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사를 가는 길은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달렸다. 가는 동안 응석사(凝石寺)란 이름에 관심이 갔다. “집현산이라는 예사롭지 않는 지명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절 이름이 고개를 갸웃뚱 하게 한다. 응석(凝石)이란 ‘응겨 붙은 돌’이라는 뜻인데 무엇이 돌까지도 응기게 했을까?”이런 의문은 응석사 일주문을 지난 범종각 아래에 쓰여 있는 응석사의 유래에서 대략 감이 온다.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743번지에 위치한
『집현산(集賢山) 응석사(凝石寺)는 신라가 한강유역과 낙동강 하류 서부지역 가야국을 통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국운이 왕성하던 시기인 진흥왕 15년(554) 연기조사께서 창건하신 서부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15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전통 고찰이다. 신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이며 대가인 도선국사가 주석하면서 모감주나무를 심어 대를 이은 고목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금도 그 열매를 따서 염주를 만들고 있다.
여말에는 지공, 나옹, 무학 삼대화상이 수행하신 대가람이었으나 조선 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 사명대사의 지휘 하에 전국 방방곡곡 사찰의 스님들이 구국의 일념에서 자진 하산하여 승군을 조직하여 목탁대신 무기를 가지고 왜구와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여기 응석사가 경상도 승병들의 활동 본거지 이며 군수물자가 있는 병참소라는 것을 왜구들이 알고 쳐들어와 승군과 격전을 치룬 나머지 사찰이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6대 인조 때 일옥 진묵대사가 대웅전과 삼존불을 조성하고 요사를 복원하였지만 1980년대 까지 법당을 중심으로 대지 300여평만 사찰소유 부지였고, 사방이 개인 소유의 땅이고 심지어 법당 5m 거리까지 농사를 짓고 있는 실정이었다.』고 응석사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1호인 응석사 대웅전(凝石寺 大雄殿)의 안내판에는
『응석사는 진흥왕 15년(55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으며, 문무왕 2년(662)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서 강원을 열었다고 한다. 이 절은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문수전, 극락전, 영산전, 나한전과 163개의 방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침입해 불상 밑에 숨겨둔 무기를 발견하고 절을 불살랐다고 한다.
이 대웅전은 영조 12년(1736)과 광무 3년(1899)에 두 번이나 중건하여 조성되었으며, 이후 1983년에 재차 개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건물로 화려함 보다는 소박한 느낌을 주며, 기둥은 가운데가 약간 불룩한 배흘림으로 대단히 굵다. 지붕의 치마는 건물의 높이에 비해 짧으며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처마가 길지 않음에도 처마를 받쳐주는 기둥(活柱)이 있음이 특이하다. 1983년에 개수하면서 중건 당시의 건물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어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룬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대가람을 이룬 사찰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멸문을 당하여 다시는 회생할 수 없는 지경까지 처참한 상황으로 몰려 쓸모없어 보이는 돌까지도 응겨 붙지 않는다면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을 예견한 이름인 것 같아, 모진 세월 지난 지금에는 발전하는 절집이 되기를 빌었다.
응석사 대웅전 삼존여래좌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1호로
『주존은 석가불이며 좌협시는 아미타여래, 우협시는 약사여래로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삼세불이다. 이와 같은 삼세불은 조선 후기 17세기부터 나타나는 현상으로 불사의 윤회설에서 기인된 것으로 생각된다.
삼존 모두가 당당한 체구에 머리를 약간 구부린 자세이나 육계, 나발, 얼굴모습과 의습, 특히 엄지와 중지를 맞대 인 중품중생의 수인은 17세기 이후의 시대적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주존 좌상의 높이는 144.5cm, 좌협시 130.7cm, 우협시 124.8cm로 대형에 속하는 이 삼존상은 2003년 본 대웅전 중수를 위하여 불상을 임시봉안 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복장조성기(腹藏造成記)에 의하여 1643년에 제작되었음이 밝혀진 자료로써 임난 이후의 삼세불 연구에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격이 높은 불상이라 하겠다.』라 쓰여 있다.
응석사를 유명하게 한 것은 응석사 입구 개울에 있는「무지개 샘」이었던 것 같다. 이 샘은 지금은 대장균의 침입으로 폐쇄해 두었지만 폐쇄하기 전까지 하루 종일 이 샘물을 떠가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샘이었다고 이곳을 방문한 신도 한분이 말씀을 해주셨다. 그것을 증명 하듯이 샘 입구에 석등이 놓여 있고 계단이 만들어 져있으며, 개울에는 놓여진 거북이가 샘을 향해 올라오는 모습을 하고 있고, 지금은 머리가 깨어졌지만 샘물이 나오는 곳은 거북의 머리모양을 한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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