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함양 학사루(學士樓)에 얽힌 무오사화(戊午士禍)이야기

천부인권 2009. 9. 29. 20:57

 
함양군청에 주차를 하고 1084도로를 건너면 함양읍 운림리 31-15번지에 학사루가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학사루는 2층으로 가는 곳을 봉해 두어 올라 갈 수는 없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안정된 관청건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정면에서 본 학사루>

 

함양 학사루(學士樓)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치원 선생이 천령태수로 있을 때 이곳에서 자주 시를 지었기에 학사루라는 이름이 붙어졌다고 한다.
월래 학사루는 객사의 부속 건물로 함양 읍성(咸陽 邑城)의 중심에 위치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이 건물만 남겨두고 모든 건물을 없애 버렸다. 화려한 건물은 아니지만 누의 아래 위, 지붕의 비례가 대단히 조화롭고 안정되어 있는 조선시대 관청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누각이다.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비교적 큰 2층 팔작지붕 건물로 객사자리인 현 함양 초등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9년에 이 위치로 옮겼으며, 이전 당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92년(숙종18)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무오사화 그 무시무시한 일이 시를 적은 편액 때문이라 하니 인간의 생각이 허무하다.>

 

이 건물은 무시무시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부르는 일화가 있는데,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이 쓴 시를 철거한 일 때문에 사적 원한이 발전하여 1498년(연산군4)에 사림파(士林派)가 훈구파(勳舊派)에게 죽임을 당하는 원인을 제공한 곳이다.


 

<학사루 편액>

 
성종 때 김종직을 중심으로 사림파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여 정계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3사(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의 언론 및 사관직을 차지  하면서 훈구대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는 등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당상관이 된 훈구파 이극돈이 사림파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史草)점검을 하는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하고,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하여 선비를 싫어하던 연산군이 김일손을 심문하여 모든 것은 김종직의 선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몰아,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어 죽어도 죽지 못하게 만든 사건이 무오사화(戊午士禍)다.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

 

<학사루 앞에 있는 석등>

 

학사루를 뒤로하고 함양중학교 건물 중앙 입구에 있는 보물 제376호인 함양 석조 여래좌상(咸陽 石造 如來坐像)을 만나러 이동을 하였다. 안내표지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앉은 높이가 2.45m에 좌대를 포함하면 무려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이다. 불상 뒤의 광배가 없어지고 얼굴. 오른쪽. 무릎과 대좌의 일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얼굴이 많아 닳았고 머리 부분도 깨어져 있으나 크고 강건하게 보인다. 코와 입의 모습은 함양 마천면의 마애여래입상과 닮았는데, 미소까지 비슷하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두텁게 새겨진 법의는 왼쪽 어깨만 걸쳐있다. 오른손은 깨져 없어졌지만 땅을 가리키는 모양으로 보이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사각형의 좌대는 측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상대(上臺), 한면에 두개씩 눈 모양을 새긴 중대,  두텁게 새긴 겹 연화문을 돌린 하대의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석조불상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작으로 원래는 청룡사 터 또는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함양 석조 여래좌상>

 

<보물 제376호>

 

차의 시동을 걸고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상연대와 석장승이 있는 곳으로 이동 하려는데, 마침 학생들의 하교가 시작되어 학교가 시끌벅적 소란스럽다. 혹시 백전면으로 가는 학생이 있는지 찾았지만 찾지를 못하고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여전히 웅장한 모습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