으로 불리며,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 성기숭배(性器崇拜)에서 나왔다거나 사찰 토지의 표지로 이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장승이 지방에 따라 벅수, 벅시, 법수, 수살목, 당산할배 등으로 불렸다. 장승은 소속과 위치에 따라 마을을 지키는 마을장승, 사찰의 입구나 사방경계에 세워진 사찰장승 외에 지역 간의 경계, 공공시설물의 수호를 위한 공공장승 등이 있다. 따라서 장승은 한국고유의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어우러져 나타난 하나의 조형물이다.
이 장승은 우호대장군(右護大將軍)과 좌호대장군(左護大將軍)이라고 쓰여 있는 바와 같이, 각종 금지법규를 지키며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 호법신장상(護法神將像)이라고 할 수 있다. 관모를 쓴 머리는 마치 큰 상투를 얻은 것과 같으며, 큰 눈과 큰 주먹코, 꽉 다문 일자 입, 입가의 수염이 잘 어우러져 있다. 풍만한 체구임에도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모습 때문에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좌호대장군의 오른쪽 아래 ‘건륭30년 을유 윤 2월(乾隆三十年 乙酉 閏二月)’이라는 기록이 있어 제작연대가 1765년(영조41)임을 알 수 있다.』


 

 

<석장승의 모습>

 

 

민속자료들을 볼 때마다 참 정겹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우리의 정서 속에 녹아 있는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 외국의 위대한 유산을 보아도 그 감흥이 우리의 민속자료에서 느끼는 것보다 못한 것을 보면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석장승의 얼굴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